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을 시작하는 날에 둘이서 홀로 앉아








1. 어제 저녁 처가 식구가 다녀갔다. 올 6월에 결혼한 후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초대하는 사람도, 초대받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무더위를 핑계삼아 날짜를 미뤘다. 10월 초엔 추석, 10월 중순엔 통영과 강화도 일정이 잡혀 있었다. 절정의 단풍이 고개를 숙이고 두꺼운 외투를 꺼낼 즈음에야 초대할 수 있었다.









2. 베스킨로빈스에서 아이스크림도 한 통 샀다. 31일이라 컵 크기를 업그레이드 해줬다. 나는 체리쥬빌레, 아몬드봉봉, 애플민트를 골랐다. 아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요거트, 또 하나 뭐였더라'. 책을 고를 때도,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도, 만날 사람을 고를 때도 이제는 검증된 것들을 선호하게 된다. '검증'이란 말이 거슬린다면 조금 더 순화해서 '익숙한' 주제와 맛과 냄새가 베어 있는 것들.







3.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들과 약속을 마치고 돌아왔다.


"00은 요새 뭐 한대?"

00은 결혼식 날 부케 받은 아내친구다. 아담한 키에 얼굴은 동글동글한 야무진 얘다. 작년 아내(당시 여친)가 친구들과 안동 당일치기 여행을 새벽에 떠났다가 부천에 밤 12시에 도착했었다. 상동역에 마중나가 여친과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었는데, 그때 그 친구가 00이다. 결혼 전에 밥 한번 먹자고 했었는데, 결혼 후에도 여태 밥을 같이 못먹었다. 언제쯤 빚을 갚을런지.



"어디서 밥 먹었어?"
"소풍 터미널 맞을 편에 무슨 호텔인가 있는데, 거기 파스타집. 00이랑 ㅁㅁ가 호텔에 주차하고 밥을 먹으러 가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그러더라?"



호텔에서 근무해, 라고 자신있게 말하는데 호텔에서 잤어,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호텔에 있는 가게에 밥먹으러 들어갈 때 느낀 알 수 없는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4. 11월에는 서울 고등법원에서 확인감사가 올 거라 한다. 상반기에 정기사무감사를 했는데, 그 때 지적된 사항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차 오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올지 대상은 누구인지 정해지지 않았지만 지난 일주일 과원들 모두 분주했던 것 같다.
컴퓨터로 기간을 지정한 후 데이터를 일괄적으로 뽑아 내는 작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라 하는데 누군가로부터 감시받는다는 불쾌함을 '이 참에 깔끔하게 한 번 일을 정리하지 뭐.'라는 긍정으로 쓰담으며 10월의 마지막 주를 보냈다.





5. 상동도서관에서 빌려온 5권의 책을 만지작만지작.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권(고종실록)은 끝나고 이제 20권 망국만 남았다.
고미숙의 열하일기(상)은 마지막장 '일신수필' 20쪽 쯤 남았고
함민복 산문집 '미안한 마음'은 오늘 다 읽었다.



김경주 산문집, '밀어'와 함돈균 평론집 두 권 남았네.




11월 1일. '1'이라는 숫자가 세 개나 있어 초심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다가올 추위에 대비해 일감과 글감을 미리미리 준비해야겠다.


#2015년11월1일
#journa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지럼증

‪#‎현기증‬





하이패스는 없다

안녕하세요, 는 안녕하며 지나가지만

하이(Hi)는 How are you? 라며 붙잡는다 대답을 기다린다







내 발로 걸을 땐 머리 속이 끈끈해지는데

남의 등에 업혀 도로를 달리면 딱딱히 굳는다






등산로 입구에 템플스테이 간판이 보인다

절박한 자가 절에 묵으러 오는 곳, 절에 묶는 곳, 

절박,절숙, 절묵음, 절묶음이 반복되는 곳







담임 선생님은 말했다

" 3학년 2반 가서 김형수한테 교무실로 오라고 해라"

"선생님, 제가 형순데요"








길가에는 얼굴만 알고 이름을 모르는 꽃나무가 너무 많다

열매를 맺어도 꽃은 피지 않는다는 무화과가 야속하다








떨어지는 폭포수는

여름과 가을, 학생과 선생, 밖의 나와 안의 나의 

낙차를 선물한다 

어지럽다 시차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부력

‪#‎부력‬ ‪#‎무릉계곡‬
고개를 들었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팔지 못한 나물이 담긴 대야를 머리에 이었다



