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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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소설, 뱀과 물, 문학동네


1.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된 단편 소설인데 그들을 모아 놓은 한 권을 읽으니 꼭 장편소설 하나를 읽은 느낌이다. 주체(화자)와 대상, 주체와 주체 간의 혼동과 합일,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듯 몽환적인 느낌, 반복되는 이미지들(눈(雪) 아이, 소녀)

언어 이전의 세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관적인 무언가를 향해 몸이 기울어질 수 밖에 없는, 무엇에 홀린 듯 행동하는 인물과 상황이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다 읽자 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 노인 울라에서(Noin Ula)에서


- 남자는 다시 한 번 코를 훌쩍였다.
“흉노들은 기차나 자동차 대신 항상 말을 타고 달리는데, 절대로 말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거든. 믿기지 않긴 하지만 그들은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활을 쏘고, 말 위에서 밥을 먹고, 그리고 죽을 때도 말 위에서 그냥 죽지. 주인이 죽으면 말은 그를 실은 채 그대로 흉노의 무덤에 함께 묻힌단다.” 126쪽




* 뱀과 물

-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191쪽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잭)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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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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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소설, 원더풀 라이프, 서커스



1. 수용된 망자(亡者)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고르면 이를 재현해주는 회사와 소속된 스태프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적 배경이 1998년 즈음으로 설정되어 있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1920년대에 때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므로 일본의 패전과 전후 세대의 기억이 자주 등장한다.




망자들의 기억 재생소라는 다분히 상상적인 설정에서, 주된 스토리는 망자들이 스스로의 기억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는’ 작업 과정이다. 스태프들은 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을 이끌어낸다. 여기까지라면 스토리는 밋밋했겠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스태프들 역시 망자들처럼 기억을 고르지 못해 지상에 남은 또 다른 망자들이라는 설정이 나에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 인생에서 하나의 기억만 고른다면? 대개 서너 살 때까지 기억할 수 있다는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동명의 영화가 있지만, 서문에서 저자가 직접 밝혔듯이 이 책은 영상화하지 못한 인물들의 내면이 펼쳐진 독립적인 소설임에 틀림없다.


* 메모




- ‘모치즈키 씨의 피부가 남자치고는 아주 드물 정도로 하얀 것은 눈 속에서 자랐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며 시오리는 살짝 그가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네 살 무렵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귀 청소를 받던 일입니다. 싸늘한 다다미 결이 바로 눈앞에 보이고 어머니의 포동포동한 무릎의 감촉을 자신의 볼이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01쪽



- “누가 정했나요? 하나만 고르라는 규칙 말이에요.”
가와시마는 깜짝 놀라 이세야 씨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재현해서 영화로 만드는 거죠?”110쪽



- “뭔가 하나쯤 살았던 증거를 남기고 죽고 싶어.”(와타나베)


- 모치즈키는 카메라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추억을 촬영하기 위해 준비된 도구는 움직이지 못하는 전차,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는 비행기, 종이로 만든 꽃잎이다. 그래도 망자들은 그 안에 몸을 둠으로써 면접실에 앉아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는 떠오르지 않았던 세세한 기억이나 생생한 감정을 떠올려주었다. 우리 일의 의미도 그런 데에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들이 또 하나의 깊은 기억을 떠올리는 데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227-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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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작법 - 개정3판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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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시 쓰기의 바이블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시 창작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고 거기에는 많은 훌륭한 시인들의 시들이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책을 독특하게 해주는 것은 습작기의 학생들이 쓴 시를 예로 들고, 대상에 대한 인식부터 시점, 구조, 진술, 화자, 비유법까지 그 예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지침이라기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쓰지는 말아야 한다’는 주의점을 던져주는 책이다.



