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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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문학동네



1. 독일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는 시인이 쓴 “백서른아홉 개의 짧은 이야기, 아홉 개의 조금은 긴 편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겪은 삶에 대한 짤막한 에피소드는 금방 읽히지만 읽은 시간보다 몇 배는 더 생각할 문제들을 던져준다. 90년대 초반에 통일한 나라에서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시인으로,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의 실존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그래도 그곳에서 산문집(『너없이 걸었다』)으로 시집(『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으로 이곳을 잊지 않고 소식을 전해주니 다행이다.


아홉 개의 긴 편지는 거의 단편소설같다. 실제 겪은 일을 회상하면서 풀어낸 것이라 소설보다 소설 같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은 적은 없지만 분명히 훌륭할 것이다.




- 시커먼 내 속

녹차와 아주 친한 아는 분이 언젠가 물의 상처에 대해 들려주었다. 물은 서로 부대끼며 흘러가다가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또 상처를 받는다. 녹차를 끓일 물은 그러므로 그 상처를 달래주어야 한다. 물은 두서너 시간 전에 받아두어라. 그런 다음 물을 끓이는데, 물은 또 끓을 때 상처를 받는다. 그러므로 끓고 난 뒤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라. 모두 물의 상처를 달래주는 일이다. 그런 다음 차에 물을 부어라.
내 속이란 얼마나 컴컴한가. 아마도 물에게는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제일 상처 입는 일은 아니었을까. 흐르다가, 끓다가 입은 상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진탕에서 입는 상처······ 30쪽



- 모든 것의 시작을 쫓아가는 자의 뒷모습은 언제나 쫓기는 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시작 전에 시작이 있는 법이다. 97쪽


-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110쪽



- 우울했던 소녀 252쪽

더 뚱뚱해질까봐 겁이 나는데도 먹었다. 빈속에 단맛이 들어가면 슬프고 외로웠다. 나는 그때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 천장을 올려다보던 마음이 내가 문학으로 가는 모퉁이였다. 나는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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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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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타부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 문학동네

 

 

페소아가 간 기능 상실로 병원에 입원해서 죽기 전의 마지막 사흘 동안 방문객을 맞이하는 상황을 상상하여 구성한 작품이다. 페소아의 다른 이름인 알바루 드 캄푸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히카르두 헤이스와 그에게 문학적, 사상적 영향을 준 안토니우 모라가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데, 현실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하다. 이렇게 현실과 환상을 교차하면서도 감각적인 시공간이 페소아가 그려낸 하나의 세계이므로 이 짧은 소설로 수많은 페소아의 페소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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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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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 1985년에 나온 이 시집은 지금 읽어도 젊다. 그 당시에는 젊었던 시인이 쓴 시집이라 젊고, 시간이 지나도 시인의 상상력과 표현은 늙지 않았다.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가수들 예를 들어 김현식, 김광석, 이문세, 김건모, 조용필, 신승훈 등은 모두 딱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다. 김혜순 시인의 시와 글에도 묻어 나오는 그만의 목소리가 있다.




- 고층 빌딩 유리창닦이의 편지 129-130쪽 부분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집니다.// 해가 지는 아침에/ 유리산을 오르며/ 나는 바라봅니다./ 깊고깊은 산아래 계곡에/ 햇살이 퍼지는 광경을.// 해가 뜨는 저녁엔/ 유리산을 내려오며/ 나는 또 바라봅니다./ 깊고깊은 저 아래 계곡에/ 해가 지고 석양에 물든/ 소녀가 붉은 얼굴을/ 쳐드는 것을.//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됩니다./ 그리곤 당신들의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그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합니다./ 창문을 열면 창문, 다시 열면/ 창문, 창문, 창문······/ 창문/ 밤새도록 창문을 여닫지만/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산아래 계곡엔 가득 잠들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닦아도 닦이지 않는 창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나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지는 곳,/ 그 높은 곳에서 나는 당신들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 나의 방주 39-41쪽 부분

1
내 귀가 나의 입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이제 말을 하지 마라/ 듣기 싫다/ 내 눈이 나의 입에게 다가와/ 은밀히 속삭인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마라/ 보기 싫다// (중략)

2
그러나 나는 입을 열지 않으리라/ 새를 품은 채, 뱀을 품은 채/ 날으는 것들과 기는 것들을 품은 채/ 고요히 떠 있으리라/ 터지다 만 말을 품은 채, 뜨다 만/ 무지개를 틀어쥔 채/ 입을 틀어막고 희디흰 알을 낳으리라





- 희망 71쪽 부분

왜 우리 뒤통수에 눈이 없는 줄 알아?/ 그건 그들의 낮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야./ 하지만 우린 전화를 걸 수는 있어./ 우리의 밤에서 아르헨티나의 낮에게./ 나의 겨울에서 나의 대칭점의 여름에게./ 여보세요 겨울이에요./ 여보세요 낮을 바꿔줘요./ 참 다행한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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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지구 - 시 쓰고 빨래하고 날씨 걱정은 가끔
서윤후 글.사진 / 서랍의날씨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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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글·사진, 방과 후 지구, 서랍의날씨



1. 서윤후 시인의 여행 산문집이다. ‘시인이 쓴 산문집’ 이란 말에 걸맞은 정갈한 시적 산문이 가득하다. 이십 대 누구나 겪을 법한 고민과 자괴감, 자신감, 엉뚱함, 간절함이 글로 느껴진다. 다음에 그의 첫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을 다시 읽게 된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여행과 방황을 지지하며.



