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창비시선 167
이경림 지음 / 창비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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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삶이

이 경 림


절망이라고 치욕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만
말할 수 있어도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순하게 시름처럼 아득하게
깊어질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천천히 해가 뜨고 시름처럼
하염없이 늙어가는 나무 아래선
펄펄 끓는 치욕을 퍼먹어도 좋으리
노란 평상 위에서 온갖 웬수들 다 모여
숟가락 부딪치며 밥 먹어도 좋으리
그때 머리 위로는 한때 狂暴했던 바람이
넓적한 그림자를 흔들며 가도 좋으리
시름처럼 수굿한 구름이 나무 꼭대기에서
집적대고 좋으리

그래
끝이라고 문 닫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따뜻하게
시름처럼 축축하게 한시절
뒹굴뒹굴 보낸다면 얼마나 좋으리
시름의 방 속에서 어른거리는 것들의
그림자를 보는 일도 좋으리
문밖에서 휙 지나가는 도둑고양이 같은 시름들
못 본 척하는 일도 좋으리
풀섶에서 눈 번득이는 작은 짐승처럼
그저 고요히 두근거리는 일도 좋으리

그 또한 시름 같은 것-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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