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만화 한편 열 소설/논문 안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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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시옷-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손문상.오영진.유승하.이애림.장차현실.정훈이.최규석.홍윤표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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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세상과 이어진 작은 징검다리
파마헤드
홍승우 외 지음 / 행복한만화가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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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주류들의 요란법썩 총천연색 뒤집기 한판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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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2. 설명이 필요있나?
맨발의 겐 1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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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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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남한산성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우울한 가운데 더욱 우울한 영화를 보고 우울의 끝을 경험하면 그것이 해소되듯, 근래에 겪고 있는 개인적인 막막함을 그것을 가장 잘 다루는 그의 소설을 통해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소설가들 중에 막막함 - 혹은 먹먹함 - 을 가장 멋지게 그리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김훈을 딱히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제법 그의 책들을 읽었다.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과 이상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화장>을 읽고 나서 이것이 네 번째 책이니, 공교롭게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소진의 책보다도 그의 책을 많이 읽은 셈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그의 소설을 읽은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참고로 나는 자전거 여행 첫 번째 권을 읽을 때까지,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책을 펼치고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책이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저자의 일러둠이다. 이것은 옳지만 그르다. 물론 ‘이 소설’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실’이 아니기에 소설이지만, 이 책은 세상에 대한 김훈식의 정치적 발언이기에 또한 소설이 아니다. 전직 파리의 택시운전사는 이 소설에서 FTA를 보지 않는다 하였지만(사실 나는 이것이 마음 넓은 좌파의 인사치례라 생각한다), 난 이 소설에서 그것을 보았다. 내세움은 당김을 부르는 법이며, 나는 김훈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조사助詞 하나에 대한 그의 철두철미함만큼이나, 자신의 밥벌이 전략의 완벽함에 대한 김훈의 욕망은 넓고도 깊다. 욕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니, 그 또한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장은 아름답다. <칼의 노래>에 취해 그의 팬이 되어 버린 친구는 언어의 농도가 이전만 못하다 하였지만, <칼의 노래>와 <자전거 여행>의 가운데 즈음에 위치한 그의 문체는 인간의 비극과 자연의 무심함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더구나 철학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로 옮긴 듯한, 아니, 철학으로부터 문학의 언어를 되찾아 온 것 같은 그의 문장들은 어렵지 않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진리를 빛에 드러낸다. 예컨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 사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책값은 한다, 라고 생각했다.(물론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실질적 동기는, 아버지께서 몹시 읽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지만)   


문장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그의 현실인식은 명확했다. 소설은 척화斥和와 주화主和의 대립으로 시작하나, 양측의 가치를 물리적 현실 앞에 무릎 꿇게 하며, 무상한 표정으로 결국은 주화의 손을 들어준다. 이것은 김훈 식 현실주의의 명확한 결론이다. 나는 그저 <칼의 노래>에서 그러하였듯 막막함과 그것 아래의 무참함을 기대했지만, 김훈은 더욱 나아간다. 모든 것이 혼재된 듯 보이지만, 그는 선택지를 마련하며, 그것들의 가치를 판단한다. 명분을 택했던 이들은 탈출하였거나, 이중적이었거나, 매우 소수만 자발적으로 죽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명확하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의 현실인식이 재빠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광해군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도 있고, 사대부의 명분론과 당파싸움의 한계를 애통해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에 김훈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과거의 ‘명분’은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겪으며 ‘싸그리’ 어딘가로 팔아먹은(혹은 그것을 담지하고 있던 이들이 합방 전후에 의병으로 죽고, 독립운동하다 죽고, 남북전쟁하다 죽어서 사라져버린) ‘개인’과 ‘국익’과 ‘욕망’의 사회이기 때문이다.(세 가지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여!) 이러한 현실에서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가 “민주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 그의 언설은 교양 없는 보수의 전형적 모습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나는 이문열과 김훈을 구분 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그러니까 그의 책을 보는 것이겠지만), 박정희와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를 쏟아내는 그의 현실인식을 접할 때마다 그 구분이 ‘나의 헛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훈을 조금 지나치게 비하(혹은 과대평가?)하자면, 그는 하루키의 한국식 버전에 다름 아니다. 하루키에 굶주림의 고명을 얹고, 분단의 비극이라는 그릇에 올리면 김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하루키에 열광하는 감수성이 때 묻으면, 그 때의 정당성을, 혹은 그 때에 대한 위로를 김훈에게서 찾기 쉬울 터이다. 나도 한 때 하루키를 즐겨 읽던 짧은 시기가 있었다. 문득 FTA를 걱정하는 시골의 농사짓는 작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훈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간, 나의 막막함 자체가 ‘무참’해졌다. 이제 나는 나의 ‘막막함’의 ‘무참함’을 알았으니, 적어도 진정 막막해 지기 전까지는,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을 일이 없을 터이다. 진정 막막해 진다면, 그의 소설 따위가 위로가 될 리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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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3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urblue 2007-05-25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전 김훈이 안 땡길까요? 강산무진이던가, 서점에서 단편 하나를 읽었는데, 뭐 별로... 님의 리뷰 보니까 안 읽어도 될 듯 하구요. ^^;

