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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댓글시인 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 수오서재
1. 다음 기사에 댓글을 단 저자의 시를 짧은 기사와 함께 담은 책이다. 신상은 알려진 바 없고, 소문에 모 대학 국문학과 교수라고 한다. 그의 시 속에 담긴 시상 전개방식이나 시어들을 보면 사십 대 중후반 이상의 연배는 되는 것 같다.
쪽방, 지하철 계단, 세월호, 갈대, 노동자. 단어를 발음해 보는 것만으로도 울림이 있는 모습을 잘 형상화 해놓은 시들. 아래로 향하는 따뜻한 시선과 위를 향하는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가 함께 담겨 있다.
만져지는 시란/ 어떤 느낌입니까/ 그 두텁고 무덤덤한 종이 위에/ 오돌토돌한 요철을 나열한 다음/ 느린 손끝으로 읽어내는 일 말입니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어찌 됐건/ 생을 마친 종이를 부활의 초입까지 나르는 일은/ 늙은이들의 몫이 되었다
언덕을 오르던 정오/ 말보로 상자는 납작해진 주둥이로/ 브라질 숲에서 왔노라 자랑을 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작에 고향을 잊은 노인은/ 의심스러운 저울에 무거운 시선을 보태느라/ 눈이 시렸다/ 영락없는 푼돈이지만/ 당분간 목숨은 그럭저럭 붙은 셈이다
장차 자신의 장례비를 외투에 넣고 돌아선 그는/ 곤궁한 처지를 푸념하는 대신/ 그깟 외로움 하나 견디지 못한/ 아들놈의 죽음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째서 사람은 부활하지 않는가, 하고
- 마중(기사: ‘노동자의 어머니’ 영원히 잠들다 : 전태일 열사의 모친 고 이소선 여사의 영결식이 열린 7일 오전 서울 대학로에 고인의 운구행렬이 지나고 있다. 2011. 09. 07. )
온통 눈밭일 세상/ 마중 나온 스물두 살 사내가/ 길눈 어두운 어머니를 위해/ 맨발로 눈길을 녹입니다/ 희미한 석유 냄새에/ 니 태일이 아이가, 하고/ 이름 부르시는데도/ 근사한 미소로 맞이하고픈 그는/ 돌아서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못 들은 척/ 시린 발을 멈추지 않았았습니다/ 어쨌든 인사를 해야 한다면 어머니,/ 잘 오시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누구나 가난하여/ 본의 아니게 평등한 이곳은/ 찬 공기가 고여 드는 빈민의 분지
힙겹게 숨 들이쉰 폐병쟁이는/ 한 평 남짓한 쪽방 공기를/ 벌이 없이 축내는 것이 미안하여/ 폐에 스미기도 전에/ 마신 것에 얼마를 얹어/ 밭은기침으로 토해냈다
누구나 지병이 있어/ 건강 또한 평등한 이곳에서는/ 이웃을 탓하는 대신 팔자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혹시 모를 전생의 죄를/ 곰곰이 떠올려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