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혜순 시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 1985년에 나온 이 시집은 지금 읽어도 젊다. 그 당시에는 젊었던 시인이 쓴 시집이라 젊고, 시간이 지나도 시인의 상상력과 표현은 늙지 않았다.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가수들 예를 들어 김현식, 김광석, 이문세, 김건모, 조용필, 신승훈 등은 모두 딱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다. 김혜순 시인의 시와 글에도 묻어 나오는 그만의 목소리가 있다.




- 고층 빌딩 유리창닦이의 편지 129-130쪽 부분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집니다.// 해가 지는 아침에/ 유리산을 오르며/ 나는 바라봅니다./ 깊고깊은 산아래 계곡에/ 햇살이 퍼지는 광경을.// 해가 뜨는 저녁엔/ 유리산을 내려오며/ 나는 또 바라봅니다./ 깊고깊은 저 아래 계곡에/ 해가 지고 석양에 물든/ 소녀가 붉은 얼굴을/ 쳐드는 것을.//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됩니다./ 그리곤 당신들의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그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합니다./ 창문을 열면 창문, 다시 열면/ 창문, 창문, 창문······/ 창문/ 밤새도록 창문을 여닫지만/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산아래 계곡엔 가득 잠들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닦아도 닦이지 않는 창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나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지는 곳,/ 그 높은 곳에서 나는 당신들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 나의 방주 39-41쪽 부분

1
내 귀가 나의 입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이제 말을 하지 마라/ 듣기 싫다/ 내 눈이 나의 입에게 다가와/ 은밀히 속삭인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마라/ 보기 싫다// (중략)

2
그러나 나는 입을 열지 않으리라/ 새를 품은 채, 뱀을 품은 채/ 날으는 것들과 기는 것들을 품은 채/ 고요히 떠 있으리라/ 터지다 만 말을 품은 채, 뜨다 만/ 무지개를 틀어쥔 채/ 입을 틀어막고 희디흰 알을 낳으리라





- 희망 71쪽 부분

왜 우리 뒤통수에 눈이 없는 줄 알아?/ 그건 그들의 낮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야./ 하지만 우린 전화를 걸 수는 있어./ 우리의 밤에서 아르헨티나의 낮에게./ 나의 겨울에서 나의 대칭점의 여름에게./ 여보세요 겨울이에요./ 여보세요 낮을 바꿔줘요./ 참 다행한 일이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