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손철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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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 흥(興)(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김영사, 2016


1. 기자출신 미술평론가인 저자의 테마 강연을 채록하고 묶은 책이다.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사람보는 눈' 에세이 '꽃 피는 삶에 홀리다'까지 여러 권을 보았고 만족했기에 신작도 주저 없이 구매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책은 도끼다 시리즈' '더 클래식(경향신문 문학수 기자가 쓴 클래식 책) 시리즈' 처럼 검증된 저자가 쓴 책을 몇 권을 읽어보면 일관된 가치관과 문체가 익숙해지기 때문에 과외선생님처럼 느껴진다. 강연의 형식을 띈 책이라면 내가 그 장소에 있는 느낌도 든다.



주제는 크게 은일(숨어 살기와 혼자 이루기), 아집(雅集)(더불어 즐김을 나누다), 풍류(서로 기쁜 우리들) 3부 구성에 총 6강이다.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 최북, 강세황, 김득신 등 조선 최고의 화가들의 그림들이 두루 소개되고 있는데, 부제에서 밝혔듯 공식적, 비공식적인 행사나 모임, 유흥의 장소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작품들을 해설하고 강론한다. 작품에 씌여진 글씨에 대한 해설은 물론이고, 배경과 관련 문헌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내용이 풍부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사람이 그립고 한편 사람에 치여 살거나 상처받으면 혼자 있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도시에 살며 하루하루 반복된 생활에 자존감을 잃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 훌쩍 먼 곳으로 떠나고 싶지만, 막상 떠나면 또 집이 그립고 사람이 그립다. '은일' 속에 '아집(雅集)' 있고 '아집(雅集)' 속에도 분명 '은일'이 있다. 아집과 은일의 틈을 비집고 찾아오는 '풍류'를 발견하고, 스스로 발명해보려는 안간힘, 애씀이 아집(我執)을 항복시키고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2. 메모

- 박제가, 〈어락〉
그대는 알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것을 물가에서 알았노라.
(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
: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알았는가, 물가에 나와서 물고기가 노는 걸 보고 알았다, 이 말이 박제가의 눈에는 그야말로 실학의 가장 중요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이루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102쪽


- 네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게 소통이 아니라, 내가 너를 알 수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곧 소통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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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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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하는 과학자 김상욱의 과학공부, 동아시아, 2016




1. 결론부터 얘기하면, 과학교양서로 추천할 만한 책이다. 현대 물리학의 두 축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해 비전공자인 일반 독자가 읽어도 이해에 무리가 없다. 독자의 의문을 선제적으로 던지면서 인내심을 갖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특히 내 몸이 둘로 쪼개지지 않고도 여기와 거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삶과 죽음이 양립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등 경험적으로 아는 세계와 딴판인 양자역학에 대한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양자 중첩’과 ‘관측이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명제는 충격적이다). 제3장(나는 과학자다)의 여러 챕터를 읽으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책의 편집에 있어서, 제1장(과학으로 낯설게 하기)에서 일상의 소재나 사건을 물리학적으로 해석해여 흥미를 돋우고, 마지막 제4장(물리의 인문학)에서 ‘자유의지’와 우주의 결정론/비결정론의 설명까지 연결시켜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2. 메모


- 달은 지구로, 지구는 태양으로, 태양은 은하중심으로 낙하 중이고, 그 효과들은 모두 중력과 상쇄되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구상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우리 인간은 낙하하지 않기 때문에 중력을 느낀다. 90쪽



- 달도 사과처럼 추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은 단지 추락하는 방향과 직각으로 즉 수평 방향으로 속도가 있어서 추락하는 동시에 수평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구가 편평했다면 투수가 던진공처럼 결국 달은 땅바닥에 떨어졌을 거다. 하지만 지구는 둥글다. 달이 낙하하면서 동시에 수평으로 이동한 정도가 지구의 곡률과 정확히 일치하여 계속 추락하면서도 땅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 주인공은 사과가 아니라 달인 셈이다. 148-149쪽



- 부재의 실재, 153쪽-154쪽 중에서

이 세상이 무언가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주위는 공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공기가 없는 곳에 가면 바로 공기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물속에 생긴 거품을 보면 거품이라는 존재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거품 안에는 공기가 있지만, 공기 자체는 원래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거품 속 공기와 물의 경계, 즉 물의 부재다. 물의 부재로 만들어진 거품은 이제 그 자체로 존재가 되어 마치 실재인 듯 물속을 움직이고 다닌다.




