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헤매다
이이체 지음 / 서랍의날씨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이이체 산문집, 당신을 헤매다, 서랍의날씨


1.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의 젊은 시인들, 그들의 산문집은 시작노트 같다. 문장과 문장의 이음새도 조금만 다듬으면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다. 문장을 직조하는 능력, 다른 말로 하면 스킬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한 시인의 글에 다른 시인의 이름을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글도 있다. 그만큼 문장이 유형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커리큘럼대로, 계단식으로, 한 스텝씩 걸음을 옮기는 안정된 자세는 믿음직하다. 믿음직하고 안정적이어서 기시감이 자꾸 든다.


* 메모
 
- 상하이와 난징, 항저우, 정저우 등지를 들르면서 내가 기억하게 된 것은 유적지, 유적지를 두르고 수호하는 강, 강의 물결을 담은 듯 닮은 머리카락 들이었다. 타인의 머리카락이 뿌리가 되어서 자라나는 추억. 나무에게도 뿌리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에게는 없을까. 나는 그곳의 인간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내비쳤던 머리카락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것들을 추억하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잊기에는 긴 머리카락을 기억한다’ 라는 구절을 썼다. 28쪽


- 사람이 무서운 순간은 차가울 때보다 체온이 없을 때이다. 차가운 사람보다 체온 없는 사람이 나는 더 무섭다. 따뜻해도 버려야만 하는 타인의 체온이 있다. 이별은 체온이 남겨진 자리에서 시작한다. 자고 일어나면 나를 깨우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도 슬퍼질 것이다. 당신은 온도가 부재한 몸으로부터 기억된다. 34쪽


-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손택수, 「수채」에서)

그때 알았다. 만짐은 사실 지우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번짐을 위한 흐림은 만짐이 어긋난 부산물이라는 것을. 만진다는 것은 외부와 섞이기 위함이라기보다 외부와 섞일 수 없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바깥에서부터 이미 서로의 윤곽과 틀을 무화시키지 못해, 각자 다른 몸일 수밖에 없는 줄 알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느라 뒤척거리는 몸짓이다. 몸은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자아와 타자는 움직임으로 서로의 경계를 잃는다. 경계를 잃으면서 거울을 얻는다. 42-43쪽


 
- 자본주의는 일상을 거저 주지 않는다. 그때 김밥은 한 줄에 천 원이었다. 나는 이에 빗대서 ‘자본주의는 천 원짜리 김밥을 천 원만큼 맛있지 못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이라고 정의하곤 했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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