happyant 2007-05-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제 주변을 보니 아픔을 초연하게 견뎌낼 줄 아는 사람들은 김훈에 초연하더군요.^^ 전 아직 나약한 면이 많아서 김훈을 가끔 들여다 보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아니하려고요.ㅎㅎ
 
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이승진 옮김 / 향연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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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식으로 말하다.


그러니까.

<이건저열하고도냉소에가열적인새벽세시의모방성짙은농담북>


1.

일본문화개방을 외치던 매국노 인사들이 연단위의 한 고등학생 갱에게 볼링 핀처럼 쓰러지다!  : 주간ㅈ선


십년 전쯤의 내 이름은 <아리랑 남벌 국민의례 송 북>이었다. 

나는 윤리와 국사교과서로 무장된 갱이었다.

하지만 내가 착각했던 건,

그때 해방이 된 줄 알았다는 것.

하지만 진실은 대한민국은 일본의 30년 정도 뒤진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부정하려 해도 갱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는 것.


해방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에는 훨씬 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영웅들이 증명했다.

로쟈는 개머리판적인 시련을 겪었고, 트로츠키는 도끼적인 시련을 겪었고, 우리의 영웅들은 새로운 입시유형적 시련을 겪는다. 논술시장의 새로운 전설들은 열강熱講한다. 부유한 이들은 재빨리 강의를 갈아탄다. 그러니까,


부유한 사람들은 적응이 빠르다. 그리하여 사실 나는 부럽습니다. 그들의 안정이. 그들의 침묵이. 그들의 망각이. 사계절 잠만 자고 있는 투쟁의 기억이. 그것을 팔아먹는 만화가들이. 아아. 찬란히 빛나는 것은 컵라면뿐입니다!


라고 마르크스는 1841년에 프루동과 바쿠닌과 헤겔에 관해 토론하던 중 투덜대었습니다.


2.

나는 지저분한 짓을 많이 했다. 나는 내가 소설가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1년간 썼습니다.

나는 ㅈ프 버클리가 좋습니다.

나는 ㅈ니스 조플린이 좋습니다.

나는 ㅈ미 핸드릭스가 좋습니다.

나는 ㅈ향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죽어버린 ㅈ이 좋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글을 쓰기에 좋지 않습니다.

조명도 어둡고 공기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먹을게 없습니다.

그러니 너절한 팝 문학은 집어치워 주세요.

어설프게 미친 사이코를 보면

나이스한 기분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미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들뢰즈를 20번쯤 보고, 푸코를 30번쯤 보고, 라캉을 50번 쯤 보고, 히치콕의 영화를 100번쯤 보고나서, 미침에 대한 계보학적 논문을 작성하여 봅니다. 그리하여 미침에 미치면, 21세기형 사이코에 대한 분열적 단상이 떠오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침은 결코 삶에 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정신의 표면에서 미끄러져 버리니까요.  

 

3.

그렇다면 이것은 이름이 무엇이죠?

문득 찾아온 세이렌이 물었다.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인 나는 대답했다.