- 부재는 그 자체로 실체이다. 어둠이란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빛이 부재한 것이다. 불의(不義)는 말 그대로 단지 의(義)가 없는 것이다. 잘못된 일을 보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가 없는 상태, 즉 불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의의 부재’는 실체가 되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156쪽


- 이제 다시 칸딘스키로 돌아가자. 미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거칠게 이야기해서 미술은 우리의 경험에서 얻은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좁게 생각하면 여기서의 경험이란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근본적으로 절대 볼 수 없는 것을 그린다면, 다른 사람이 그 그림을 보았을 때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칸딘스키가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하는 원자를 그려야 했다면 과연 무엇을 그렸을까? 원자 수십 개를 여기저기 그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단 원자를 보면 원자는 한 장소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237-238쪽


-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의 무대가 무용수에 의해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자역학은 관객이 무용수의 운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모두 고려하면 무대, 무용수, 관객이 모두 뗄 수 없이 하나로 묶인 유기체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복합체의 모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물리학자도 알지 못한다. 아직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는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261쪽



- 확률이 작을수록 당연하지 않은 사건(예: 점쟁이가 당신은 내일 죽을 것이다)이고 그럴수록 정보의 양이 많다. 정보량과 확률은 반비례한다는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정의된 정보의 척도를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엔트로피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와 관련된다. 따라서 복잡성의 척도이기도 하다. 사귀는 사람이 한 명인 사람보다 여럿을 사귀는 사람이 복잡할 것은 자명하다. 바람둥이의 엔트로피가 크다는 말이다. 252쪽




- 양자 역학의 핵심 원리 첫 번째. 관측이 대상에 영향을 준다. 이를 설명하려면 또 하나의 핵심 원리인 양자 중첩(superposition)을 알아야 한다. 양자 중첩이란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성질을 동시에 갖는 것을 말한다.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이것은 중첩이다. 좀 더 물리학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한 순간 두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있다면 중첩이다. 몸을 둘로 나누라는 말이 아니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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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안에 담은 것들 - 걷다 떠오르다 새기다
이원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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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 산문집, 산책 안에 담은 것들, 세종서적, 2016



1. 이원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제목처럼 그녀가 살았던 홍대, 한강 주변, 학창시절을 보냈던 명동, 시장, 갤러리에 대한 섬세한 감상이 한 축을 이루고, 후반부로 갈수록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환경 보다 내면에 대한 서술이 많은 느낌이다.

‘시장과 묘지’ ‘손’에 대한 글이 기억에 남는다. 조금 된 밥인데 빡빡하지 않고, 씹을수록 밥에서 단맛이 나는 문장. 오래 씹어야 맛있는 밥 한 공기.




2. 2015년 10월 1일 홍대 서교예술센터 오후 7시30분 와우북 페스티벌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퇴근 후 지하철에서 1,500원 짜리 와플을 우걱우걱 씹으며 늦지 않기 위해 홍대로 가던 길이 생생하다. 그해 모토인 ‘글쓰기 글램핑’ 중 강연 주제는 ‘자화상, 아이처럼 내가 나를 신나게 골똘히 들여다보기’. 그때는 시(詩)도 모르고, 시인도 처음 봤고, 작은 교실 같은 공간에서 십여명이 모여 있는 그 자체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창의적, 인문적이란 말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데요. 저는 인문적 글쓰기란 표면과 안을 동시에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겉과 속의 공존을 인정데서 출발하는 것이죠. 흔히들 글쓰기는 내면, 안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표면도 중요해요.”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인사’라는 글쓰기 시간.
( )을 놓치고, ( )에서 내린다. 그리하여 ( )을 바꾼다.

꿈을 놓치고 일에서 내린 사람, 혼기를 놓치고 웨딩카에서 내렸다는 사람, 일을 놓치고 자유에서 내린 사람. 나는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린다. 그리하여 얼굴을 바꾼다.’ 라고 썼다고 씌여 있다.



3. 메모


‘사이는 사랑이다. 채워도 채워도 비어 있는 것,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것이 사랑이다. 채우지 않으면 비어 있는 곳도 없으니, 주지 않으면 모자라는 것도 없으니 채우기 시작하면 비로소 탄생하는 공간. 주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결핍되기 시작하는 시간. 사랑. 사랑은 나를 사라지게 한다. 사랑은 내가 사라질 때만 지속된다. 당신의 손이 먼저이고 당신의 안색이 먼저이고 나는 점점 사라진다.’ 24쪽


‘길이 없이 나타나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을 산책하는 일은 미끈한 계란 위를 연속해서 딛는 것과 같다.’ 123쪽

- 시장은 상점 밖에 물건을 내놓는다. 어떤 상점은 상점 안보다 상점 밖에 물건을 더 많이 쌓아둔다. 상점 안에 진열하더라도 밖에서 많이 보이게 최대한 많이 보이도록 쌓아둔다. 백화점의 고급 상품과는 정반대의 진열 방법. 명품은 희소가치를 강조하므로, 몇 개. 어느 경우에는 하나를 새로 발견한 섬처럼 진열한다. 백화점은 당신만, 특권화를 지향하고, 시장은 누구나, 보편성을 지향한다. 유세를 할 때 백화점이 아닌 시장을 도는 이유. 시장은 어디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140-141쪽


