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문학동네 시집 93
조동범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그리운 남극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배낭을 꾸린다. 창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당신은 소풍을 떠나려 한다. 배낭 안에 바나나 따위는 없다. 동물원으로 가는 길, 위로 비구름 지나간다. 당신은 배낭을 메고 소풍을 간다. 우산도 없이, 폭풍을 뚫고 가는 소풍. 이 길이 끝나면 비 그치려나. 신발 안의 빗물이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비에 젖어, 당신은

 나침반을 꺼낸다. 나침반의 바늘은 고집스럽게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바늘의 끝을 따라가면 빙산을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은 비를 맞으며 동물원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펭귄을 만나리라.

 동물원의 펭귄, 물 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비에 젖은 당신, 유빙처럼 살아온 삶이었느냐고, 남극을 잊었느냐고 펭귄에게 묻는다. 펭귄은, 극점에 담겨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두 눈 가득 남극을 담고

 

 

조동범,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中

 

 

+)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시어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그가 죽음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이면이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하나의 '길'이다.

 

화자 앞에 놓여 있는 길은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화자는 끝없이 뒤를 돌아보는데("남자는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청기와 주유소]) 그것은 "아직도 하늘을 배회하"며 "망설"이는 "종이비행기"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는 길 위에서 걸어가고, 멈추고를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반성과 후회 사이에서 멈칫거리는 그의 단면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방향상실을 몰고 온다. "도심"의 한 가운데서 길을 바라보는 "그"의 앞에 "아득히 휘어진 길"이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그 "길의 끝이 안개에 잠긴"채 막막한 풍경을 드러낸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손바닥에"서 "갈 곳을 잃은 손금만이 수없이 많은 길을 내"는 것처럼,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도심에서 화자는 갈 곳을 잃은 채 수없이 많은 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마술을 파는 심야])

 

끝없이 언급되는 "죽음", "눈(눈동자, 눈망울)", "속도", "식욕(허기, 배고픔)"은 길에서 발견하는 시적자아의 존재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조망하며,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눈망울에서 자신과 타자를 발견하고, 육체 혹은 물체가 움직이는 순간들에서 삶을 경험하고, "냉장고"에서 "식욕의 흔적을 더듬"으며([냉장고]) 살아있음과 죽음의 경계를 오고간다. 그 모든 것들이 자아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순간순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집은 거기서 멈추고만다. 그 이상을 나아가질 못한다. 모든 것을 길 위에서 하나로 모으고 있을 뿐, 역동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지 못한다.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시를 쓰는 시인의 글쓰기 방식은 존중하나, 그로인해 주제가 한정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소재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단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소재의 반복은 주제의 일관성을 단순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에게 다른 색깔의 시를 요구한다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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