고개를 숙였다
뱃 속에 넣었을 땐 분명 가벼웠는데
양 어깨에 맨 가방 속 맥주 캔은 왜이리 무거운가
사람 실은 엘리베이터는 가뿐한데
짐 실은 사다리 차는 힘겹다



사부작대는 아이 업은 어미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고
출근 길 사람들이 이고 가는 빈 가마는 덜커덩거린다



교실 뒤로 책상 물리고 했던 햄버거놀이처럼
너는 양파가
나는 고깃덩이가 되어
조여오는 빵 틈에서 기어나와
토마토 한 조각 붙잡았다




목구멍에 걸렸다
뱉은 침은 말이 되고
삼킨 울음은 글이 되었다
고개가 들렸다
빨갛게 크렌베리가 물을 먹고 떠오른다





손목은 떨리지만
고개를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팔과 근살, ~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읽고
#김경주 #나는이세상에없는계절이다



1. 나는 요새도 반팔 옷을 입고 출근한다. 설악산 단풍과 수확한 감은 누가 더 얼굴이 붉어지나 내기를 하는 계절이지만 내 몸의 체온은 아직 여름이다.

"안추워? 젊음이 좋구만."
"창고에 있는 기록 10개만 들면 안 추워요."
지금 일하는 부서에서는 창고 기록을 꺼내거나 정리하는 일이 많다.



어린 시절 이십 여년을 부산,마산,창원에서 자랐다. 한 겨울에도 눈을 보기 힘들고 한 겨울에도 가까운 슈퍼 갈 때는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나갔다.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자라 추위를 더 타야 정상적일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어릴 때 받아 저장해 둔 햇볕과 따스한 기운을 몸 속 어딘가 숨겨놓고 필요할 때마다 연료로 쓰는 난로처럼 몸뚱아리는 발열을 멈추지 않는다. 근살의 힘이다. '근육도 살도 아닌 둘이 몸을 얼싸안고 진하게 얼굴을 부빈 오묘한 형체의 마블링'을 보는 아내가 웃는다. 몸이 웃기다고. 매일 보는 몸이지만 내가 볼 때가 아닌 아내가 보는 내 모습을 볼 때만 즐겁다.


2. 한 겨울에 입는 반팔과 '근살'은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닮았다. 계절이 상징하는 시간과 음악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존재의 불가능성이 이 시집의 척추다. 써먹을 데가 없는 쓰임, 불가능한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힘, 글은 가능의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의 가능이다.



이 시집은 일반적인 시집과 형식 면에서 다른 점이 많다. 마치 다다이즘을 표방한 이상 시인의 시처럼 띄어쓰기를 전혀 안한 것, 연극처럼 막을 나눈 것, 곳곳에 쓰인 각주들, 철학을 주제로 한 짧은 단편 소설같은 시도 있다. 아마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과 극대본을 공부한 시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세한 단어에 집착하기보다는 큰 흐름에 초점을 두고 읽어 나간 후반부에 조금 더 읽어나감에 탄력을 빋았다. 다시 오는 계절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겠다. 반팔을 입고, 근살을 내보이며.


**

고양이가 정육점 유리창을 핥고 있는 밤(93쪽, 전문)

거미들이 거리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귓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고양이가 자정의 정육점 유리창에 붙어 있다
뒤꿈치를 들고 유리를 앞발로 긁는다
토막 난 얼굴들이 쓰레기통 속에서 화장이 벗겨진다
벽에 걸린 갈고리들이 음문을 벌린다
핏물이 시간 위로 떨어진다
물이 찬 형광등 안에서,
벌레들은 죽은 알을 낳는다
매달린 살덩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쓸쓸한 그림자 하나, 하체가 벗겨져 있다
고양이는 등을 세우고 노려본다
검은 혀가 고기의 목을 핥기 시작한다
침을 질질 흘리며 내장을 핥는
고양이의 허기가 가로등불에 환하다
혀가 빨고 있는 황홀한 굴욕
골목을 돌던 한 여자의 입이 틀어막히고 있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 5(부분, 108-109쪽)

창문4

114를 누르고 누군가 구조 요청을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
가 정말 미안해요라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비행선이 오
고 있다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우린 꼭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운다 114를 누르고 조금만 대화하자고 한다 114를 누
르고 누군가 당신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평생 볼 수가 없어요
라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이 도시가 참 그래요......라
고 한다 114를 누르고 벙어리가 제 이름을 몇천 번씩 부르며
연습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얼굴 없는 울음을 조용히 보낸
다 지금 저쪽에서 기록되고 있을 통화 내역을 믿으며 제 울음
의 화석을 만들기 위해 조용히 어둠 속에서 114를 누르는 창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티의 기술
함정임 지음 / 봄아필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화도 고구마 파티와 파티의 기술(함정임, '파티의 기술'을 읽고)





1. 10월 17일 오전 직장노조 주최로 강화도 교동으로 고구마를 캐러 관광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주말이라 도로는 붐볐고, 강화도 본 섬과 교동도를 잇는 교통대로를 건너자 바리케이트 틈에서 나온 해병대원이 버스로 올라왔다. 



