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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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팔과 근살, ~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읽고
#김경주 #나는이세상에없는계절이다



1. 나는 요새도 반팔 옷을 입고 출근한다. 설악산 단풍과 수확한 감은 누가 더 얼굴이 붉어지나 내기를 하는 계절이지만 내 몸의 체온은 아직 여름이다.

"안추워? 젊음이 좋구만."
"창고에 있는 기록 10개만 들면 안 추워요."
지금 일하는 부서에서는 창고 기록을 꺼내거나 정리하는 일이 많다.



어린 시절 이십 여년을 부산,마산,창원에서 자랐다. 한 겨울에도 눈을 보기 힘들고 한 겨울에도 가까운 슈퍼 갈 때는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나갔다.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자라 추위를 더 타야 정상적일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어릴 때 받아 저장해 둔 햇볕과 따스한 기운을 몸 속 어딘가 숨겨놓고 필요할 때마다 연료로 쓰는 난로처럼 몸뚱아리는 발열을 멈추지 않는다. 근살의 힘이다. '근육도 살도 아닌 둘이 몸을 얼싸안고 진하게 얼굴을 부빈 오묘한 형체의 마블링'을 보는 아내가 웃는다. 몸이 웃기다고. 매일 보는 몸이지만 내가 볼 때가 아닌 아내가 보는 내 모습을 볼 때만 즐겁다.


2. 한 겨울에 입는 반팔과 '근살'은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닮았다. 계절이 상징하는 시간과 음악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존재의 불가능성이 이 시집의 척추다. 써먹을 데가 없는 쓰임, 불가능한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힘, 글은 가능의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의 가능이다.



이 시집은 일반적인 시집과 형식 면에서 다른 점이 많다. 마치 다다이즘을 표방한 이상 시인의 시처럼 띄어쓰기를 전혀 안한 것, 연극처럼 막을 나눈 것, 곳곳에 쓰인 각주들, 철학을 주제로 한 짧은 단편 소설같은 시도 있다. 아마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과 극대본을 공부한 시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세한 단어에 집착하기보다는 큰 흐름에 초점을 두고 읽어 나간 후반부에 조금 더 읽어나감에 탄력을 빋았다. 다시 오는 계절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겠다. 반팔을 입고, 근살을 내보이며.


**

고양이가 정육점 유리창을 핥고 있는 밤(93쪽, 전문)

거미들이 거리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귓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고양이가 자정의 정육점 유리창에 붙어 있다
뒤꿈치를 들고 유리를 앞발로 긁는다
토막 난 얼굴들이 쓰레기통 속에서 화장이 벗겨진다
벽에 걸린 갈고리들이 음문을 벌린다
핏물이 시간 위로 떨어진다
물이 찬 형광등 안에서,
벌레들은 죽은 알을 낳는다
매달린 살덩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쓸쓸한 그림자 하나, 하체가 벗겨져 있다
고양이는 등을 세우고 노려본다
검은 혀가 고기의 목을 핥기 시작한다
침을 질질 흘리며 내장을 핥는
고양이의 허기가 가로등불에 환하다
혀가 빨고 있는 황홀한 굴욕
골목을 돌던 한 여자의 입이 틀어막히고 있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 5(부분, 108-109쪽)

창문4

114를 누르고 누군가 구조 요청을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
가 정말 미안해요라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비행선이 오
고 있다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우린 꼭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운다 114를 누르고 조금만 대화하자고 한다 114를 누
르고 누군가 당신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평생 볼 수가 없어요
라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이 도시가 참 그래요......라
고 한다 114를 누르고 벙어리가 제 이름을 몇천 번씩 부르며
연습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얼굴 없는 울음을 조용히 보낸
다 지금 저쪽에서 기록되고 있을 통화 내역을 믿으며 제 울음
의 화석을 만들기 위해 조용히 어둠 속에서 114를 누르는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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