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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모네 ㅣ 봄날의책 한국시인선 1
성동혁 지음 / 봄날의책 / 2019년 9월
평점 :
* '변성기가 찾아온 소년'(성동혁 시집, 아네모네, 봄날의책, 2019)
아프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아픔을 외부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전히 내면으로 창끝을 겨누는 사람이 있다. 살을 파고드는 슬픔. 성동혁 특유의 기독교적인 색채와 발화는 그대로지만 약간의 변화의 기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변성기' 같은 시들.
'나무를 흔든 바람의 성대를 주워 첫 시집을 냈었'고, 소년은 지금 변성기다.
'나만 지났구나'하는 자조섞인 발화는 그 주체가 '나'에 있지만, '나를 지나는구나' 할 때의 발화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바람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시간이나 외부적인 정황, 병 같은 것들.
소년은 변성기가 지나면 문을 조금 더 열거나 한 발짝 문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 변성기 60쪽
지날 때가 있다 나무의 이름도/ 결국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을 외는 것 같아 묻기를 그만두었지/ 이름을 알면 구체적으로 엉망일 때가 있으니까 그저 나무 정도라고만 말하는 게/ 산책에선 필요하다/ 친구가 옥상으로 튀어 올라간 후/ 함부로 일몰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았다/ 몬스테라도 플라타너스도 그냥 나무라고 불러야 잠을 잘 수 있는 시기가 왔다/ 나무를 흔든 바람의 성대를 주워/ 첫 시집을 냈었다/ 유리 너머/ 해는 매일 내리는데/ 나만 지났구나/ 나만 지났구나/ 하다가/ 어색해서/ 나를 지나는구나/ 나를 지나는구나/ 했다
- 할렐루야 이제는 이 말에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간 11-12쪽
너는 아주 먼 곳으로 유학을 갔고// 나는 그 이후 우표를 모으는 사람이 되었다// 후미등이 떠오르는 저녁이었다// 양복을 입고 사람들이 모였다 돌아갔다// 네 동생은 교복을 입고
다리 위에 서 있던 날엔// 구름을 채집하며 올라가는 네가 보이기도 했다// 관제탑을 피해 잘 걸어가고 있구나// 편지 대신 봉투 안 가득 우표를 넣어 보낸다
달이 아주 낮은 날// 달이 교각 밑에 고인 날// 강물에 쓸려 우리에게까지 잠깐 빛나던 달// 그건 네 답장이 맞잖니
넌 아직도 많은 후미등을 끌어올리고 있구나// 우표들이 진눈깨비처럼 떨어져// 후미등에 달라붙는다// 영영 떠오르지 않을 듯 브레이크를 밟고// 갓길에 차를 세워 둔 사람들이 나온다
- 작열감 30쪽
커피에 생강을 넣고 끓인다/ 생강을 썰며 한 생각이/ 커피콩을 갈며 한 생각이/ 모두 태풍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리수거를 하며 내가 안치될 고장을 생각한 건/ 염색약을 바르며 숲 사이사이 흰 영혼을 생각한 건/ 효도가 아니었다/ 선교사가 된 친구가 가끔 고국에 돌아오면/ 교인들은 고국을 덜 불행한 곳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서랍에 숨겨 둔 의심과 모멸감을/ 여권이 빼곡한 성직자들이 열어 볼까 두렵다/ 옷걸이 밑으로 머리를 늘어뜨린 목도리와/ 철제 통 안에서 빛나는 영구치는/ 평일에 드리는 십일조였다/ 태풍은 지붕을 추수하며 보폭을 넓힌다/ 나는 포장을 벗기지 않은 양과자를 씹는다/ 단단한 모자를 둘러쓰고/ 단단한 블레이저를 두르고/ 심벌즈가 부딪칠 때마다/ 깃을 여미며/ 인파를 빠져나가고 있다/ 명백한 건 커피와 생강과 태풍은 뜨거운 과일이라는 것/ 모든 명성은 어금니 사이에서 죽어 간다는 것
- 아네모네 35쪽
나 할 수 있는 산책 당신과 모두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라늄은 원소기호가 아니죠/ 꽃 몇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 잘리면 그냥 가자/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우린 플로리스트 플로리스트라고 하지요/ 꽃범의 꼬리 매발톱/ 모종의 식물들은 죽은 동물들이 기어코 다시 태어난 거죠/ 거기 빗물에 장화를 씻는 사람아/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건조하고 낮은 짐승이 불시에 떨어지는 것 같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 그래도 시월에 당신에게 읽어 준 꽃들의 꽃말은/ 내 편지 다름 아니죠/ 붉은 제라늄 내 엉망인 심장/ 포개어진 붉은 장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나 지옥에서 빌려 온 묘목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