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파라다이스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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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1. 나는 법원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현재는 개인회생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채무자가 재산과 소득을 감안한 변제계획안을 내면 법원이 심사해서 인가결정을 한다. 채무자가 계획대로 3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면책을 받는다. 투 파라다이스 1(원제: To Paradise, 이하『파라다이스』, 이후 페이지만 표시)을 읽고 수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채무자들의 목소리와 보이지 않는 얼굴을 생각했다. 주식이나 코인 투자 실패, 카드 빚 등 회생신청 사유도 제각각인데, 돈을 갚아나가는 과정에서 실직하거나 건강이 나빠져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폐지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도 지난한 삶을 견디며 면책 이후의 낙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2. 제목에서 시작하자. 낙원, 천국으로 번역하는 paradise는 정원(garden)을 뜻하는 원시 이란어 paridayjah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에덴동산이 연상된다. ‘낙원을 향하여’ 걸음을 내딛는 사람에게 지금 발 디딘 여기는 무엇일까. 지옥인가, 지옥은 아니라도 꿈꾸던 이상향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파라다이스』에는 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1부(워싱턴 스퀘어)는 1893-94년의 자유주 뉴욕을 배경으로, 제2부(리포-와오-나헬레)는 1993년-94년 뉴욕과 하와이가 무대다. 개별적인 두 작품이지만 이란성 쌍둥이처럼 같은 이름이 여럿 등장하고(데이비드, 찰스, 에드워드 등) 주제 의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제1부「워싱턴 스퀘어」를 보자. 19세기 말 북 아메리카는 자유주, 식민주, 미국, 서부 등으로 나뉘었다. 데이비드 빙엄은 동성애가 허용되는 자유주 뉴욕에 사는 1866년생 남성이다. 빙엄 가(家)의 장남으로 조부 너대니얼 빙엄과 함께 워싱턴 스퀘어라는 저택에 사는데 다섯 살 때 부모가 죽어 조부 손에서 줄곧 자랐다. 고아원의 미술담당 교사로 일하다가 알게 된 음악교사 에드워드 비숍에게 반한 호모 섹슈얼이다. 데이비드가 성인이 된 후 사랑과 결혼의 문제로 관계 맺은 결정적 인물은 에드워드 외에 찰스 그리피스가 있다. 찰스 쪽이 중매결혼, 이성, 아폴론, “빙엄 브러더스의 문장(紋章), 세르바투르 프로미숨(Servatur Promissum), 지킨 약속이라는 문구”(28쪽)라면 에드워드는 자유연애, 정열, 디오니소스, 불확실한 미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유일한 뮤즈다. 스물셋 에드워드는 식민지 출신으로 “다른 곳, 다른 존재에서 왔고”(103쪽) 신분 계급 차이도 분명하다. 에드워드는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 잠적해 버리고 데이비드는 노심초사하며 그를 기다린다.

 

- 1894년 3월 17일 보고서 중

쿡 남매는 함께 두둑한 돈을 모았습니다. 그 돈에다가 추정컨대 에드워드가 외대고모에게 훔친 돈과 가엾은 D씨 부모로부터 받은 돈을 합쳐서, 그들은 서부에서 실크 직물 사업을 시작할 작정입니다. (중략) 필요한 것은 농장을 시작해서 처음 몇 년을 버틸 수 있게 해 줄 마지막 한탕이었죠. 바로 그때인 올해 1월, 에드워드 비숍이 빙엄 씨의 손자를 만난 겁니다. (231쪽)

 

조부에게 도착한 에드워드에 실체에 관한 보고서.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듯하다. 동성애가 처벌받는 서부에서 사업을 벌일 작정이다. 다시 돌아온 에드워드의 변명은 “알고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적어도 완전히는.” (91쪽) 데이비드는 자유주를 떠나 에드워드와 함께 서부의 낙원을 향하여 떠난다.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연인이자 사기꾼으로 의심되는 인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출할 수 없는 억압과 권태로 가득 찬 현실에서 데이비드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이자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가부장(patriarchy)의 지붕 아래서 조부의 바람대로 찰스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면 외적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현실에 대한 영원한 굴복이다. 벽에 있는 얼룩을 종일 망연히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가부장적 남성성의 기준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억압된 분노와 무기력은 두려움을 완벽하게 감추는 은신처이기 때문이다. 퀴어 소설의 외피를 취하지만 어쩌면 이 소설은 가부장적 남성성의 억압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중심을 둔 것 같다. 데이비드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워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찰스 그리피스를 선택할 수 없다. 손톱을 바짝 깎고 신발 끈을 질끈 묶고 문을 열어야 한다. 도드라진 현실의 요철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을 지라도 달려 나가야 한다. 나는 데이비드의 선택을 지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333쪽)이므로, 설사 실패하더라도 꿈에라도 그에게 사랑이 놀러오길 바라며.

