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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런데 ㅣ 창비시선 409
한인준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평점 :
「종언」연작이 이 시집의 뼈대인데, 이 대담한 시인은 첫 시집인데도 우리말을 과감히 해체한다. 우리말에서 문법상 주어와 목적어 자리에 놓일 수 없는 부사와 형용사 동사를 그 자리에 배치하고, 반대로 서술어 자리에도 절대 들어가지 못할 단어나 문장들이 들어앉는다. 이 파괴와 재배치는 처음에 겪으면 어리둥절하고, 그 느낌은 시집의 마지막 시까지 이어지지만 그의 고심과 실험에 박수를 보낸다.
‘여기서 해야 하는 일은 없어. 해서는 안되는 일만 있지.’ 나무 2가 나무 1에게 속삭였다. ‘웃어도 안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데
노인이 노인 분장을 하고 우리 곁으로 와서 앉았다. 앉는다는 것은 뭘까. 언제쯤 죽을 생각인가. 이 사람은 죽어야 걸어 나갈 것이다. 끝을 안다고 ‘끝에서 시작할 수는 없잖아.’ 이런 생각을 했어. 이런 생각 너무 덥다. 여긴 정말 덥고
나무 2가 나무 1에게 쓰러진 거야. 우리는 포개졌어. 말없이 버둥거린다. 나는 너의 눈을 보았고 너도 나의 눈을 보았다
맞아, 우리는 나무였는데 ‘끝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어.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어
- 종언(부제: 아름다운 그런데), 96-98쪽
한밤중에 깨어난 당신이 당신 옆에 놓인 물컵 쪽으로 손을 내저었을 때
종업원의 말투를 가진 손님이 되는 일과 복도를 만들기 위하여 건물을 짓는 일을
축구를 하기 위하여 맨션 벽면이 필요한 동네 아이들을,
무릎이 깨지기 위하여 주차장 바닥이 필요한 것임을
한밤중에 깨어난 당신이 당신 옆에 놓인 물컵 쪽으로 손을 내저었을 때
나는 내일이면 다 시들 야생화 한줌을 당신 옆에 심는 일을 생각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위하여 책상 밑으로 들어가야 했다면
이런 생각이 귀엽다고 잠에서 깬 당신은 나에게 예쁘게 말했습니다
예쁘게 말하기 위하여 사람이 태어난다고 생각하다가
이불을 개켜두었습니다 오늘밤이면 다시 이불을 덮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