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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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


1.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창비 시리즈에 꼭 맞는 시집이다. 한시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서 보았던 정경을 눈앞에 펼쳐놓은 듯 아련하고 그리운 모습이 담겼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평범한 산문과 다를 바 없겠으나 삶에 대한 성찰, 죄의식,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 글쓰기(시쓰기)에 대한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은 마루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 들으며 반달을 쳐다보는 한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 동지(冬至) 8쪽

생각 끝에,/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간다// 언 내(川) 건너며 듣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들/ 새 시(詩) 같은,// 어깨에 한짐 가져봄직하여/ 다 잊고 골짜기에서 한철/ 일어서 남직도 하여//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 또 있을까?/ 꽝꽝 언 시 한짐 지고/ 기다리는 마음/ 생각느니,


- 허공이 되다 16-17쪽

대문 밖으로 나서서 새 주인에게 건네주어도/ 어미는 울음소리도 없이/ 그저 담 위로 두 발을 얹은 채/ 밖을 내다본다/ 나는 어느 쪽을 바라봐야 할지 몰라 잠시 허둥대었다/ 들어와 보니 어미는 남은 강아지에게로 가서/ 입을 핥아준다/ 그렇게 하나의 이별이 지나고/ 다음의 이별까지 어미개는/ 새끼들을 안고 핥고 먹인다/ 하는 수 없이 한참을 그 앞으로 가 앉아/ 꾹꾹 누르고 앉아 허공이 되어보기도 하다가/ 맨 나중엔 나의 일생을/ 삼켰다


-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18-19쪽 부분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꽃 위에 펼친 맵시 좋은 구름결들 보아라/ 옷고름 풀린 봄볕을 보아라// (중략)// 꽃 지고 잎 돋듯 웃어라/ 뺨은 웃어라/ 조약돌 비 맞듯 웃어라/ 유리창에 별 돋듯 웃어라// 한옥 짓는 마당가/ 널빤지 위에 누워 낮잠 들어가는 대목수의 꿈속으로 들어가/ 잠꼬대의 웃음으로 배어나오는/ 작약밭의 긍정 긍정 긍정 긍정//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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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04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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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사




1. 목감기가 두 주가 지나도 낳지 않는다. 숨을 참으면 참을만 하지만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를 통해 들어온 공기가 목구멍을 간질인다. 참지 못하고 기침을 하고 만다. 기침이 단짝 콧물이 따라 흐른다. 이마가 뜨거워진다. 관자놀이가 지끈하다.



이럴 땐 온돌방에 들어가 아궁이에 뜨듯하게 불 지피고 몸 지지는 게 최고다. 불에 오랜 기간 그을린 돌에 아픈 어깨와 아픈 배와 아픈 마음을 대고 스스로 잠들었다가 두어 시간 뒤에 일어나면 말끔하게 젖은 몸이 마르지 않을까



‘너는 희구나’/ ‘너는 희구나’ 이런 이명이 들리는 것 같은 초가을에. 며칠 앓은 내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측은하다.




- 시인의 말) 일부

무너질 데라고는 나 자신뿐!
거길 깨고 나갈 밖에.
나갈 문도 없이 집을 짓는다. 그게 사랑이다. (그리고 능청이다. 삶 말이다.)



- 방을 깨다, 83-85쪽 부분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 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 흰 꽃 86-87쪽

꽃 핀 배나무 아래// 나이 어린 돌들과 앉아// ‘너는 희구나’/‘너는 희구나’// 앉아// ‘너는 희구나’// 그렇게 희고/ 또 희고도/ 정신 놓지 않고/ 허튼 흰빛 하나 없이/ 다섯 살에 깨친 글자들처럼/ 발등에도, 발톱 위에도 놓아보는/ 흰 꽃,/ 흰 꽃




- 窓을 내면 敵이 나타난다 108-110쪽 부분

여자가 가고 동시에 敵이 나타났다/ 왜 나의 적은 이토록 매번 작은가?/ 붙잡을 수도 없이 작고 작은가? 同時에 또 하나의 적이 나타난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싸움은 거룩한 것인가?/ 작고 작은 싸움, 좁쌀만 한 싸움/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나의 정직은 서글프다/ 좁쌀만 한 정직/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개는 짖고/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원하던/ 確哲大悟는 까무라친다/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깨우침은 오고 만다/ (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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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이야기 그리고 또다른 상상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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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소설집, 발 이야기 그리고 또다른 상상, 문학동네


1. 아홉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에세이가 실렸다.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발 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편에서 전 세계의 소외된 자들 예를 들어 식민지 여성, 전쟁포로, 난민들을 호명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전한다. ‘노예무역’ ‘다이아몬드’ ‘전쟁’이 가리키는 인간의 탐욕과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바닥에 깔려있다. 이러한 목소리와 메시지를 얼마나 소설적으로 잘 묘사하고 형상화해낼 것인지가 소설의 우수성을 가늠하는 잣대일 것인데, 르 클레지오는 그것을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장소, 그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언어로 생생하게 표현해내고 있어서 읽는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야마 나무」에서는 주인공 마리가 친구 에스메를 이끌고 피난의 과정에서 어릴 적 자신을 길러주었던 할머니의 품 같은 나무속에서 생활하는데, 그 상상력과 생명에 관한 의지가 너무나 잘 표현되어있어 감동스러웠다.