 


3. 제2부 「리포-와오-나헬레」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1993년 경 뉴욕이 배경이다. 흥미롭게 제1부에 나왔던 데이비드 빙엄, 찰스 그리피스, 에드워드 비숍 등이 다시 등장한다. 물론 이름만 같고 다른 캐릭터다. 찰스는 오십대 중반 파트너 변호사로, 데이비드는 스물다섯의 법률 보조원으로 둘은 연인관계다. 데이비드는 하와이 오아후 섬의 호놀룰루 출신으로 ‘카위카’로 불린다. 하와이에는 할머니와 아버지 ‘위카’가 여전히 산다. 제2부는 다시 #1과 #2로 나뉘는데, #1에서는 찰스와 데이비드의 관계를 중심으로 #2에서는 아버지 ‘위카’가 아들 ‘카위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1부의 가부장이 너데니얼 빙엄이라면 2부에서는 그 역할을 데이비드의 할머니가 맡았다. 다만 낙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는 데이비드(‘카위카’)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위카’다. 발작증세, 시력 감퇴 등을 앓는 ‘위카’는 요양원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2에서 하와이 왕족인 ‘위카 빙엄’이 동성 연인 에드워드와 “자신의 쓸모라는 판타지”(488쪽)인 ‘리포-와오-나헬레’(Lipo wao nahele)라는 사실상 버려진 땅에서 낙원을 건설하려는 노력이 묘사된다. 또한 ‘위카’와 데이비드의 생모인 앨리스와의 만남과 이별과정, 그로 인한 ‘위카’의 발작, 데이비드가 유년기를 지나 결국 아버지 ‘위카’를 떠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2부가 제1부와 다른 점은 죽음의 그림자가 훨씬 짙다는 것이다. 찰스는 죽음이 예정된 병이 있고(아마도 에이즈), 그의 옛 애인 피터는 다발성 골수증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다. 찰스의 친구들도 상당수 병을 앓거나 죽음에 이르렀다. 요양소에 있는 ‘위카’ 또한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착란 증세도 보인다. 또한 하와이의 독립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 설정을 암시하는 정치적 사안들이 소설 속에 짙게 녹아 있다.

 

데이비드(‘카위카’)는 장애가 있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혼돈스러운 현실의 벽에 저항하거나 부딪혀보지 않고 침묵을 택한 것에 대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낙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온 이성이 가슴에서 발까지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분노를 대면하는 대신 거기서 숨으려고 했다. 하지만 숨는다고 일어나는 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숨어서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결국 발견되는 것뿐이다.” (334쪽) 나는 ‘카위카’의 심정을 이해한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마음을 부끄러워하면, 결국 부끄러움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부끄러운 자가 아니다.

 

 

4. 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 하지만 그가 떠나온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천국이지, 그의 천국은 아니었다. 그의 천국은 다른 곳에 있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그가 찾아야 한다. 사실 그게 바로 그가 평생 배웠던 바, 희망하라고 배운 바 아닌가? 이제 찾을 때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무거운 가방을 손에 든 채 이곳에 잠시 서 있다가 심호흡을 한 뒤 첫발을 내디딜 것이다. 그의 첫 발걸음을. 새로운 인생을 향하여- 낙원을 향하여. (267쪽, 밑줄은 인용자)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어, 늦지 않았어, 결국 늦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걷기 시작할 거야-어머니 집이 아니라, 리포-와오-나헬레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네가 가 있길 바라는 그곳을 향해서. 난 멈추지 않을 테고, 쉴 필요도 없을 거야. 거기, 네가 있는 곳에 다다를 때까지, 낙원을 향하여. (530쪽)

 

제1부, 제2부의 끝부분이다. 데이비드와 ‘위카’의 낙원을 향한 다짐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이다. 이청준의 소설『당신들의 천국』이 생각났다. 소록도 원생들을 동원해 바다 간척사업을 해서 나병 환자들의 낙토를 만들어주겠다는 조백헌 원장의 약속에는 원생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이 빠져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이다. 그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그건 ‘당신들의 천국’이지 ‘우리들의 천국’은 아니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와 ‘위카’는 낙원에 도착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의 사기적인 유혹과 정신병을 앓는 ‘위카’의 신체적 능력을 볼 때 성공을 장담하기는 힘들다. 무모하고 무용한 결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낙원도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의 바람과 욕구대로 행동하고 만족을 얻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옳지 않았다고 해도, 애초에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결과에 관계없이 바람직한 것이다.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누리는 삶만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무덤을 열고 우리들의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족) 제2부의 시간적 배경인 1994년에는 장동건 주연의『마지막 승부』,『우리들의 천국』과 이병헌 주연의 『내일은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마지막 승부』의 OST였던 장현철의「걸어서 하늘까지」를 흥얼거리며 이 글을 썼다.

 

“어둔 미로 속을 헤매던 과거에는/ 내가 살아가는 그 이유 몰랐지만/ 하루를 살 수 있었던 건/ 네가 있다는 그것/ 너에게 모두 주고 싶어/ 너를 위하여/ 마지막 그 하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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