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콤한 감각 문학과지성 시인선 282
배용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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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된 사진관

 

 

세상에 잘못 인화된 장면이 나뿐이겠는가

버려진 사진처럼 바람에 떠돌다 내려진

소읍의 정류장 골목에

내 나이만큼 오래된 사진관이 걸려 있다

내부로 들어서자 창에 반사된 흑백사진 속에서

주인인 듯한 노인이 돌아본다

느릿느릿 사진첩을 펼치며 어색한 복고풍의 미소를 짓는다

플래시를 터뜨리던 나날들,

초점을 맞추지 못해 망쳐버린 때도 많았지만

세울은 절망할 여유도 없이 섬광처럼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빛바랜 시간들이 버려지는 세월 속,

밤은 몇 개의 풍경을 보관하고 있는지

날마다 똑같은 태양만 떠올랐다

누추한 기억의 암실,

벌써 이생의 장면을 다 진열해버린 노인은

얼마나 빛나는 날들을 안고 後生(후생)으로 건너갈 것인가

또 내 전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순간들을 인화하고 있는가

너무 많은 무덤을 짓는 지구의 평면 위,

젊은 그가 늙은 얼굴을 향해 웃음을 짓는

사진첩을 넘기며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장면을 뒤적거린다

이빨을 드러낸 광기의 포즈가

아직은 내 일생의 렌즈를 통해 발광하고 있다

더 이상 방문할 풍경이 없는 노인은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창밖을 힐끗거린다

희미하게 인화된 추억만 노인의 남은 액자에 끼워진다

세상의 저녁이 창에 걸린다

 

 

배용제, 『이 달콤한 감각』中

 

 

+) 시인은 말하는 "나와 관계된 것들"은 "나와 영혼 사이에 낀 모든 이야기"이며 "결국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주의 풍경과 환각과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먼 너에게 이르는 그때까지" 접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다.([시인의 말])

 

시인은 공감각적 이미지와 상징들을 접목하여 생의 무게를 관찰하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 상처이든, 개인적 시련이든 시인에게 있어서는 생성과 소멸의 궁극적 원인이 된다. 다시 생성하여 무거워진 생이 아니라, 애초부터 고정되어있던 무게감이 화자의 의식을 통해서 체화된 것이다. "어떤 땐 고통이나 불행조차 성급하게 집어삼"키며, "굶주린 무게를 흡수"한 화자는 "수십 년 부풀어왔던 거대한 살점의 무게가 순한 / 바탕이 되어" 자신을 비롯한 생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온몸으로 느끼는 그 무게감을 털어내고자 그는 비워냄(空)의 진리를 기웃거린다. 하지만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고 믿는 / 보편적인 사람들의 종교를 나는 믿는다"며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환생의 사원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한다.([노을]) 그것은 소멸에 대한 부정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너'를 만나러 가는 사이, 그를 둘러싼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화(氣化)하는 것이다.

 

"쏟아지면 금세 증발해버리고 / 사소한 흔적도 남지 않는 울음,"을 "발효시킨 일생의 용도"([발효된 울음에 대하여])는 시인에게 "가장 편하고 고요한 무게가 된다."([물끄러미]) 그것은 이 시집에 종종 등장하는 "한 방울", "줄줄 쏟아진다", "흘러 다니다", "울음" 등의 액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울음으로 상징되는 고통이 현실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기화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시인은 '검은' 색감(어둠, 검은 빛, 검게 그을린, 검은 잿더미 등등)에 집착하는데 그것은 화자의 불안한 심리를 도출한다. "세상의 역사와는 너무도 무관하게" 살고 있는 화자, 그는 블랙홀에 빠져들어도, 응급실에 실려가도, 꼭대기에서 추락해도, 한줄기 '별빛'이 그에게 있다. 미래에 대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연민이고, 꿈에 대한 희망이기도 한 그 빛은 결국 "제 몫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생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세상과의 거리를 좁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또 다른 나를 복사해낸다.([저 별빛])

 

이처럼 기화의 법칙은 그로 하여금 생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환생 혹은 윤회, 그러니까 결코 끝나지 않는 순환으로 만든다. 따라서 시인에게 '죽음'은 암울하고 슬픈 것만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죽음은 의식이 잠시 멈춘 상태이다. '잠', '꿈' 처럼 화자가 잠시 의식을 놓고, 무의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는 쾌락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제시한 많은 죽음의 상징은 "무수한 죽음을 안고 사는", "더 많은 죽음들이 들어찰수록 오래 사는", "완전한" 점치는 여자에게서 극대화된다.([점치는 여자 1]) 꿈 속에 애욕과 부패와 꿈과 희망이 한꺼번에 흘러 다니듯, 얽히고 설킨 관계의 혼란 속에서도 점치는 여자는 "온 힘을 다해 몸을 흔들"며 생의 "무게를 털어낸다." "태양이 끝없이 돌려대는 원형의 바퀴에 매달린 채 / 여러 생을 오락가락하며 정신을 놓는다." ([점치는 여자 4]) 즉, 죽음은 여러 목숨이자 꿈이고, 애욕이며 부패고, 쾌락이며 고통이다. 원형의 바퀴처럼 순환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시인의 "달콤한 감각"은 나와 너 사이, 죽음을 향한 길 위에서, 흘러가다 증발해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감각의 기화로 형상화된다. 순환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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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김기연 옮김 / 새날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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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p.11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는 모든 계급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그 밖의 계급은 대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소멸되고 몰락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의 가장 고유한 산물이다.