<대한민국 마지막 사무라이 새마을 운동형 개그맨>이야.

쿠데타 이후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에 짊어지고 있지.

역시나,

무거운 비극에 시름하지 않는 분단국가의 작가라는 건 심각한 비극이라 생각해요.

세이렌 옆에 북한산에서 날아온 앵무새가 말하였다.

하지만 그 앵무새는 훨씬 더 똑똑한 앵무새다.

세이렌쯤, 전자레인지에 구워 먹을 줄 안다. 더 이상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소설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노래는 광장에서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리하므로,

미안해요, 세이렌.

이것이 내가 처음 썼던 단편 소설의 제목이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언어처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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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5-2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얼마만이에요? 엄청 반갑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인사만 남기고, 리뷰는 나중에 읽도록 하겠습니다. ^^

마늘빵 2007-05-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를 보는 듯 합니다. 제목이. :)

happyant 2007-05-2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저도 반가워요!^^오랜만이지요?ㅡ.ㅜ

happyant 2007-05-2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네에. 잘 보셨습니다아.
제목은 상투적 패러디고, 리뷰 내용은 어설픈 패러디에요.ㅡ.ㅜㅎㅎ

blowup 2007-05-2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설프다뇨. 이 책 읽다 말았는데도.
꽤 멋진 패러디란 생각이 드는데요.
유쾌하게 읽었습니다.

happyant 2007-05-26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 그렇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 이승하 시인과 함께 떠나는 세계 명시 기행, 개정판
이승하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이전의 서평에서도 한번 이야기 했었지만, 번역된 문학작품은 근래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사실 그렇게 말해 놓고선 정작 서평 대상은 번역된 세계명작이었지만) 그리고 그 점은 시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소설이야 번역 과정에서 역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하더라도, 큰 이야기의 얼개 자체가 변형될 위험은 없지만, 고도로 압축된 언어로 구성되는 시는 역자가 어떠한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백팔십도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채의 저자가 "예이츠의 이 시는 제목이 '꿈'이 아니라, 'He Wishs for The Cloths of Heaven'인데, '하늘의 옷감'(윤삼하 역), '하늘의 수(繡)단이 내게 있다면'(신동춘 역), '하늘의 융단'(신현정 역), '하늘나라의 옷'(성춘복 역) 등의 제목으로 변역되어 있다. 제목이 이렇게 다르니, 번역자에 따라 시의 뉘앙스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269p)"라고 말했듯, 나는 그동안 "번역이 영 신통치 않다, 문화적/역사적 배경이 달라 이해를 못하겠다, 외국 시는 좋은 줄을 모르겠다(4p)"라고 말하며 세계 명시라는 말이 나오면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물론 네루다나, 랭보를 뒤적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내 뭔 소린지 모르겠다, 라며 고개를 흔들거나, 백석, 김수영, 최승자, 기형도 등의 기존에 내가 좋아하던 시인들의 책으로 다시금 눈길을 돌리고 말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인의 시를 읽는 건지, 역자의 시를 읽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여름의 끝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이 책을 펼쳤을 때 눈에 들어온 한 구절의 설명, 한 편의 시, 한 장의 사진은 나를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호텔에서 칼로 팔목 동맥을 절단, 펜을 피에 찍어 시를 썼다.


잘 있게나, 내 친구여

소중한 자네를 내 가슴속에 간직하려네.

이별은 이미 정해진 것.

저승에서 만남을 약속하는 것.


나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잘 있게나.

악수나 조사(弔詞)따위는 아껴두게.

이승에서 죽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건만

삶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네.


