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글씨로 쓰는 것 민음의 시 232
김준현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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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민음사


1.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말놀이와 단어 쪼개기(예를 들어 ‘목숨’ 이라면 ‘목’과 ‘손’을 분리하여 변주하는 방식)가 자주 발견된다. 시집 제목처럼 ‘쓰기’와 ‘쓰는 것’에 관한 시인의 고민이 시집 전반에서 보인다. 그의 등단작인 「이끼의 시간」이후로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려 한 것 같다.




- 이끼의 시간, 82-83쪽 -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우물 위로 귀 몇 개가 떠다닌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느린 허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빈 얼굴을 바라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닫아 놓은 창이다// 녹슨 현악기의 뼈를 꺾어 왔다 우물이 입을 벌리고// 벽에는 수염이 거뭇하다 사춘기라면/ 젖은 눈으로/ 기타의 냄새 나는 구멍을 더듬는, 장마철이다// 손가락 몇 개로 높아지는 빗소리를 누른다 저 먼 곳에서/ 핏줄이 서는 그의 목젖, 거친// 수염을 민다/ 드러나는 싹이여, 자라지 마라/ 벌레들이 털 많은 다리로 밤에서/ 새벽까지 더듬어 오른다// 나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 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 귀들이 다 가라앉은 물에도/ 소름이 돋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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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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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하프너, 안인희 옮김,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돌베개


1. 1871년부터 1945년(또는 1948년)까지 즉, 도이치제국, 1차 세계대전, 바이마르공화국, 히틀러의 민족주의-사회주의 정당, 2차 세계대전까지 도이칠란트에서 일어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철혈재상으로 불렸던 비스마르크가 영토 확장의 측면에서는 작은 도이칠란트와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히틀러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1870년대부터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 ‘도이치 제국’,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먼저 프로이센이 통치할 수 있는 만큼의 도이칠란트, 또는 도이칠란트가 지배할 수 있는 만큼의 유럽 및 세계라는 두 가지 의미였다. 앞의 것이 비스마르크의 생각이고, 뒤의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19쪽



- 도이치 제국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 그 마지막 가장 성큼성큼 걷던 시대에 오스트리아 사람이(=히틀러) 총리로 재임했다는 것, 이 마지막 제국총리가 비스마르크의 작은 도이칠란트를 곧바로 큰 도이칠란트로 만들고, 이 큰 도이칠란트는 곧바로 비스마르크가 철저히 반대한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비스마르크의 작은 도이칠란트에서는 한 번도, 심지어 1870년대에도 맛보지 못한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잘 생각해본다면- 거의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비스마르크의 최고 승리가 자신의 실패의 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도이치 제국의 건설은 이미 그 붕괴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50쪽





- 그 밖에도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많은 것을 엄격하게 단념한다는 뜻이었다. 그 정책은 다음의 다섯 가지 핵심으로 요약된다. 67쪽

1.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단념

2. 같은 맥락에서 도이칠란트는 모든 팽창 노력, 특히 ‘큰도이치’ 노력을 중지함

3. 제국 건설에서 배제된 ‘구제받지 못한’ 도이치 사람들, 특히 오스트리아와 발트 도이치 사람들의 합병 소망을 지속적으로 거부함

4. 나머지 유럽 열강들의 해외 식민지 정책에 동참하지 않음. 이는 강대국들의 관심을 밖으로, 곧 ‘주변으로’ 돌림으로써 유럽 중앙부에 맞선 연합을 막도록 해준다.

5. 필요하다면 설사 도이치 제국이 직접 참가하지 않거나 무관한 전쟁이라도, 유럽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는다. 도이치 제국은 ‘유럽이라는 오뚝이의 무게추’가 되어야 한다. 유럽의 전쟁에는 퍼져 나가려는 타고난 성향이 과거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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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헤매다
이이체 지음 / 서랍의날씨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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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체 산문집, 당신을 헤매다, 서랍의날씨


1.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의 젊은 시인들, 그들의 산문집은 시작노트 같다. 문장과 문장의 이음새도 조금만 다듬으면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다. 문장을 직조하는 능력, 다른 말로 하면 스킬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한 시인의 글에 다른 시인의 이름을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글도 있다. 그만큼 문장이 유형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커리큘럼대로, 계단식으로, 한 스텝씩 걸음을 옮기는 안정된 자세는 믿음직하다. 믿음직하고 안정적이어서 기시감이 자꾸 든다.


* 메모
 
- 상하이와 난징, 항저우, 정저우 등지를 들르면서 내가 기억하게 된 것은 유적지, 유적지를 두르고 수호하는 강, 강의 물결을 담은 듯 닮은 머리카락 들이었다. 타인의 머리카락이 뿌리가 되어서 자라나는 추억. 나무에게도 뿌리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에게는 없을까. 나는 그곳의 인간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내비쳤던 머리카락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것들을 추억하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잊기에는 긴 머리카락을 기억한다’ 라는 구절을 썼다. 28쪽


- 사람이 무서운 순간은 차가울 때보다 체온이 없을 때이다. 차가운 사람보다 체온 없는 사람이 나는 더 무섭다. 따뜻해도 버려야만 하는 타인의 체온이 있다. 이별은 체온이 남겨진 자리에서 시작한다. 자고 일어나면 나를 깨우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도 슬퍼질 것이다. 당신은 온도가 부재한 몸으로부터 기억된다. 34쪽


-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손택수, 「수채」에서)

그때 알았다. 만짐은 사실 지우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번짐을 위한 흐림은 만짐이 어긋난 부산물이라는 것을. 만진다는 것은 외부와 섞이기 위함이라기보다 외부와 섞일 수 없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바깥에서부터 이미 서로의 윤곽과 틀을 무화시키지 못해, 각자 다른 몸일 수밖에 없는 줄 알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느라 뒤척거리는 몸짓이다. 몸은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자아와 타자는 움직임으로 서로의 경계를 잃는다. 경계를 잃으면서 거울을 얻는다. 42-43쪽


