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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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13살의 오니시 아오이. 나는 학생이면서 또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창 여리디여리고, 예쁠 중학생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바로 '살인자'라는 것.
'그래, 난 살인자야.'
오니시 아오이는 능력 없는 새아빠와 하루종일 일에 치여 한창 예쁨받아야 할 딸에게 관심조차 없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도 힘들겠지만, 나도 나름 힘들게 살고 있어.' 한창 불만이 많을 나이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아오이는 참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친구들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 생활을 하는, 의젓한 아이이기도 했다. 그런 아오이에게 어느날 미야노시타 시즈카라는 아이가 찾아온다. 

시즈카와 아오이.
불행한 소녀들 둘이 만났다. 그 불행이 시너지 효과를 냈을까.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그것이 꼭 족쇠처럼 그 소녀들을 구속시키고 말았다.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만이 있었을 뿐인데.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소녀들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은 결말 부분에서 제대로 드러나기도 하니. 


매미 소리가 들렸다.
그 덥던 여름날의 오후.
새아빠가 주먹을 치켜들고, 나를 때려던 그 순간…….
미친 듯이 매미가 울고 있었다. 여름의 끝 무렵이었다. 그날까지 난 평범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날, 새아빠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정지했던 그 순간처럼…….
시즈카가 쥐고 있는 칼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가랑눈, 저녁노을, 칠이 벗겨진 철판 벽. 온통 잿빛 세상에서 오직 칼만이 선명하고 불길한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13살의 봄. 그해를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아직 어린 사람을 뺀다면).

그 화창하고도 젊은 화려한 시기를 당사자들은 알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시기, 사춘기라는 커다란 열병을 이때부터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아마 저자는 이런 '사춘기'의 열병을 '살인'이라는 무섭고도 무서운 소재를 이용해 설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조금 잔인하긴 하지만 어쩌면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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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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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기본적으로 '추리 소설'이라 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예상치도 못한 반전을 선물한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추리 소설을 읽을 때 범인이 '누군가'를 짐작하고 추리하면서 자신이 '탐정'이 된다는 일종의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비코 다케마루의 1992년작 『살육에 이르는 병』은 반전 중에서도 최고의 반전을 선물한다. 오죽하면 뒤표지에는 '충격적인 결말을 확인한 순간,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써놓았을까. 사실 읽는 내내 나는 절대로 앞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다짐을 하면서 두 눈 부릅뜨고 읽었으나, 결국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가슴아픈 현실 =_=;; 

가모우 미노루. 그는 어딘가 아픔을 지닌 여성들을 대상으로 무참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다. 그것이 너무나 잔인하여 때로는 읽고 있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다. 하지만 죽이는 이유도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 그가 그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안타까울 만큼, 잔인하고 또 잔인했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어머니 마사코. 설마 내 아들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어. 내 아이는 착한 걸. 하지만 진실이 드러날수록 무너지는 속도는 신뢰와 비례한다.
그리고 애틋한 한 여성을 살인마에게 잃어버린 전직 형사 히구치, 이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 눈에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나 충격, 범인에 대한 분노, 경찰에 대한 울분 같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게 뭔지 순식간에 간파했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감정이 자기 내부에도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에 비치는 표정을 보아 그녀도 히구치의 눈에서 그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오루는 필사적으로 히구치를 - 그리고 서로가 안고 있는 무게를 - 외면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으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현대사회는 갈수록 황폐해져가는 사회문제로 인해 사람들의 '정신병'을 키워나가고 있다. 서로에게 벽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소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희열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간 실제로 벌어져왔던 잔인한 사건들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저자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그보다 더한 작가의 노력이 이 책을 뒤덮고 있다.

작가가 보이는 엄청난 트릭으로, 배신감에 부르르 떨고 싶다면 당장 책장을 넘겨보시길, 읽는 이가 누구든 책을 1페이지로 다시 돌아가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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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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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나'만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휴직을 취하고 있던 혼마 슌스케. 그런 그에게 인연을 끊다시피 살고 있던 처의 조카 구리자카 가즈야가 찾아온다. 자신의 약혼녀였던 '세키네 쇼코'가 사라졌다는 것! 결혼을 준비하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해 신용카드를 만들라고 권유했던 가즈야는 그녀가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즈음,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자초지종도 모르고 무작정 사라져버린 약혼자를 어찌할 바 모르던 가즈야는 그간 소원하게 지냈던 혼마 슌스케에게 손을 내민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을 시작하게 된 슌스케. 하지만 단순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뭔가 이상하게 꼬여가기 시작한다.
 