 중간 계급, 즉 소생산자, 소상인, 수공업자, 농민 등이 부르주아지와 투쟁하는 것은, 모두 중간 계급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가 몰락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반동적이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혁명적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몰락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이며, 그들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프로레타리아트의 위치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p.35

 

『선언』을 일관하는 근본 사상은 이것이다. 즉 역사성 어떤 시대에도 그 경제적 생산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사회 구조가 이 시대의 정치사와 지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따라서 (태고의 토지 공유제가 해체된 이래로)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간의 투쟁의 역사라는 사실, 이제 이 투쟁은 동시에 전 사회를 착취, 억압, 계급 투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지 않고서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근본 사상은 오로지 마르크스 혼자만의 것이다.

                                         pp.103~104 (1883년 독일어판 서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中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된 이 글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마무리된다. 마르크스는 어떤 사회에서도 계급 투쟁의 역사는  계속된다고 생각한다. 이 계급관계를 타파해야 평등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등장한 이후로 사회는 돈과 자본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생계 유지에 필요한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따라서 부르주아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사적재산이 사라져야 계급으로 존재하는 인간 사이의 차별이 파괴된다고 그는 파악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주요한 정책이다. [공산주의의 원리]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새로운 사회 질서는 서로 경쟁하는 각 개인들의 수중에서 모든 생산 부문과 공업의 운영을 탈취할 것이다. 그대신 이들 모든 사업 부문을 사회 전체를 위해, 즉 사회 계획에 따라 그리고 모든 사회 성원의 참여 아래에서 운영할 것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사회 질서는 경쟁을 폐지하고 협동체를 건설할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사적 소유 또한 폐지되어야만 할 것이고, 그 대신에 모든 생산 도구의 공동 사용, 공동 합의에 의한 모든 생산물의 분배, 즉 이른바 재산 공유가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사적 소유의 폐지를 위해 평화스러운 방법을 고려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행동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방어"하겠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이러한 생각은 세계 혁명, 즉 세계를 무대로 혁명을 꿈꾸는 것에 이르게 된다.

 

나는 이 글이 어느 한 시대나, 한 국가에 머무를 수 없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글은 단호하며 논리적인 문체로 쓰여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끝이 단단하게 뭉치도록 조율한다. (특히 부르주아지가 이뤄낸 업적들에 대해 차근차근 언급하며, 추후 그들과 프롤레타리아트 관계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부분은 탁월하다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마르크스는 마지막으로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함께 혁명을 꿈꿀 것을 선동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그러한 것들이 바탕이 되어, 그들의 사상이 지금 언급되는 세계화나 전지구적 태도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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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그밖의 것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오늘의책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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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료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한 말을 들었다면 러셀도 분명 공감을 표했을 것이다.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

                                                                                     p.8

 

 통제할 수 없는 분노는 일종의 심리적 탈선이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사악함의 징후가 아니라 질병의 징후이다.

                                                                             pp.57~58

 

 청년들이 품을 수 있는 최선의 희망은, 모든 개개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길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분위기, 따라서 그들의 자부심이 질투에서 비롯되는 조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분위기에서 사는 것이다.

 청년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훈이다. 더 적게 기대하면, 정말 당신이 기대하는정도만 얻게 되기 쉽다.

                                                                                    p.91

 

 불행 가운데 진정으로 보람된 불행이 딱 하나 있으니, 좋은 것을 상상만 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행이 바로 그것이다.

                                                                                  p.169

 

 우리 시대가 앞선 시대들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어린 세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짓에 대한 혐오감이다.

                                                                                  p.176

 

 불유쾌한 진실들을 알지 못하도록 차단시켜주는 습관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어른들은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른들 자신이 솔직한 것을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채택되는 것뿐이다.

  현대교육의 가장 나쁜 결점 중 하나는 현실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p.212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그저 전통만 고수하는 것이 지혜는 아니라는 것을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될 것이다. 열정 대신에 지성이 경제를 이끌도록 만들어주면 그 즉시 우리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성보다 열정을 따르는 것이 더 즐겁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대한 벌이 굶주림이라면 결국에는 그들도 합리적인 방향을 따르게 될 것이다.

                                                                                  p.275

 

 

버트런드 러셀, 『인간과 그 밖의 것들』 中

 

 

+)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를 읽으면서 그가 스승으로 만난 사람이 '러셀'이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가 권해준 러셀의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위트와 풍자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것 뿐만 아니라 고집까지 발견할 수 있다.

