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이승진 옮김 / 향연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카하시 식으로 말하다.


그러니까.

<이건저열하고도냉소에가열적인새벽세시의모방성짙은농담북>


1.

일본문화개방을 외치던 매국노 인사들이 연단위의 한 고등학생 갱에게 볼링 핀처럼 쓰러지다!  : 주간ㅈ선


십년 전쯤의 내 이름은 <아리랑 남벌 국민의례 송 북>이었다. 

나는 윤리와 국사교과서로 무장된 갱이었다.

하지만 내가 착각했던 건,

그때 해방이 된 줄 알았다는 것.

하지만 진실은 대한민국은 일본의 30년 정도 뒤진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부정하려 해도 갱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는 것.


해방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에는 훨씬 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영웅들이 증명했다.

로쟈는 개머리판적인 시련을 겪었고, 트로츠키는 도끼적인 시련을 겪었고, 우리의 영웅들은 새로운 입시유형적 시련을 겪는다. 논술시장의 새로운 전설들은 열강熱講한다. 부유한 이들은 재빨리 강의를 갈아탄다. 그러니까,


부유한 사람들은 적응이 빠르다. 그리하여 사실 나는 부럽습니다. 그들의 안정이. 그들의 침묵이. 그들의 망각이. 사계절 잠만 자고 있는 투쟁의 기억이. 그것을 팔아먹는 만화가들이. 아아. 찬란히 빛나는 것은 컵라면뿐입니다!


라고 마르크스는 1841년에 프루동과 바쿠닌과 헤겔에 관해 토론하던 중 투덜대었습니다.


2.

나는 지저분한 짓을 많이 했다. 나는 내가 소설가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1년간 썼습니다.

나는 ㅈ프 버클리가 좋습니다.

나는 ㅈ니스 조플린이 좋습니다.

나는 ㅈ미 핸드릭스가 좋습니다.

나는 ㅈ향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죽어버린 ㅈ이 좋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글을 쓰기에 좋지 않습니다.

조명도 어둡고 공기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먹을게 없습니다.

그러니 너절한 팝 문학은 집어치워 주세요.

어설프게 미친 사이코를 보면

나이스한 기분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미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들뢰즈를 20번쯤 보고, 푸코를 30번쯤 보고, 라캉을 50번 쯤 보고, 히치콕의 영화를 100번쯤 보고나서, 미침에 대한 계보학적 논문을 작성하여 봅니다. 그리하여 미침에 미치면, 21세기형 사이코에 대한 분열적 단상이 떠오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침은 결코 삶에 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정신의 표면에서 미끄러져 버리니까요.  

 

3.

그렇다면 이것은 이름이 무엇이죠?

문득 찾아온 세이렌이 물었다.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인 나는 대답했다.

<대한민국 마지막 사무라이 새마을 운동형 개그맨>이야.

쿠데타 이후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에 짊어지고 있지.

역시나,

무거운 비극에 시름하지 않는 분단국가의 작가라는 건 심각한 비극이라 생각해요.

세이렌 옆에 북한산에서 날아온 앵무새가 말하였다.

하지만 그 앵무새는 훨씬 더 똑똑한 앵무새다.

세이렌쯤, 전자레인지에 구워 먹을 줄 안다. 더 이상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소설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노래는 광장에서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리하므로,

미안해요, 세이렌.

이것이 내가 처음 썼던 단편 소설의 제목이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언어처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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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5-2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얼마만이에요? 엄청 반갑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인사만 남기고, 리뷰는 나중에 읽도록 하겠습니다. ^^

마늘빵 2007-05-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를 보는 듯 합니다. 제목이. :)

happyant 2007-05-2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저도 반가워요!^^오랜만이지요?ㅡ.ㅜ

happyant 2007-05-2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네에. 잘 보셨습니다아.
제목은 상투적 패러디고, 리뷰 내용은 어설픈 패러디에요.ㅡ.ㅜㅎㅎ

blowup 2007-05-2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설프다뇨. 이 책 읽다 말았는데도.
꽤 멋진 패러디란 생각이 드는데요.
유쾌하게 읽었습니다.