시 쓰기를 마친 예세닌은 노끈을 목에 감고 의자에 올라가 창문에다 노끈을 맨 뒤 발로 힘껏 의자를 찼다......(367~368p)



그리고 유약한 이미지의 그가 담겨 있는 사진과 마주하고는, 나는 그의 삶으로, 그리고 다른 24명의 시인들의 삶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했을 법한, 그리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한(누군들 그러하지 않으랴만, 시인은 더욱 그러함에 틀림없다) 영혼들과 마주하며, 난, 한없이 우울했고, 가까스로 그 우울에서 끌어 올려 졌다가, 다시 더 깊은 우울에 빠져버리곤 했다. 기형도가 어떤 시의 마지막 행에서 고백했듯, 가장 사랑받는 시인의 삶은, 어찌 그리 스스로를 사랑할 줄은 모르는 것일까.(아니면 너무나도 큰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을 스스로가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 예순이 되기 전에 폐렴악화로 죽은 엘뤼아르를 보며 참 오래도 살았군,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불화는 기본, 질병은 필수요, 요절은 선택이라고나 할까. 당시의 평균수명과 의학의 발전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지나칠 정도로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그들이 너무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것은 역으로 그 정도의 ‘불길한 감수성’을 갖고 있어야만 ‘사랑받는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체로 너무 앞서 느꼈거나(블레이크, 하이네), 뒤쳐져가는 것을 잊지 못했고(예세닌), 자신의 감성에 너무도 정직했으나 유약했다(보들레르, 포). 그리하여, 시인의 연약한 살갗은 이내 세상의 굳은살에 쉽사리 베여버리고, 그 안으로 운명적인 비극의 균들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시와 소설만은 발적적으로(190p)” 쓰게 되면, 아픔을 잊고 살아가는 대중은, 그들의 각혈에 사랑을 보낸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상처만 한 아름 안고 세상을 떠난 다음에 말이다. 슬픈 일이다.


저자는 이 책이 외국 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미안하게도, 난 여전히 그들의 시에는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포나 예세닌, 보르헤르트를 비롯해 몇몇 시인들의 시는 인상 깊게 읽었지만, 여전히 ‘그럴 바에야 우리의 시를’이라는 닫힌 태도를 꾸준히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그들의 아픔에는, 적어도 내일 아침의 밥 한 끼보다는,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가 누구나 한 때 겪는다는 문학청년의 시기는 이미 오래 전 지났으되, 여전히 그들의 백분지 일이나마, 날선 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즐겨’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든, 몇몇 영어권 작가들의(프랑스어나 독일어를 할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를 원서로 읽어야겠다, 라고 결심했으니, 이것은 무책임한 결심일까, 현학적인 만용일까. 아니면 때늦은 낭만의 발동일까.     


책 한권에 많은 인물을 다룰 경우, 인물별로 두 세 페이지 분량의 간략한 전기에 작품 한두 편과 그것의 해설을 덧붙여 놓고 책 팔아먹는 일도 있을 법 한데, 이 책은 총 600페이지 분량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내용이 채워져 있다. 물론 책의 사이사이에 있는 시가 워낙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에, 시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분량이 적지만, 조금 더 심화된 책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욕구가 생길 정도의 깊이는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이었던 상고르의 경우, 그가 주도한 네그리튜드 운동과 그것에 대한 파농과 월레 소잉카의 비판까지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참고서 느낌이 나는, ‘감수성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표지와 가끔 보이는 저자의 오버(이것은 독자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겠다)를 감안한다면, 나처럼 ‘세계의 명시’에 거리감‘만’ 있었던 사람들에게 입문서로는 적당할 듯하다. 물론, 입문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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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9-2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세닌이 20대에 자살했던가.
수업 시간에 러시아어로 시를 읽었지만, 말 그대로 '읽었'을 뿐이죠. 잘 모르긴 마찬가지였어요. 뭐 사실 우리나라 시도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_-
그나저나, 자주 좀 봅시다!

happyant 2006-09-26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살때라네요.
시야, 그래서 읽던 것만 읽게되죠. 그러다가, 가끔씩 찡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또 한동안 그것에 젖어 살다가, 잠시 잊었다가, 다시 빠져들었다가, 반복입니다.ㅎ