* 메모



- 객관적 묘사로 된 작품들은 그 작품이 수용하고 있는 한 국면을 구성하고 있는 정황들이 얼마나 깊이를 드러낼 수 있는 구체적 정황들로 이루어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72쪽


- 묘사형의 시는 그것이 서경적 구조건 서사적 구조건 또는 심상적 구조를 가졌든간에 절제된 감정과 언어가 빚어내는 가시화된 이미지를 생명으로 한다.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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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런데 창비시선 409
한인준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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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준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창비



「종언」연작이 이 시집의 뼈대인데, 이 대담한 시인은 첫 시집인데도 우리말을 과감히 해체한다. 우리말에서 문법상 주어와 목적어 자리에 놓일 수 없는 부사와 형용사 동사를 그 자리에 배치하고, 반대로 서술어 자리에도 절대 들어가지 못할 단어나 문장들이 들어앉는다. 이 파괴와 재배치는 처음에 겪으면 어리둥절하고, 그 느낌은 시집의 마지막 시까지 이어지지만 그의 고심과 실험에 박수를 보낸다.


* 메모



- 끝날 때까지 기다려 8쪽

‘여기서 해야 하는 일은 없어. 해서는 안되는 일만 있지.’ 나무 2가 나무 1에게 속삭였다. ‘웃어도 안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데

노인이 노인 분장을 하고 우리 곁으로 와서 앉았다. 앉는다는 것은 뭘까. 언제쯤 죽을 생각인가. 이 사람은 죽어야 걸어 나갈 것이다. 끝을 안다고 ‘끝에서 시작할 수는 없잖아.’ 이런 생각을 했어. 이런 생각 너무 덥다. 여긴 정말 덥고

나무 2가 나무 1에게 쓰러진 거야. 우리는 포개졌어. 말없이 버둥거린다. 나는 너의 눈을 보았고 너도 나의 눈을 보았다

맞아, 우리는 나무였는데 ‘끝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어.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어












- 종언(부제: 아름다운 그런데), 96-98쪽

없을 것을 위하여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있을 것을 위하여

한밤중에 깨어난 당신이 당신 옆에 놓인 물컵 쪽으로 손을 내저었을 때

목이 마르기 위하여를
문득 나는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비를 피하기 위하여 우산을 잃어버리는 사람과
배고프기 위하여 밥을 먹는 사람을
뒤바뀌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업원의 말투를 가진 손님이 되는 일과 복도를 만들기 위하여 건물을 짓는 일을

축구를 하기 위하여 맨션 벽면이 필요한 동네 아이들을,

무릎이 깨지기 위하여 주차장 바닥이 필요한 것임을

한밤중에 깨어난 당신이 당신 옆에 놓인 물컵 쪽으로 손을 내저었을 때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신은 내 옆에서 잠들어 있고
나는 내일이면 다 시들 야생화 한줌을 당신 옆에 심는 일을 생각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위하여 책상 밑으로 들어가야 했다면
티브이를 끄기 위하여 티브이를 켰어야 했다면
뒤바뀌는 것을
거꾸로를

무중력 상태에 떠다니는 오줌방울을 위하여
우주선을 만들었더라면

이런 생각이 귀엽다고 잠에서 깬 당신은 나에게 예쁘게 말했습니다
예쁘게 말하기 위하여 사람이 태어난다고 생각하다가
그만두었고

이불을 개켜두었습니다 오늘밤이면 다시 이불을 덮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없을 것을 위하여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시인의 말)

끝없이가 전혀의 모습으로 놓여 없었다.

눈이 부신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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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내기들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우열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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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풋내기들, 문학동네



200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카버의『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의 무삭제판이다. 편집자 고든 리시가 삭제하고 수정하기 전의 ‘날것’이다. 『대성당』에 나오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도 좋지만 「여자들한테 우리가 나간다고 해」, 「집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물이 이렇게 많은데」, 「멍청이」,「풋내기들」은 관계와 소통에 관한 소재일 뿐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면도 있어서 흥미로웠다. 미니멀리스트라 불리는 카버의 문장은 말할 필요 없고.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갓 구운 롤빵이라도 좀 드셨으면 싶은데. 드시고 살아내셔야죠. 이럴 땐 먹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거든요.” 빵집 주인이 말했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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