 
- 내가 나에게서 너무 가까우면 들킬 것이다. 눈금을 지키면서 나를 따라다니는 이 일을 내가 쥐고 있는 간절함과 긴장감이라고 여기며 그만두지 않을 예정이다. 21쪽



- 깜빡이는 눈을 셔터 누르는 것으로 비유하면 좀 유치할까. 기계가 아닌 몸으로 풍경을 기억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물론 그 후에는 사진을 찍거나 녹음을 해서 간직하고 싶은 일부를 담아 온다. 그것은 정말 일부다.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홍콩의 몽콕 야시장 골목골목에 퍼지는 딤섬 냄새, 두바이의 베이스캠프에서 깔고 앉았던 카펫의 까슬함, 메콩 강변의 야자수 나무에 맨발로 올라서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호찌민의 데탐 거리나 방콕의 카오산 로드에 섞여 드는 온갖 외국어의 웅성거림 등은 정말이지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온전히 내 몸으로 기억하는 풍경이다. 276쪽



- 나의 메모장 곳곳에는 내 안의 쿠데타 끝에 세워진 몇 가지 조약들이 적혀 있다. 317쪽 이하 부분 발췌

마지막 날에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곳의 마음을 담아 엽서를 쓴다.
두 다리가 마치 ‘녹아 사라진다’는 느낌이 들 때만 택시를 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라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이곳의 섣부른 기분으로 타인에게 돌아가 만나자거나 보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마지막 날 옷 한두 벌은 버리고 가기.
노트북에 적은 시와 낙서는 모두 메일로 미리 보내 놓기.
이곳의 언어가 적힌 영수증, 티켓, 팸플릿 챙기기.
기념할 만하다고 해서 읽지도 못할 책 사지 않기.
누가 시킨 적 없는 일만 하기.
매일매일 관광 아닌 산책을 위해 걷기.
음식 주문, 커피 주문, 가격 흥정 외에 현지어로 대화하기.
좋았던 곳은 여러 번 가서 반짝 단골이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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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2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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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청하, 1988 복간본, 세 번째 시집)


1. 「그곳」연작 6편이 이 시집의 뼈대다. 이 시집이 처음 나온 1988년. 6.10. 민주항쟁과 6.29. 선언 이후라도 살아있던 권력은 군복을 벗고 기성양복을 입고 변신권력이 되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개 웅크려, 2017년 봄에 쓰여진 자서(自序)에 따르면 ‘뺨을 일곱 대 맞고 하숙집에 엎드려’ 쓴 시다. 시가 없었다면, 시라도 쓰지 않았다면 시인은 그 시절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별의 지옥’을 견디기 위해 시인은 자궁 속에서 소리쳤을 것이다.





- 그곳 1

그곳, 불이 환한/ 그림자조차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잠 속에서도 제 두개골 펄떡거리는 것이/ 보이는, 환한/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 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 엮어져 대못에 걸리는/ 그곳,/ 두 뺨에 두 눈에 두 허벅지에/ 마구 떨어지는 말 발길처럼/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 그곳,/ 밖에선 모두 칠흑처럼 불 끄고 숨죽였는데/ 나만 홀로/ 불 켠 조그만 상자처럼/ 환한/ 그곳,




- 한사코 시(詩)가 되지 않는 꽃

너무 차가운 것은/ 시가 되지 않는다/ 너무 뜨거운 것은/ 시가 아니다/ 끓는 물속에/ 두 발 담그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얼음 속에 누워/ 눈 뻐언히 뜨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중략)// 너무 아름다운 것은 시가 아니다/ 그날, 입을 벌려/ 처음인 듯 울 때/ 그것은 시가 아니었다/ 다만/ 한 도시 전체의 개화(開花)/ 지구 밭에 떠오른/ 한사코 시가 되지 않는 꽃!



- 소금 32-33쪽 부분

이편과 저편의 조용함/ 이편이 저편을 녹이고/ 저편이 이편을 마시고/ 부드럽게 섞여 돌아가는 봄/ 밤, 이편과 저편의 하염없는 삼투압/ 그러나 꿈, 깨뜨리면 없는/ 계란 속에나 있는/ 내일 아침 같은// 이편이 저편을 일으켜 세우고/ 머리끄덩이를 치솟게 하고/ 독방(獨房)에 처넣고/ 짠똥을 찔끔거리게 하고/ 소리를 다 꺼내게 하고/ 불안의 콩들을 핏줄기 속으로 쏟아붓는/ 대낮, 잠들고 싶지 않은 봄/ 물, 검은 뿌리를 두 발 아래 뻗치고/ 녹지 않으려/ 잠들어 섞이지 않으려/ 두 눈에 두 손가락을 쑤셔 박는/ 끓는 물속에 빠진 아편의 한낮/ 안 돼 안 돼 그러다가/ 짠물을 화악 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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