그러게요 자주 보면 좋겠네요. 언젠가 진짜 보면 더 좋을 지도요.ㅎㅎ
그래도 이렇게 잊지 않고 또 글을 남겨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urblue 2006-09-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로 봐도 좋죠 뭐.
안그래도 청첩장 돌리고 있는 중인데 하나 보내드리까? ^^a

happyant 2006-09-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히. 뒤늦게, 블루님의 공지에 댓글을 붙였습니다.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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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래,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니체주의자이기 때문도 아니요,(오히려 난 니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맑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종교에 무심하게 된 것은, 내 성장기의 집안 형편과, 유년기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 이유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제법 놀 줄 아셨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워낙 살기에 바빠 종교집단에 가입할 여유가 없으셨으며, 어머니 또한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입에 풀칠하기 위해 회사에 다니셨던 터라, 연례행사로 절에 가는 것이 - 일년에 한 두 번 쯤? - 전부였으니, 우선 내게는 '모태신앙'같은 일종의 숙명적인 것에 묶일 가능성이 전무 했던 것이다. 또한 유년기 원체 소심했던 나는 차례로 발을 들인 교회와 절에서, 그 폐쇄적인 관계망에 빠르게 질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 그 가정형편과 외모의 '부유함'에 몰리는 어린 인간군상 들이여!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꼬임에 빠져, 하필이면 거리도 멀었던 강남의 큰 절에 발을 들인 것이 ‘원죄’였을까?) 그래서 나는 종교는 미워하지 않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구라치는) 인간은 미워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현실의 종교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갔는데, 훈련소에서 스님이 고 김선일씨가 나라에 해를 끼쳤다고 타박했던 것이 절정이었다. 나는 교회의 ‘초콜릿 바와 콜라’의 유혹도 뿌리치고 소신을 지켜 겨우 파이 하나 주는 절에 갔건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와 완전히 거리를 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험에서 노력한 만큼의 성적을 얻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기원이 담긴 '만卍' 모양의 목걸이를 10년 가까이 목에서 떼어 놓지 않고 있으며, 누군가가 나의 종교에 대해 물을라치면, '무교'라고 차갑게 대답하기보다는 '불교를 좋아합니다. 스스로의 수양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확실히, 내게 불교(절)는 기독교(교회)보다 덜 가진 것 같았고, 또한 무언가 그냥 인정해버리기에는 미심쩍은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양과 관련이 있는 담백한 종교로 이해되었기에, 호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그에 비해 ‘예수천국불신지옥’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특히 개신교)는 너무 많이 갖고, 너무 많이 부패하고, 너무 많이 폐쇄적인 것으로 느껴졌었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짧은 공부의 결과로,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비교적 덜 가진 것이 '정의로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과, 그 '불교답지 못함'이 - 아, 그 구라쟁이 조폭 스님들과, 구라쟁이 박사와의 연합이라니! - 개신교 못지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정의로운 불교도들과 정의로운 기독교인들이 지난 세월 어떻게 탄압받았으며, 오늘날 어떻게 힘들게 싸우고 있는지도 말이다.)


그러던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세상을 조금 더 겪으면서, 종교라는 것이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한번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라는 얼마간의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그와 비슷한 시기에 김규항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읽게 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일련의 글들을 통해, 그리고 [서준식 옥중서한]에서 읽게 된 예수님에 대한 서준식 선생의 주옥같은(아, 이 통속적인 수사라니. 하지만 이 책에 대해 말장난이 포함된 개성적인 찬사를 붙이는 것은 오히려 실례라고 생각된다.) 글들을 통해, 종교라는 것이(혹은 신이라는 것이)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본보기로서, 하나의 교훈으로서, 하나의 위로로서, 얼마든지 내게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로 매일 일정한 분량씩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지장보살의 가르침에 대한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지옥에 가서 함께 고통을 겪으며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지장보살님의 실천은, 고고한 신들의 허공에 뜬 말씀들 보다 얼마나 멋진가!) 물론 아직 많은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종교마저 ‘아는 만큼 믿는’ 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황빠들이 그들의 신에게 그러하듯)


