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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ㅣ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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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장소,환대>라는 인문학 도서의 도입부에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몸담고 있는 사회 속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사람의 그림자로 빗댄 알레고리다. 얼마 전 예화의 원작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 열림원>를 만났다.
저자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프랑스 태생의 독일 작가다. 귀족 가문으로서 프랑스 혁명 이후 독일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일에서 작품 생활을 이어갔다. 프랑스인이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건너 간 망명국 독일은 그에게 제 2의 조국이 되었고, 프랑스 귀환령이 내려졌지만 영원한 독일인으로 남았다. 국적의 경계선 상에 서 있던 저자, 프랑스라는 그림자가 없는 독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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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페터 슐레밀'이라는 남자가 주머니에서 온갖 잡다한 물건을 꺼내는 기이한 사내를 만나면서부터다. 살아있는 말까지 주머니에서 꺼내는 이 남자의 정체는 악마다.
악마는 슐레밀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화수분처럼 금화가 솟아나는 주머니를 줄테니 당신의 그림자를 내게 파시오!"
악마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 귀가 솔깃하다. 마술 주머니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는 일은 시간 문제다. 달콤한 상상 끝에 슐레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다.
솜씨 좋게 슐레밀의 그림자를 걷어낸 악마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사라진다. 반면 무한 금화가 쏟아지는 주머니를 손에 넣은 슐레밀은 예상대로 큰 부자가 된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이야기는 행복 대신 비극의 서막일 뿐.
거리에서 만난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햇살에 비친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음을 발견하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마치 무서운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보듯 경악하며 피한다. 슐레밀이 자신의 그림자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매체였음을 파악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 '미나'를 만나고, 결혼을 꿈꿨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는다. 아무리 돈이 많은들 사회 속에서 바른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니 비극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슐레밀 앞에 그림자를 걷어 간 악마가 찾아온다. 마법의 금화 주머니를 반납할 테니 그림자를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슐레밀에게 악마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마법 주머니는 필요 없고, 대신 슐레밀의 영혼을 팔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는 것!
슐레밀이 죽음을 맞이할 때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악마의 제안 앞에 슐레밀은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까? 영혼을 팔고, 그림자를 되찾아 사랑하는 여인 미나와 재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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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를 읽으며 괴테의 <파우스트>가 떠올랐다. 그런데 악마와의 거래라는 소설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는 동일하지만 작품의 의미가 갖는 결은 확실히 다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보이는 주요한 주제는 그림자가 갖는 의미 속에 내포되어 있다. 악마가 엄청난 부를 대가로 지불하며 구입하려고 한 인간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림자를 잃고 난 후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따돌림 당하는 슐레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인간의 그림자 속에 묻혀 있음을 발견한다. 무의식적 개체인 그림자를 사용한 메타포, 사회 속 인간으로서 수용 가능한 최소한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본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다. 그림자라는 매개체를 시대와 개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다채롭게 풀이할 수 있기에 의미 또한 제각각이다. 대표적인 해석은 역시나 소설의 전면에 드러난다. 작가가 살다간 18, 19세기 근대 산업혁명 자본주의 사회 속 배금주의와 빈부의 격차로 인한 사회적 연대감의 상실이다.
20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 가진 시대적 예지가 놀랍다. 돈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팔아버리는 세대,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자격(인종, 국적, 지위, 재산, 학력, 외모 등)을 갖추지 못했기에 용인되며 환대 받지 못하는 병리적 세태가 지금의 시대상 아닌가?
부에 대한 갈망은 금화주머니를 통해 투사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용납 받지 못하는 상황은 그림자라는 개체로 코드화 되었다. 돈에 대한 끝없는 탐욕과 그림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보편성의 상실이 가져오는 인간 소외, 모든 것이 2024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와 한 치의 오차 없이 오버랩되기에 소름 돋는다.
인간 본성과 사회의 정신적 퇴행을 꼬집은 환상 소설, 작품 저변에 짙게 깔린 시대적 적실성을 염두에 두며 읽을 때 또 다른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