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자서전 틂 창작문고 1
김혜순 지음 / 문학실험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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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6



1. 죽음이 죽음으로 죽음을 위해 49편의 시를 남겼다. ‘죽음의 자서전’을 써 내려가는 주체는 죽음, 주제도 죽음, 주된 독자도 죽음이다. 김혜순 시인 특유의 반복을 통한 리듬감과 어디로 뻗어 나갈지 모르는 비유는 시인이 수평선 너머 또는 아래에 잠긴 영(靈)들을 불러들인다. 2014년 4월 이후로 죽음과 물의 이미지는 ‘세월호’라는 체를 통과해야만 한다. 하늘처럼 성기지만 넓어서 어느 것 하나 새어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 바동거리는 영(靈)을 위한 진혼곡.



2. 메모


- 물에 기대요, 18-19쪽 부분

너는 전신을 기울여 매달려요

감당 못 하겠어요 몸을 비틀어
물의 손가락을 붙잡고

물의 머리칼로 짠 외투를 입어요
꿇어앉아 얼굴을 덮어요

함께 비뚤어지기로 해요
안고 넘어지기로 해요

내가 뛰어내리면
네가 뛰어내릴 차례예요

낚싯줄을 던지면
바늘을 물고 올라오세요
다음엔 내가 해볼게요

애원해요

너보다 더 혼잣말하는 물에게

엉망으로 취하면 길어져서
비를 집에 바래다줘요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물을

기대려는
너에게
더 기대오는
물을



- 고아, 27-28쪽 부분

벽걸이 텔레비전 화면엔 젖꼭지 여덟 개 어미 돼지가 아홉 번째 새끼의 뇌수를 먹어치우는 장면.// 죽기 전부터 고아인 죽음이 탄생하는 장면.// 너는 이제 사각형 원피스에 몸이 딱 맞는구나.



- 묘혈, 50-51쪽

둥그런 배를 안고 여자가 모로 누워 있다

숨길 수 없는 우물이
핏속을 돌다 어느 날 터졌다
터진 수맥을 품고
그 여자가 하루 종일 웃었다
평생의 모든 순간들이 너무 우스워
죽은 여자는 웃다가 울었다

두레박이 달린 탯줄에
햇빛이 실려 내려갔다가

눈물이 한 동이 올라왔다
고층 빌딩을 닦는 사람처럼
너는 네 몸 밖의 유리창에
매달려 눈물을 닦았다

너는 저 세상에서 왔건만
지금 너는 저 세상을 임신 중이다

분만대에서 태어나는 중인 신생아처럼
제 무덤 속에 목을 집어넣은 여자가
휴대폰의 제 사진을 들여다보는 시간

묘지의 초록색 모자마다 웃는 얼굴들이 들어 있다



- 부검, 64-65쪽

언니가 운다 오빠가 운다
순서대로 가야 하는데 왜 네가 먼저 가니?

“이불 속에는 푸른 옷을 입구 착검한 총을 든 군인들의 행렬”
“음부 속에는 핏발 선 눈알들이 굴러다니고”
“부러진 팔의 깁스 속에는 군인의 고함들이 살아요”

“죽었다네요, 내가”



- 아 에 이 오 우, 71-72쪽 부분

119에 전화를 걸다 말고 바라본 마루 위의 네 발가락 자국
눈 내린 것처럼 쌓인 하얀 설탕 위 네다섯 개의 발가락 동그라미들

눈 위에서 총 맞아 죽은 외할머니 노루와
그 주위를 맴도는 새끼 노루 한 마리를 둘러싼
발가락 자국들, 아 에 이 오 우 다섯 모음으로 발음되는


- 하관, 89-91쪽 부분

가는 빗줄기 살랑 묶어 촉촉한 리본 만들어 네 젖꼭지에 꽂아주는 바람이 왔네

“어려서 죽어서 너보다 어린언니가 아랫배를 꼬집는 가냘픈 손톱”
“초록손톱 똑똑 분질러버리는 귀신아, 나보다 한 발짝 먼저 온 봄아”
“갈비뼈 우린 거친 국물 오르내리는 몸속 그 뼈가 너를 싣고 다니는 관이네”

“아직 안 떠나고 뭐하니 아침마다 철썩 네 뺨을 갈기며 물어보는 저 하늘 저 시퍼런 핏줄”
“입가에 피 묻은 새처럼 우짖는 저 꽃들 피 묻은 이빨 퉤퉤 뱉네 자꾸만 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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