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시인선 13
천서봉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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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서봉 시집, 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1. 한 편의 시를 이루는 표현의 뼈대는 크게 서사, 묘사, 진술인데 이 시집은 서사와 진술보다 묘사를 통해 이미지나 시인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추측하게 한다. “평생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픔의 종류를 구분하는 상자를 하나 얻는 것.”(「종합사회복지관」)이나 “늘 선택이었으므로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었고”(「삼십대」) 같은 매력적인 진술도 있지만, 주된 엔진은 묘사다.




그 묘사의 특징은 세밀한 사실화라기보다는 에스키스(esquisse), 데생, 설계도면에 가까운데, 수식의 수식 같은 표현보다는 일상어와 일상어의 만남이지만 그 마찰이 낯설고 참신한 문장이 되었을 때 시를 읽는 맛이 났다.





* 메모


- 서봉氏의 가방 50-51쪽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때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사러 다녔지만/ 노을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아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 종합사회복지관 38쪽 부분

평생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픔의 종류를 구분하는 상자를 하나 얻는 것. 달이나 태양이 한 상자 속에 들어가도 될까, 물었지만 누구도 숨겨둔 꽃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 행성 관측 49쪽 부분

콩나물처럼 긴 꼬리의 형용사는 버려야겠어,/ 말하던 네 입술은 영영 검은 여백 속으로 졌다.// 그래도 살자, 그래도 살자,/ 국밥 그릇 속엔 늘 같은 종류의 내재율이 흐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여전히 사람이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 삼십대 92쪽 부분

늘 선택이었으므로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었고/ 혁명이나 변혁 따위, 시대의 어떤 신경증도/ 나를 믿어주지 못했다. 방언(方言)의 나라에선 양이/ 양의 거죽을 둥글게 벗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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