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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2016.11
현대시학사 편집부 엮음 / 현대시학사(월간지)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 현대시학 2016. 11 Vol. 570
1. 한 작가의 시집 한 권을 읽는 것과 문예지나 수상 모음집을 읽을 때의 느낌은 다르다. 시인이 짧게는 3년, 길게는 7, 8년의 시간을 견디며 한 권을 시집을 묶는다. 그 속에는 변함없는 중심 줄기와 조금씩 깎여 새로운 틈을 찾아 흐르는 주변이 동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오래된 과거와 근황을 일관된 흐름 속에 두루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집을 소장하게 된다. 반면 문예지 등은 지금, 현재의 문단의 경향을 파악하는데 유익하다. 특히 등단한 지 얼마되지 않았거나, 첫 시집을 낸 시인부터 몇 권을 출간한 중견시인들이 바로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즉각 느낄 수 있는 날 것에 가깝다.
이민하 시인(혀, 포지션), 김종연 시인(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황혜경 시인(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김이듬 시인(나는 춤춘다)의 신작시들이 좋았다. 2016년 하반기 신인상 김유림 시인의 등단작들이 실려 있다.
- 김종연, 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99-101쪽 부분
‘누구나의 삶에서 자기 삶의 주연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지만 어쩌다 내 삶의 주연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지만 어쩌다 내 삶의 주연이 되어버린 사람은 배우로서 실패한 삶이니 그 또한 아프게 될 것이다.’
‘과거는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는 내게 목죽을 맨 말뚝이고 나는 내 삶을 다해 원을 그린다. 중심을 향해 점점 작아지는 원을. 점점 과녁이 되어가는 원을. 내가 감아 댄 시간 앞에서 다리가 풀리고, 어깨가 쳐지고, 너무나 늙고 볼품없어져서 나는 어느 날 한순간에 주저앉게 될 것이다. 나의 시간 한가운데 명중하게 될 것이다.’
- 이현호, 만함晩夏 부분, 90-91쪽
‘삼천오백 원어치만큼 하늘이 밝아 있었다. 슬픔을 화폐로 쓰는 나라가 있다면 우린 거기서 억만장자일 거야.’
‘나는 이제 어떤 말도 상처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어떤 말도 인제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상처받았다.’
‘꿈속에서는 가시를 세운 괴물 두 마리가 꼭 껴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심장이 다가붙을수록 더 많은 피를 흘렸다. 가시에 찔리느라 모자란 피를 서로의 몸을 핥으며 채웠다.’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주기엔 너무 눅눅한 베갯잇을 반성하는 동안 찾아든 밤은 하루새 숨이 죽어 있었다. 팔뚝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좁은 골목에 들 때 누군가는 훅훅 더운 숨을 뱉으며 제 발로 집을 떠나오고 있었다.’
- 김이듬, 옷걸이, 146-147쪽 부분
‘내 치마가 걸려 있다 저녁놀과 가로등 사이에’
나는 벌거벗은 얼개로 있다 인공관절인지 뼈에 사무치지 않는다 가랑이를 벌리고 가부좌한 후손 같다 내 목을 꼬아 머리로 퀘스천 마크를 만든다 더듬더듬 문을 두드리는 손 같다 갈고리인지
- 바디우는 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철학적 미문
“춤은 천진난만이며, 이는 춤이 몸 이전의 몸인 까닭이다. 춤은 망각이며, 이는 춤이 자신의 부자유를, 스스로의 무게를 잊은 몸이기 때문이다. 춤은 새로운 시작이며, 이는 충동작이 언제나 스스로의 시작을 만들어내는 것.” 이럴 때의 춤은 놀이이기도 하며 사회적 억압, 불필요하게 무거운 진지함으로부터, 위선에 가득한 예의로부터 몸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시간을 구축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정의로 춤에 대한 헌사를 대신한다.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이것은 춤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정의일 수 있다.”231쪽
- 현대시학 2016하반기 신인상, 김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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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씨 이는 가지런해요 195쪽
K씨 이는 가지런해요 물통에 물을 반만 채우면 배까지 출렁거린다던 K씨 유명메이커 할인매장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우는 K씨 이는 가지런해요 주유소 초록색 바닥에 흰 페인트가 흩뿌려져 있는 거예요 외로워, K씨는 가지런해요 편의점 파라솔은 반의 반만 파라솔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밤중의 은행은 ATM 코너 덕분에 빛난다 그렇게 말하면서 K씨 이는 가지런해요 엄마랑 딸 사이 아닌 두 여자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걸어가고 있어요 우리도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좋을 수 있잖아요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소년들 셋이 막다른 골목에서 튀어나오면 나는, 괜히 브라자 안 입은 가슴팍을 긁적거렸어요 K씨는, 그것도 모르고 가지런해요 외로워, K씨는 나랑 걸었으면서 배까지 출렁거린다고 했어요 이제 개가 튀어나오면 나 몰라라 만질 가슴도 바닥났고 듣고 있어요? 철렁, 해도 K씨 이가 가지런해요 나는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