 

    읽다보면 풋,하고 웃음이 터지기도 하는데, 괴짜같은 그의 발상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현실을 메마르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씁쓸함을 느꼈지만, 그만큼 객관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인간'에 중심을 두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감성에 좌우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로맹가리의 소설을 떠올렸다면 무리일까. 어쩐지 로맹가리와 러셀은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시선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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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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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자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中

 

 

+) "고백하건대 시는 내게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라고 시인은 말했다. 현기증이라.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처음 그 문장을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게 시는 어떤 것일까.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나는 아직 그 질문에 스스로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평생 함께해야 할 존래라는 생각 밖에.

 

그의 시에서는 "바람"이 떠돈다. 아니,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시어와 시어 사이에서 바람이 흐른다. 물론 그렇다고 틈이 많은 것은 아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사유들 사이에서 "자유"와 "꿈"을 소망하는 "영혼(귀신)"들이 "날아다닌"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시간"속에서 "자신의 경계를 고민"한다.([맨홀]) 바로 그 시공간 사이에서 끝없이 바람이 불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은 그에게 단순히 유년의 모습이 아니다. 과거 혹은 기억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계속 움직이는 "시간"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과 삶의 테두리에서 방황하는 존재에게 차분하게 그러나 계속해서 활동하는 '시간성'을 부여한다. 자아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시간'은 살아서 움직인다.

 

어쩌면 그 끈기있는 시간의 역동성 때문에 이 시집에서 '촘촘하게 얽힌' 힘이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그 빡빡한 삶의 자세가 여유로움을 앗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생의 마지막 리듬인 자신의 맥박"([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에요])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음악과 자신을 교차시키며, 비워내야 할 순간들을 버리고 채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 시집에는 사람이 그립다라는 말이 없지만, 절실하게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의 애틋함에 가슴이 저린다. 매우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그것이 사람이든, 삶이든, 기억이든, 시간이든) 손대기 아까울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이 시집에서 묻어나는 사람에 대한 그의 흔적과 관심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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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7-09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 손대기 아까울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참 소중한 문장이네요. 이 시집의 느낌이 이런거군요.

우비소녀 2007-07-10 09:43   좋아요 0 | URL
소중한 문장이라.. ^^ 고맙습니다. 한 글자, 한 문장이 마음이 쓰이던터였는데. 잉크서재님 덕분에 편안해지네요. 김경주의 시집은 묘한 매력이 있어요. 시간을 움직이는 힘이랄까?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문학동네 시집 93
조동범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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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남극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배낭을 꾸린다. 창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당신은 소풍을 떠나려 한다. 배낭 안에 바나나 따위는 없다. 동물원으로 가는 길, 위로 비구름 지나간다. 당신은 배낭을 메고 소풍을 간다. 우산도 없이, 폭풍을 뚫고 가는 소풍. 이 길이 끝나면 비 그치려나. 신발 안의 빗물이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비에 젖어, 당신은

 나침반을 꺼낸다. 나침반의 바늘은 고집스럽게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바늘의 끝을 따라가면 빙산을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은 비를 맞으며 동물원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펭귄을 만나리라.

 동물원의 펭귄, 물 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비에 젖은 당신, 유빙처럼 살아온 삶이었느냐고, 남극을 잊었느냐고 펭귄에게 묻는다. 펭귄은, 극점에 담겨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두 눈 가득 남극을 담고

 

 

조동범,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中

 

 

+)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시어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그가 죽음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이면이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하나의 '길'이다.

 

화자 앞에 놓여 있는 길은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화자는 끝없이 뒤를 돌아보는데("남자는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청기와 주유소]) 그것은 "아직도 하늘을 배회하"며 "망설"이는 "종이비행기"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는 길 위에서 걸어가고, 멈추고를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반성과 후회 사이에서 멈칫거리는 그의 단면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방향상실을 몰고 온다. "도심"의 한 가운데서 길을 바라보는 "그"의 앞에 "아득히 휘어진 길"이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그 "길의 끝이 안개에 잠긴"채 막막한 풍경을 드러낸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손바닥에"서 "갈 곳을 잃은 손금만이 수없이 많은 길을 내"는 것처럼,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도심에서 화자는 갈 곳을 잃은 채 수없이 많은 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마술을 파는 심야])

 

끝없이 언급되는 "죽음", "눈(눈동자, 눈망울)", "속도", "식욕(허기, 배고픔)"은 길에서 발견하는 시적자아의 존재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조망하며,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눈망울에서 자신과 타자를 발견하고, 육체 혹은 물체가 움직이는 순간들에서 삶을 경험하고, "냉장고"에서 "식욕의 흔적을 더듬"으며([냉장고]) 살아있음과 죽음의 경계를 오고간다. 그 모든 것들이 자아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순간순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집은 거기서 멈추고만다. 그 이상을 나아가질 못한다. 모든 것을 길 위에서 하나로 모으고 있을 뿐, 역동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지 못한다.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시를 쓰는 시인의 글쓰기 방식은 존중하나, 그로인해 주제가 한정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소재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단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소재의 반복은 주제의 일관성을 단순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에게 다른 색깔의 시를 요구한다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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