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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ㅣ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자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中
+) "고백하건대 시는 내게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라고 시인은 말했다. 현기증이라.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처음 그 문장을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게 시는 어떤 것일까.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나는 아직 그 질문에 스스로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평생 함께해야 할 존래라는 생각 밖에.
그의 시에서는 "바람"이 떠돈다. 아니,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시어와 시어 사이에서 바람이 흐른다. 물론 그렇다고 틈이 많은 것은 아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사유들 사이에서 "자유"와 "꿈"을 소망하는 "영혼(귀신)"들이 "날아다닌"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시간"속에서 "자신의 경계를 고민"한다.([맨홀]) 바로 그 시공간 사이에서 끝없이 바람이 불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은 그에게 단순히 유년의 모습이 아니다. 과거 혹은 기억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계속 움직이는 "시간"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과 삶의 테두리에서 방황하는 존재에게 차분하게 그러나 계속해서 활동하는 '시간성'을 부여한다. 자아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시간'은 살아서 움직인다.
어쩌면 그 끈기있는 시간의 역동성 때문에 이 시집에서 '촘촘하게 얽힌' 힘이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그 빡빡한 삶의 자세가 여유로움을 앗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생의 마지막 리듬인 자신의 맥박"([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에요])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음악과 자신을 교차시키며, 비워내야 할 순간들을 버리고 채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 시집에는 사람이 그립다라는 말이 없지만, 절실하게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의 애틋함에 가슴이 저린다. 매우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그것이 사람이든, 삶이든, 기억이든, 시간이든) 손대기 아까울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이 시집에서 묻어나는 사람에 대한 그의 흔적과 관심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