그러다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때마침 워낙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던지라, 내가 즐겨 찾는 사이트의 운영자이신 '학생 겸 선생'님의 짧은 추천의 글을 읽고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문하게 되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핵심을 잡지 못하고 파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터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 이하였다. '일단 믿으면 구원이 찾아오리니'라는 가르침도 설득력이 없었고,(아, 이 여전히 믿음이 없는 가여운 자의 구원받지 못할 얼어붙은 마음이여!)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 누구의? 하느님의? 작가의? -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실소마저 튀어나왔다. 물론, '믿음과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소득이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인자하고, 쿨하고,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말씀 잘 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듯한 기분(뒤에서는 교세의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 아니면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마음속의 예수님을 실천하고 계신지 도무지 알 수 없는)을 느꼈을 뿐인 것이다. 전직 부르주아의 예수(지금은 어떠할는지. 법정스님의 인세보다 많이 버셨을라나?)는, 독실한 신자 부시가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서나, 혹은 일찍이 예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아프리카나 아랍, 아시아의 민중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들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한 찬사 일색인 일련의 리뷰를 보아하니, 누군가가 이 리뷰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타 종교인의 악의적인 비난'이라고. 하지만 난 '어느 정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난 지금 당당히 내 마음속의 예수님과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부처처럼 내면을 가꾸고 예수처럼 세상과 싸워, 극락천국에 가겠다. 라고 다짐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실천의 수준은 저열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말이다. 이것 역시 ‘믿음’이 부족해서 일까?)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니야, 라고 반문한다면, 그 기준은 누가 만들었지? 일요일마다 반드시 교회에 가야 한다고 강요한 바리새인?, 이라고 되물어 주겠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안고 오늘 날 부활하신다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반전집회를 열고, 미국의 제국주의에 비정치적인 형태로(그럼으로써 가장 정치적이고 기득권 세력이 위협이 되는 형태로) 대항하셨을 것이라고, 또한 불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상관없이 고통 받고 있는 민중들이라면 '나만을 믿어라'라는 강요 없이 은총을 내려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략 이천년 전에 그러하였듯이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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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3-2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시원한 글입니다. 이래서 내가 님 리뷰를 좋아한다니까.

happyant 2006-03-2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오히려 좋게 읽어주셔서 매번 제가 감사하죠.^^

DJ뽀스 2006-03-2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볼까 고민중인데 님의 리뷰를 보니 더욱 망설여집니다. ^^:
남들이 극찬하는 "긍정의힘"이란 책을 읽고 실망, 낙담했던 제 모습과 비슷하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happyant 2006-03-24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읽어봐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뽀스님에 대해 잘 모르기에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닭고기 수프' 수준 이상의 어떤 '통찰'을 바라신다면, 권정생 선생님의 책을 읽거나, 언젠가 나올 김규항 선생의 책을 기다리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더 좋은 책들도 많이 있겠지만, 제가 공부가 짧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이레앤샬롬 2006-03-3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였습니다. 충분히 님과 같은 느낌을 갖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고있는데요. 이제 목사가 될 사람의 아내랍니다. 그 누구를 통해서가 아닌 1:1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것 말로 설명이 도저히 안되는 그런 삶.. 제가 보기에 님은 이제 그 첫 발걸음을 디디신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님을 꼭 만나주시길 날마다 하나님주시는 은혜가운데 머무시는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당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치 못할 것입니다. 사고의 깊이와 글의 표현이 정말 뛰어나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서 영혼을 울리는 더 아름다운 지체가 되시길 바랍니다.

happyant 2006-03-3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 감사드리고, 기도는 더욱 감사드립니다. 이레앤샬롬님의 말씀처럼 첫 발걸음은 떼었을지 모르나, 막상 떼고 보니 그 한걸음 한걸음이 보통 어려운 걸음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매일같은 일상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변함없는 자그마한 너그러움을 보이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님의 기도 헛되지 않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만분지 일이라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랙하트 2006-07-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정도는 동감, 어느 정도는 반감을 가지면서 님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글의 내용도 조리있어 이해하기도 어렵지는 않더군요.

전 기독교인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이 옳은 것이라 편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걔 중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법을 행한 자'들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자유로이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아는 만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만큼 아는 것이라고요.

또한 머리의 지식이 아닌 가슴의 사랑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 역시 수많은 <우연: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말하더군요>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고, 영적인 경험은 성경적인 지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니까요.

깊은 배움에 감사를 드리면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