"인원수와 대표 1명 연락처 기재해 주시고, 오후 12시 이전까지 나오셔야 합니다."

말투는 평소 내가 민원인을 대하는 사무적인 말투를 닮아 피식 웃음이 났다. 퉁명스럽게 내뱉는 단어에는 '이곳은 민통선'이라는 선명한 줄무늬가 새겨져 있다. 


'고구낚시터 이외에는 낚시금지'라는 표지판을 지나 버스는 조금씩 북쪽으로 내달렸고, 일행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을 차지하는 초등학생 아이들은 긴 버스여행이 지루한지 발을 구른다. 



농기계로 고구마밭을 한 번 뒤집어 주신 땅 주인 덕에 우선 각자 가져갈 10킬로그램 한 박스를 쉽게 채웠다.



"우리는 참가비 만원 내고 왔습니다. 돈을 내고 참여하면 레크리에이션이고, 돈을 받고 하면 노동이에요. 천천히 자연을 즐기면서 캐십시오."



모자와 수건사이로 스며드는 가을 햇살에 비친 속노란 고구마를 꼭 닮은 나락들. 드넓은 벌판에 어깨동무를 한 벼들은 가을 바람에 맞춰 고개를 숙인채 좌우로 머리를 흔든다. 대형 스피커에서 빵빵 터지는 사운드에 맞춰 해드뱅잉을 하는 락페스티벌에 온 관객처럼.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저멀리서 오리와 저어새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밭 주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와 수육 그리고 막걸리는 덤이다. 돗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무리 위로 잠자리 한쌍이 날아다닌다. 작년에 아내와 저 잠자리처럼 강화도 역사박물관, 연미정, 석모도, 보문사, 고려궁지, 광성보, 초지진, 전등사, 동막해변...... 참 많이 쏘다녔구나. 잠자리처럼 그땐 아무리 날아다녀도 피곤하지 않았는데.









2. 소설가 함정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경향신문에 그녀가 '함정임의 세상풍경'이라는 칼럼을 통해서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제주도와 부산 등 국내외 여러 곳에 대한 감상과 문학을 연관지어 쓰는 그녀의 칼럼을 챙겨본다.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분명 내용은 여행 에세이인데 왜 제목이 '파티의 기술일까'




'꽃과 파티, 이 둘은 내가 일상을 소소하면서도 생기롭게 일어어나가기 위해 기리는 것들이다. 파티는 일상을 꽃피게 하고, 일상을 예술로 전환시켜준다. 이 책은 그곳이 어디든, 어떤 상황이든 일상을 예술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지속해온 내 오랜 신념의 찰나적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프롤로그 중)




총 3부 구성으로, 1부(일상)은 부산의 곳곳을, 2부(여행) 세계의 여러 도시들, 3부(예술)은 작가와 화가들의 작품과 사연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특히 중간중간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어 눈이 즐겁다. 대개 여행전문작가나 사진가가 펴 낸 여행에세이는 사진에 비해 글이 부실한 경우가 많은데 저자가 소설가라 그런지 글이 사진이다. 마음 속에 담아둔 환상에 가까운 바람이지만 저자처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글쓰는 삶을 이 책을 읽으며 상상했다. 




파티는 계속 되어야 한다. 파리, 뮌헨, 프라하, 강화도, 부산 어디서든.



#함정임

#파티의기술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꿀수록, 그리하여 감행할수록, 그것은 무엇보다 여기로 잘 돌아오기 위한 것. 떠나면 떠날수록, 떠나 있는 먼 곳에서 순간순간, 마치 깊은 거울 속의 내부를 들여다보듯, 여기 이곳을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저기를, 저기에서는 여기를, 저기는 무수하지만 여기는 오로지 한 곳, 현재의 공간, 곧 내 삶의 현장이다. 나는 일상 속에서의 예술을 꿈꾸듯, 삶의 현장에서 작품과 휴식을 동시에 도모한다. 서재와 부엌이 공존하고, 나와 네가 공존하고, 인간과 우주가 공존하고, 현재와 과거, 과거와 미래, 미래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리하여 영혼과 형식이 공존한다. (223-22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