현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된 신용카드. 사회는 신용 카드의 사용을 장려하고 대책 없이 진행되던 정부의 정책에 '신용 불량자'라는 딱지를 다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것은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TV를 틀면 끊임없이 나오는 대출 광고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1992년도에 쓰여졌음에도 지금의 시대와 전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일본과의 시대 격차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사회 자본주의의 모습을 잘 담아낸 미야베 미유키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이 작품이 저자의 최고작이라 평가되며 그녀의 작품들이 『화차』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돈도 없고, 학력도 없고, 별다른 능력도 없고, 얼굴도 그걸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도 별로 였고 삼류 이하의 회사에서 잡무만 보고 있었죠. 그런 사람이 마음속에서는 텔레비전이나 잡지, 소설에서 보고 들은 화려한 생활을 꿈꾸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냥 꿈만 꾸는 걸로 만족하든지, 그게 싫으면 어떻게 해서든 꿈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해 보든지 했겠지요.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나쁜 길로 빠져든 사람도 있을 거예요. 옛날에는 아주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쨌든 간에 자력으로 꿈을 이루든가 현 상태에서 포기하든가 둘 중에 하나였잖아요?"

 
화차火車 -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

 
혼마의 추적으로 그녀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행복하고 싶었다는,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누리고 싶었다는 작은 소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실종에는 개인파산이라는 어두운 이면이 있었다. 그래,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몰고 간 화차 위에 올라탄 것이었다.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신용카드, 할부, 대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무서우며,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무참히 짓밟아버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 『화차』.
"걱정 마세요. 나에게 힘을 주는 카드가 있으니까요."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예전의 한 카드 광고 카피가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사실 그 '힘'이 빚이라는 걸 아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일이리라. 쓴웃음이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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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1 밀리언셀러 클럽 6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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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모여 만들어낸 살인사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선택했던 겐지와의 결혼생활. 하지만 그는 결혼 후에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성실하다는 이유로 선택했는데. 야요이는 다른 여자에게 목을 매고, 생활비를 전혀 가져다주지 않고 구타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겐지에게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겐지가 구타를 당한 듯 힘없이 집안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불현듯 야요이의 머릿속에 맴도는 끊임없는 살의. 그래, 죽여버리자. 이 따위 인간, 내 삶에서 몰아내는 거야. 

가토리 마사코. 43살. 고등학교를 퇴학당한 자식 하나와 3년 전부터 관계가 소원해진 남편과 같이 살고 있다. 하지만 어느 구석 하나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야간업무로 하는 '도시락' 공장이 오히려 집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 야요이, 요시에, 구니코. 의젓한 마사코에게 그녀들은 하나같이 의지하고……. 그러던 그녀에게 야요이가 급하게 전화해온다. "나, 그 사람을 죽이고 말았어."
그런 마사코는 아무런 이유 없이, 해결하겠다며 발 벗고 나선다. 그렇게 얽히게 되는 그녀의 관계들. 하지만 마사코는 자신이 선택하고 실행한 일을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잘못. 하지만 지금은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어.
 

마사코는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야요이가 원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 자기 탓일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을 동료들에게 사죄할 마음도, 자신이 후회하는 마음도 추호도 없었다. 보이는 출구가 막히려 하고 있다는 것만을 생각했다. 지금은 그곳을 돌파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그 결심을 동료들에게 얘기해봤자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것은 뻔했다. 마사코도 동료를 바라지는 않는다.
마사코는 힘줄이 불거진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윽고 그것이 유일한 온기인 양 얼굴을 덮었다. 자신밖에 믿지 않는다. 자신뿐이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 OUT 

현대의 암흑 속에 기괴하게 일그러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날카롭게 그려내는 기리노 나쓰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아웃』 속에는 세상의 비주류인 여성들이 '도시락 공장'이라는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끊임없이 잘살고 싶다는, 자신다움을 되찾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욕망들이 야요이의 남편 살해사건으로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헤어나올 수 없는 블랙홀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정말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실험하듯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녀들.
 