 
- 자본주의는 일상을 거저 주지 않는다. 그때 김밥은 한 줄에 천 원이었다. 나는 이에 빗대서 ‘자본주의는 천 원짜리 김밥을 천 원만큼 맛있지 못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이라고 정의하곤 했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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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시인선 13
천서봉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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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서봉 시집, 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1. 한 편의 시를 이루는 표현의 뼈대는 크게 서사, 묘사, 진술인데 이 시집은 서사와 진술보다 묘사를 통해 이미지나 시인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추측하게 한다. “평생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픔의 종류를 구분하는 상자를 하나 얻는 것.”(「종합사회복지관」)이나 “늘 선택이었으므로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었고”(「삼십대」) 같은 매력적인 진술도 있지만, 주된 엔진은 묘사다.




그 묘사의 특징은 세밀한 사실화라기보다는 에스키스(esquisse), 데생, 설계도면에 가까운데, 수식의 수식 같은 표현보다는 일상어와 일상어의 만남이지만 그 마찰이 낯설고 참신한 문장이 되었을 때 시를 읽는 맛이 났다.





* 메모


- 서봉氏의 가방 50-51쪽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때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사러 다녔지만/ 노을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아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 종합사회복지관 38쪽 부분

평생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픔의 종류를 구분하는 상자를 하나 얻는 것. 달이나 태양이 한 상자 속에 들어가도 될까, 물었지만 누구도 숨겨둔 꽃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 행성 관측 49쪽 부분

콩나물처럼 긴 꼬리의 형용사는 버려야겠어,/ 말하던 네 입술은 영영 검은 여백 속으로 졌다.// 그래도 살자, 그래도 살자,/ 국밥 그릇 속엔 늘 같은 종류의 내재율이 흐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여전히 사람이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 삼십대 92쪽 부분

늘 선택이었으므로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었고/ 혁명이나 변혁 따위, 시대의 어떤 신경증도/ 나를 믿어주지 못했다. 방언(方言)의 나라에선 양이/ 양의 거죽을 둥글게 벗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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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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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 난다


1. 독일 시인(하이네, 트라클, 괴테 등)의 시 한편 각 장의 머리에 놓고 자신의 경험을 생각을 자유롭게 서술한 다음 그 시와 접목 시키는 형식의 문학에세이라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첫 산문집《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이 ‘나’에 대한 에세이라면 이 산문집은 관찰자로서 ‘그들(사람, 문학작품)’을 향한 시선이 담겼다.

그가 사는 네덜란드에서 가까운 뮌스터에 대한 관찰자로서, 시인으로서, 학자로서, 생활인으로서의 충실한 내면보고서. 산책, 향수, 문학, 전쟁, 건축 등이 각 장을 채우고 있는.


* 메모

- 김밥은 잘 정돈된 혼돈을 뜻한다. 김밥에 말려진 재료들은 강, 바다, 들판에서 온 것들이다. 채소, 어묵, 햄, 그리고 간을 한 밥, 이 모든 것들은 소금에 섞이면서 호동을 갈무리하며 김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김밥은 소금이 몰고 오는 혼동이 자물린 차가운 시간을 뜻한다. 소금을 친 음식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더운 시간 속, 소금은 그냥 널브러져 있다가 음식이 차가워지면 진면목을 드러낸다. 절여진 시간이 입안으로 들어올 때 얼마나 짜고 쓴지 우리는 알지만 그 유혹을 차마 떨치지 못한다. 삶의 짠맛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기차역으로 간다. 기차 안에서 김밥을 먹으며 자주 목이 막히고 떠나오던 기차역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 데도 말이다.


- 다른 이들이 파라다이스의 문을 통과해서 성당으로 들어갈 때 거지 여자는 문 앞에 앉아 손을 벌린다. 그녀는 성당 안에서보다 성당을 방문하고 나오는 문이 있는 성당의 바깥이 동냥을 하기에는 더 적합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하다. 성당을 드나드는 이들은 거지를 보는 순간 믿음의 집을 드나드는 이유를 발견한다. 마치 50센트를 내고 촛불을 켜며 개인적인 소망을 중얼거렸을 때처럼 사람들은 다시 지갑을 열고 그녀의 손에 1유로를 쥐여준다. 성당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160쪽



목차)
프롤로그) 뮌스터, 당신이 모르는 어느 도시
1. 어느 우연의 도시 어느 우연의 시인
- 어느 우연의 도시로 어느 우연의 시인에게로
2. 기차역에서
- 떠날 권리와 돌아오지 않을 권리
3. 칠기 박물관 앞에서
-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4. 뮌스터의 푸른 반지
- 내가 너를 찾을 수만 있다면
5. 츠빙어(Zwinger)에서
- 잊음에 대항하기 위하여
6. 소금길(Salzsatrasse), 그리고 다른 길들
- 길 위에서의 그리움
7. 람베르티 성당 앞에서
- 멀고도 가까운 전쟁
8. 중앙시장과 옛 시청
- 잊히지 않을 시대의 빛들
9. 대성당과 그 주변
- 삶은 펀치처럼
10. 루드게리 거리와 쾨니히 거리에서
- 손과 손들
11. 뮌스터아 강을 따라서 걷기 1
- 츠빙어에서 키펜케를 거리로
12. 뮌스터아 강을 따라서 걷기 2
- 위버바서 성당을 바라보며 아호수로
13. 아호수에서
- 사랑이라는 인공 호수
14. 쿠피어텔에서 프라우엔 거리로
- 마음의 시대
에필로그) 고독을 위한 지도 베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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