* 발 이야기


- 그녀의 두 발이 거부한다. 벌어진 발가락들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단단히 붙어 있다. 시멘트 가장자리를 놓지 않을 것이다. 발가락들은 유진의 몸 한가운데서 전율을 퍼뜨리고, 다리를 쇠기둥으로 변모시키고, 등골의 인대를 긴장시키고 머리를 뒤로 젖히게 한다! 발가락들은 세이렌의 노래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살아 있으며, 죽고 싶지 않다! 52-53쪽





* 야마 나무



- 여행의 종착지는 바로 여기, 마리의 집이다. 마리는 여러 날 전부터 이곳을 꿈꿔왔다. 어쩌면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도착해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인간들의 광기는 들어올 수 없고, 권력을 향한 탐욕이나 피에 굶주린 갈증, 다이아몬드를 향한 욕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170쪽



● L.E.L, 마지막 날들



“검은 바위 위 난파선처럼 자리잡은 이 불타오르는 잔인한 백색의 요새” (184쪽)




* 우리 거미들의 삶

- 우리는 오히려 침묵의 족속이어서 혀 없이 입이 다리와 둥근 등에 박혀 있어 이것저것 설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252쪽

- 우리는 잠의 수호자이며 그것이 바로 지상에서의 우리 역할이다. (중략) 이렇듯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다. 공기는 우리 것이고 우리는 그걸 입으로 잡아다가 다리 사이에 붙들어둔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연약하고 작은 짐승들은 우리가 만든 고치의 보호 아래 잠들고, 밤은 시시각각 우리가 내놓는 실로 고치를 짜고 있다. 우리는 쉬지 않고 거미줄을 친다. 밤에도 거미줄을 친다. 하늘은 우리가 엮은 그물로 덮여 있다. 그것은 숲을 이루고 한 오라기의 흐릿한 거미줄이 생명을 빨아들인다. 우리는 침묵을 짠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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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일단 가고봅시다! 키만 큰 30세 아들과 깡마른 60세 엄마, 미친 척 500일간 세계를 누비다! 시리즈 1
태원준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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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 북로그컴퍼니


1. 예순 엄마와 서른 아들이 떠나는 세계 여행, 둘이 합쳐 100킬로그램도 안 되는 모자의 여행을 응원하며 읽었다. 마침 내년이 어머니 환갑이라 조금 더 감정을 이입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의 어머니는 몇 년 전 큰 수술을 받으셔서 이 책의 엄마(동익)처럼 세계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붓하게 제주도라도 모시고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책은 중국과 동남아 국가(베트남, 태국, 라오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스리랑카) 중동 아프리카 일부(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를 담고 있다.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글 솜씨와 묘사도 좋지만 뭐라 그래도 엄마를 살뜰히 챙기며 한 걸음 나아가는 그 과정과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오랜만에 여행에세이 전체를 완독했다.



요르단 페트라의 알 카즈네(보물창고)


-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여행 자체가 인생에 찾아온 방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이 일상이 되고보니 그 안에도 또 다른 방학이 필요했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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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마리몬드 리커버 한정판) 문학동네 시인선 15
장석남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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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1. 산문시보다 짧은 시가 훨씬 어렵다. 독자 입장에서는 여백을 읽어내야 하고 작자는 압축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지미가 풍부한 암시력을 지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년」「다랑이길」같은 작품을 읽으면 텍스트 그 자체로 풍부해서 좋고, 내 경험과 연결해 또 읽을 수 있어서 좋다.




- 중년 30쪽

봉숭아는 분홍을 한 필/ 제 발등 둘레에 펼치었는데/ 마당은 지글거리며 끓는데/ 하산(下山)한 우리는 된 그늘을 두어 필씩 펼쳐놓고서/ 먹던 물 대접 뿌려서 마당귀 돌멩이들 웃겨놓고서/ 민둥산을 이루었네



- 다랑이길 48쪽

논둑길이나 걷다보면 낫는다/ 속이 울음인 사람/ 다랑이 논둑길을 걸으면 낫는다// 울음 밑이 서퍼런 우물인/ 웃음 밑이 떨리는 절벽인 사람// 다랑이 논둑길/ 약(藥)으로 걸으면/ 가을 가 겨울// 눈길 걸어/ 길 잃으면/ 낫는다


- 어찌하여 민들레 노란 꽃은 이리 많은가? 76쪽 부분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 올라오는 이 있겠지/ 그 말이 누군가를 막 때리는 말인 줄은 까맣게 모를 테지/ 여전히 나는 민들레 노란 꽃을 남기면서 내려가고 있을거야// 민들레 노란 꽃을 여럿 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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