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도장 #인영



십년 째 쓰는 필통 속 도장 두 개
나와 엄마를 쏙 빼닮은 막도장 두개
엄마가 열 달 배불러 낳은 쌍둥이
나는 쌍둥이를 업고 집을 나선다



나는 매일 직사각형 도장을 판다





전봇대 옆에서 아침잠을 자는 통근버스에 출근도장
끌어안은 연인의 살구색 입술도장
시원섭섭하다며 돌아서는 이혼도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오선지에 퇴근도장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마에 얼굴도장





나는 매일 유언장을 쓰고 이름을 각인(刻印)한다
이름 옆에 누운 인영(印影)은 낯을 가린다
잠든 인영의 얼굴에 가만히 입을 맟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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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강성은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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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헤라자데, 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중에서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
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
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
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
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
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
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
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
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
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
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
험적인 이야기 어느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
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 시집 첫 번째에 수록된 시다. 책으로 말하면 서문에 해당하는데, 강성은의 첫 시집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형식적으로는 연갈이, 행갈이 없이 한 덩어리로 쭉 써내려가는 시들이 많다. 내용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어둠과 슬픔인데 그것을 동화적 모티프를 차용하여 풀어내고 있다.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같은 표현은 역설적 언어유희임과 동시에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우리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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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너에게 물었지만 너는 그였다
나는 너에게 물었지만 그가 대답했다
나는 개를 물었지만 그는 개였다
나는 개를 물었지만 그가 짖었다

나는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너는 남자였다
나는 의사라고 생각했지만 너는 간호사라고 표시했다

나는 너를 찔렀지만 너는 어미 독약을 먹었다
내가 너를 찔렀고 그는 너를 밟았고 너는 죽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2

나는 묻고 너는 답하지만 그건 최초의 물음이다
나는 묻고 너는 답했지만 그건 답이 아니라 새로운 물음이다
나는 너에게 묻고 너도 나에게 묻고 여전히 하나씩 둘이다

나는 너에 대해 말하고 너는 그라고 생각했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묻고 너는 답하고 너는 화가 몹시 났다
그것은 중요하고 너의 잘못은 가볍다
나의 잘못은 무겁다

나의 잘못이 없다면 너는 화가 났을까?

3

나는 묻고 너는 답하고 
비로소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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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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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자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중)

#줄자 #함민복

줄자는 감겨 제 몸을 재고 있다
자신을 확신해야 무엇을 계측할 수 있다는 듯
얇은 몸 규칙적인 무늬
줄자의 중심엔 끝이 감겨 있다
줄자는 끝을 태아처럼 품고 있다



수도자의 뇌를 스스륵 당겨본다



: 시집 한 권을 읽으면 기억에 남는 시 한 두 편이 있다. 사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화려한 수사(修辭)를 보면 기가 질려 ‘이래서 시인은 다르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저녁상에 밥 한 공기와 김치 하나만 있어도 따뜻한 저녁처럼 느껴지는 시도 있다. 함민복의 시는 가난하다. 가난에 울고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개천에서 용나는’ 스토리가 아니다. 함민복은 ‘가난팔이’시인이 아니다. 가난은 일상이고 사물이고 현실이고 실존이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라는 어느 시집 제목처럼 가난은 고향이다.


사람을 가방끈의 길이, 돈의 높이, 나이테의 둘레로 판단하며 줄자를 들이대는 세상에서 줄자를 ‘태아를 품은’ 어머니, “수도자의 뇌”라고 환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발견의 차원을 넘어 발명이라 부르고 싶다. 뇌 속의 해마 같은 “얇은 몸”을 칭칭 감고 고뇌하는 수도자의 삶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런 가난이라면 가난하고 싶다. 가난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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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
#공범

밤에 깨어 있는 낮
두꺼운 외투가 맨가슴을 그리듯 밤을 기다리는 낮


밤이 출근하면 낮이 배웅했고
밤이 퇴근할 무렵 낮은 외출했다
낮이 잠을 자면 밤은 죽음에 대해 글을 쓰고


내가 너를 삼키지 않듯
밤은 낮을 가릴 뿐이다
밤은 낯을 가릴 뿐이다


밤은 가면을 쓰고
눈썹을 들어올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코를 훌쩍거리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심야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낮달은 희미할 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배는 불렀다가 꺼지는 것이고 꺼지면 꼬르르 소리가 나다가
쓰리다가 야윈다


졸면 죽음이다 졸음운전은 목숨을 건 도박
이라는 협락
최장기간 터널이 지나면 동굴이 나온다
동굴 속엔 호랑이를 삼킨 뱀이 산다
뱀은 온몸으로 바닥을 쓸며 대지의 신음소리를 저장하고


동기 고의 목적이 없는
낮과 밤의 상습적인 자리바꿈
그들은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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