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도시의 즐거움 세계사 시인선 4
최승호 지음 / 세계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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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 세계사


오랜만에 90년대 시집을 읽었다. 80년 후반 민주화 과정과 90년대 초반의 독일 통일 같은 정치적 상황 변화 외에 ‘생활’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놓여 있다. 급격히 도시화와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생기는 구질서와 신질서의 불협화음을 예민한 시인들이 놓쳤을 리 없다. 즉물적이고 선명한 죽음의 이미지가 많다.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의 세계는 모습을 시시때때로 바꿀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 메모


- 몸 11쪽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 공장지대 14쪽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 렌트카의 길 16-17쪽 부분

기억상실의 헝클어진 길들은/ 개들이 오줌으로 점 찍은 전봇대들은/ 다리 입구의 울부짖는 돌사자들과/ 주유소의 긴 고무호스는/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길 위에서의/ 신경질적인 경적,/ 1초를 빗나간 죽음과/ 1인치 곁을 쌩쌩 스쳐가는 죽음들/ (중략)




- 저녁의 상자 49쪽

연탄재 담은 상자를 안고/ 문을 나선다 죽음의 경계선을/ 넘은 뒤에 누가 내 불꺼진 뼈들을 절굿공이로 빻을 것인지/ 눈구멍에 겨울 해 불타고/ 혀 없는 夕陽天이/ 분홍색 뱀꼬리 햇살을 삼키는 저녁/ 상자에서 식은 해골들이/ 굴러떨어지며/ 부스스 먼지를 일으킨다
[출처] 최승호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 세계사|작성자 동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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