"외톨이군요."
"그러네. 옛날에는 세 가족이서 사이가 좋았는데 말이야. 누구 한 사람이 나빴던 건 아닌데 어느새 무너지기 시작했어. 하지만 정말로 망가뜨린 건 나라고 생각해."
"어째서?"
"혼자서 나가버리니까.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가즈오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다미에 뚝뚝 눈물이 떨어진다.
"혼자가 되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탈출. 무엇에서 탈출해서 어디로 가려 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결국 마사코는 꼬이고 꼬인 현실에서 벗어나 OUT이라는 이상향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다. 일상에 짓눌려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마사코. 그녀가 떠났던 OUT이라는 세계는 그녀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것인가.
사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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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츠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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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혼란 속 사춘기 소년의 몸부림!


외톨이 소년 우지이에 도오루. 그에게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친구, 히카루가 있다. 도오루는 자신의 분신 같은 히카루라는 존재를 통해 다른 친구와 나눌 수 없는 것을 공유하게 된다. 그의 실체에 대해 주위에 이야기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도오루를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뿐이었다. 하지만 히카루는 도오루라면 감히 하지 못할 과감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데,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그만 지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가 없으면 허전한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함께 있어왔던 탓이 아닐까.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소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시라토 유키.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인식하는 소녀지만,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마음을 갖고 태어난 것에 대한 반항으로 (남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입학한 고등학교에) 치마를 입고 등교한다.

 
─너를 추궁할 생각은 없지만 히카루와 후 짱은 분명히 달라. 후 짱은 영혼이거든. 하지만 히카루는 너 자신이야. 단지 네가 분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 잘 생각해봐. 히카루의 행동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 히카루는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너도 그런 식으로 마음껏 네 의견을 밝히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걸?
─그렇지 않아. 다 틀린 소리야.
─뭔가 욕을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없을 때, 너를 대신해서 히카루가 말해주지 않아? 
 
 

회색빛 세계에서 피어난 희망의 빛
 

히카루에 의해 알게 된 딱딱한 콘크리트로 뒤덮인 회색 도시. 세상 곳곳에서 평화의 빛을 잡아먹고 인간의 마음에 불안을 심어놓는 회색빛이 무한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회색 도시의 한 중학교에서 여학생이 유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소녀는 결국 변사체로 발견되고, 범인은 오리무중 상태. 그후 3년이 흐르고 같은 사건이 발생한다.
도오루는 그 학교를 다니는 남학생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살해된 여학생의 혼이 떠돌고, 도오루는 그 사건의 한가운데로 휘말리게 된다. 
 

─이 소각로는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한 출구야, 도오루. 네가 갈 마음만 먹으면 이곳을 지나 또 하나의 세계에 갈 수 있어. 어둠 속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있어. 갈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인지도 몰라. 이 구멍으로 내다보이는 세계는 지금까지 네가 있었던 장소. 그곳은 대개 늘 빛이 지배하고 있지. 하지만 밤이 되면 소각로의 문이 열리고 여기서 어둠이 일제히 뛰쳐나가 빛을 몰아내. 모두들 밤이면 잠을 자는 건 어둠 때문이야. 하지만 아침이면 빛의 원군이 찾아와 소각로의 문을 닫아버려. 그러면 어둠은 뿔뿔이 흩어지고 지워져, 빛과 어둠은 그렇게 하루라는 것을 만들었어. 인간은 빛이 있는 동안은 깨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빛이 사라지면 다시금 빛이 돌아올 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돼. 회색은 저녁때, 약해진 인간을 노려……. 

 

회색빛 지옥 속에서 희망의 끈을 잃지 않았던 도오루, 그것은 자신을 믿고 힘을 주었던 시라토의 존재였다. 회색이라는 어둠에서 햇빛과 같은 한줄기 희망이 소년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시라토가 자신이 남자라고 믿고 있어도 그것은 도오루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무서운 사건이 지나고 도오루와 시라토는 한층 더 자라게 된다. 세상에는 초록빛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는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속,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소년의 아슬아슬한 사건을 간접경험하고 나서 손에 땀이 흥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내가 그 속에 들어가 겪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흡입력과 긴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역자 또한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서 '참으로 어려운 번역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역자의 말에 백배 공감하는 것은 도오루와 시라토의 마음의 고뇌를 글로 옮기는 일 자체가 굉장히 고난의 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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