- 손이 말한다. 얼굴보다 더 수줍은 것은 손이다. 얼굴이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을 때에도 손은 제 손끝을 만지작거린다. 길을 걸을 때도 닿을까 말까 하고 있다. 손은 제비꽃처럼 수줍어한다. 아기 토끼의 두 눈알처럼 수줍어한다. 수줍은 손은 계속 찾는다. 드러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찾는다. 찾는 손은 멈추지 않는 손이다. 손에서 수줍음이 없어질 때 손은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않게 된다. 아니 찾지 못하게 된다. 사회적 악수는 수줍음을 잃어버린 손이며, 호감으로 잡는 손은 수줍음으로 주춤주춤 두근두근한다. 손을 잡는다는 표면적 행위는 똑같지만 사회적 악수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손을 다 잡지도 못하고 살짝 닿은 손은 밤잠을 설치며 며칠을 생각하게 한다. 잡았던 손에 찾고 있던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줍은 손은 두근거리는 손이다. 손이 수줍지 않다면 그것은 의례적인 말과 같이 의례적인 손이다. 손은 늘 수줍어하는 방향이다. 수줍은 손 안에 심장이 있다.



- 엄마 173쪽
세상에 와서 제일 많이 발음한 단어. 나를 세상에 나타나게 한 장본인. 엄마와 나는 하나에서 분리된 둘. 하나가 품었던 하나. 큰 하나가 품었던 아주 작은 하나.
부르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사람. 내 몸이 커진 만큼 자신은 쪼그라들어가는 사람. 오늘도 힘들어서 어쩌니. 나보다 먼저 나의 하루를 살아보는 사람. 내가 걸을 밤길에 마음이 늘 마중 나와 있는 사람 엄마라고 불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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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2016.11
현대시학사 편집부 엮음 / 현대시학사(월간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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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학 2016. 11 Vol. 570

 

1. 한 작가의 시집 한 권을 읽는 것과 문예지나 수상 모음집을 읽을 때의 느낌은 다르다. 시인이 짧게는 3년, 길게는 7, 8년의 시간을 견디며 한 권을 시집을 묶는다. 그 속에는 변함없는 중심 줄기와 조금씩 깎여 새로운 틈을 찾아 흐르는 주변이 동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오래된 과거와 근황을 일관된 흐름 속에 두루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집을 소장하게 된다. 반면 문예지 등은 지금, 현재의 문단의 경향을 파악하는데 유익하다. 특히 등단한 지 얼마되지 않았거나, 첫 시집을 낸 시인부터 몇 권을 출간한 중견시인들이 바로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즉각 느낄 수 있는 날 것에 가깝다.

 

이민하 시인(혀, 포지션), 김종연 시인(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황혜경 시인(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김이듬 시인(나는 춤춘다)의 신작시들이 좋았다. 2016년 하반기 신인상 김유림 시인의 등단작들이 실려 있다.

 

 

- 김종연, 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99-101쪽 부분

 

‘누구나의 삶에서 자기 삶의 주연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지만 어쩌다 내 삶의 주연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지만 어쩌다 내 삶의 주연이 되어버린 사람은 배우로서 실패한 삶이니 그 또한 아프게 될 것이다.’

 

‘과거는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는 내게 목죽을 맨 말뚝이고 나는 내 삶을 다해 원을 그린다. 중심을 향해 점점 작아지는 원을. 점점 과녁이 되어가는 원을. 내가 감아 댄 시간 앞에서 다리가 풀리고, 어깨가 쳐지고, 너무나 늙고 볼품없어져서 나는 어느 날 한순간에 주저앉게 될 것이다. 나의 시간 한가운데 명중하게 될 것이다.’

 

- 이현호, 만함晩夏 부분, 90-91쪽

 

‘삼천오백 원어치만큼 하늘이 밝아 있었다. 슬픔을 화폐로 쓰는 나라가 있다면 우린 거기서 억만장자일 거야.’

‘나는 이제 어떤 말도 상처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어떤 말도 인제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상처받았다.’

‘꿈속에서는 가시를 세운 괴물 두 마리가 꼭 껴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심장이 다가붙을수록 더 많은 피를 흘렸다. 가시에 찔리느라 모자란 피를 서로의 몸을 핥으며 채웠다.’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주기엔 너무 눅눅한 베갯잇을 반성하는 동안 찾아든 밤은 하루새 숨이 죽어 있었다. 팔뚝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좁은 골목에 들 때 누군가는 훅훅 더운 숨을 뱉으며 제 발로 집을 떠나오고 있었다.’

 


- 김이듬, 옷걸이, 146-147쪽 부분

 

‘내 치마가 걸려 있다 저녁놀과 가로등 사이에’

 

나는 벌거벗은 얼개로 있다 인공관절인지 뼈에 사무치지 않는다 가랑이를 벌리고 가부좌한 후손 같다 내 목을 꼬아 머리로 퀘스천 마크를 만든다 더듬더듬 문을 두드리는 손 같다 갈고리인지

 

- 바디우는 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철학적 미문

 

“춤은 천진난만이며, 이는 춤이 몸 이전의 몸인 까닭이다. 춤은 망각이며, 이는 춤이 자신의 부자유를, 스스로의 무게를 잊은 몸이기 때문이다. 춤은 새로운 시작이며, 이는 충동작이 언제나 스스로의 시작을 만들어내는 것.” 이럴 때의 춤은 놀이이기도 하며 사회적 억압, 불필요하게 무거운 진지함으로부터, 위선에 가득한 예의로부터 몸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시간을 구축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정의로 춤에 대한 헌사를 대신한다.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이것은 춤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정의일 수 있다.”231쪽

 

- 현대시학 2016하반기 신인상, 김유림

:

- K씨 이는 가지런해요 195쪽

 

K씨 이는 가지런해요 물통에 물을 반만 채우면 배까지 출렁거린다던 K씨 유명메이커 할인매장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우는 K씨 이는 가지런해요 주유소 초록색 바닥에 흰 페인트가 흩뿌려져 있는 거예요 외로워, K씨는 가지런해요 편의점 파라솔은 반의 반만 파라솔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밤중의 은행은 ATM 코너 덕분에 빛난다 그렇게 말하면서 K씨 이는 가지런해요 엄마랑 딸 사이 아닌 두 여자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걸어가고 있어요 우리도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좋을 수 있잖아요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소년들 셋이 막다른 골목에서 튀어나오면 나는, 괜히 브라자 안 입은 가슴팍을 긁적거렸어요 K씨는, 그것도 모르고 가지런해요 외로워, K씨는 나랑 걸었으면서 배까지 출렁거린다고 했어요 이제 개가 튀어나오면 나 몰라라 만질 가슴도 바닥났고 듣고 있어요? 철렁, 해도 K씨 이가 가지런해요 나는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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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경기문학 3
배수아 지음 / 테오리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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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



1. 단편소설 2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이하 ‘밀레나’)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험윤이《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읽게 되고, 지원금을 받기 위해 방문한 재단의 여비서와 다시 우연한 만남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영국식 뒷마당」은 집에서 유령 취급을 당하는 할머니의 배다른 여동생 ‘경희’와 열세 살 초등학생 화자 ‘나’가 잠깐의 만남과 대화를 하는 과정을 그린다.



‘밀레나’의 여비서나 ‘영국식 뒷마당’의 경희 모두 소외당한 존재라는 점을 유사하다. 여비서는 사회로부터 경희는 가족으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배척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또한 ‘밀레나’는 3인칭 화자, ‘영국식 뒷마당’은 1인칭 화자가 서술자여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여비서가 고독하지만 두려움 없이 자기 길을 개척해나가는 영화감독 ‘험윤’에게 자기를 영화촬영에 데려가 달라고 메달리는 어둑한 밤의 도피자라면, 경희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는 책을 보며 영국식 뒷마당이라는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소통의 틈을 찾는다. ‘경희’가 꿈꾸는 세계를 정신분열증을 앓는 허상의 세계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나는 현실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읽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뻔하고 평범해 보이는 진실을 다시 상기해 본다. 타인을 매개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여비서의 요청을 험윤은 끝내 거절하지만, ‘경희’에게는 비록 어리지만 ‘나’가 다가가 그의 목소리를 들어준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에 상처받고 상황에 좌절하여 절망에 갇혀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몇 번이나 같은 시험을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한 경험이 있다. 그때마다 숨고 싶고 나를 향한 위로의 말과 시선마저 상처로 느껴졌다. 하지만 또 그때마다 곁엔 내 말을 들어주고 손을 내미는 누군가가 있었다. 문을 열고 현관 밖으로 한 발만 내밀면 분명 나를 위한 길은 있다고 믿는다. 글과 말이 아니라 경험을 믿는다.

* 메모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무개성한 평범함, 여왕으로 추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리 밖으로 쫒아낼 수도 없는 평범함의 힘” 39쪽



“경희는 아무것도 인쇄돼지 않은 페이지들을 읽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거야······.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알아들은 최초의 문장이었다.”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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