happyant 2007-05-26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 그렇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 이승하 시인과 함께 떠나는 세계 명시 기행, 개정판
이승하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이전의 서평에서도 한번 이야기 했었지만, 번역된 문학작품은 근래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사실 그렇게 말해 놓고선 정작 서평 대상은 번역된 세계명작이었지만) 그리고 그 점은 시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소설이야 번역 과정에서 역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하더라도, 큰 이야기의 얼개 자체가 변형될 위험은 없지만, 고도로 압축된 언어로 구성되는 시는 역자가 어떠한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백팔십도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채의 저자가 "예이츠의 이 시는 제목이 '꿈'이 아니라, 'He Wishs for The Cloths of Heaven'인데, '하늘의 옷감'(윤삼하 역), '하늘의 수(繡)단이 내게 있다면'(신동춘 역), '하늘의 융단'(신현정 역), '하늘나라의 옷'(성춘복 역) 등의 제목으로 변역되어 있다. 제목이 이렇게 다르니, 번역자에 따라 시의 뉘앙스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269p)"라고 말했듯, 나는 그동안 "번역이 영 신통치 않다, 문화적/역사적 배경이 달라 이해를 못하겠다, 외국 시는 좋은 줄을 모르겠다(4p)"라고 말하며 세계 명시라는 말이 나오면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물론 네루다나, 랭보를 뒤적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내 뭔 소린지 모르겠다, 라며 고개를 흔들거나, 백석, 김수영, 최승자, 기형도 등의 기존에 내가 좋아하던 시인들의 책으로 다시금 눈길을 돌리고 말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인의 시를 읽는 건지, 역자의 시를 읽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여름의 끝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이 책을 펼쳤을 때 눈에 들어온 한 구절의 설명, 한 편의 시, 한 장의 사진은 나를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호텔에서 칼로 팔목 동맥을 절단, 펜을 피에 찍어 시를 썼다.


잘 있게나, 내 친구여

소중한 자네를 내 가슴속에 간직하려네.

이별은 이미 정해진 것.

저승에서 만남을 약속하는 것.


나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잘 있게나.

악수나 조사(弔詞)따위는 아껴두게.

이승에서 죽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건만

삶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네.


시 쓰기를 마친 예세닌은 노끈을 목에 감고 의자에 올라가 창문에다 노끈을 맨 뒤 발로 힘껏 의자를 찼다......(367~368p)



그리고 유약한 이미지의 그가 담겨 있는 사진과 마주하고는, 나는 그의 삶으로, 그리고 다른 24명의 시인들의 삶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했을 법한, 그리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한(누군들 그러하지 않으랴만, 시인은 더욱 그러함에 틀림없다) 영혼들과 마주하며, 난, 한없이 우울했고, 가까스로 그 우울에서 끌어 올려 졌다가, 다시 더 깊은 우울에 빠져버리곤 했다. 기형도가 어떤 시의 마지막 행에서 고백했듯, 가장 사랑받는 시인의 삶은, 어찌 그리 스스로를 사랑할 줄은 모르는 것일까.(아니면 너무나도 큰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을 스스로가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 예순이 되기 전에 폐렴악화로 죽은 엘뤼아르를 보며 참 오래도 살았군,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불화는 기본, 질병은 필수요, 요절은 선택이라고나 할까. 당시의 평균수명과 의학의 발전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지나칠 정도로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그들이 너무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것은 역으로 그 정도의 ‘불길한 감수성’을 갖고 있어야만 ‘사랑받는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체로 너무 앞서 느꼈거나(블레이크, 하이네), 뒤쳐져가는 것을 잊지 못했고(예세닌), 자신의 감성에 너무도 정직했으나 유약했다(보들레르, 포). 그리하여, 시인의 연약한 살갗은 이내 세상의 굳은살에 쉽사리 베여버리고, 그 안으로 운명적인 비극의 균들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시와 소설만은 발적적으로(190p)” 쓰게 되면, 아픔을 잊고 살아가는 대중은, 그들의 각혈에 사랑을 보낸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상처만 한 아름 안고 세상을 떠난 다음에 말이다. 슬픈 일이다.


저자는 이 책이 외국 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미안하게도, 난 여전히 그들의 시에는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포나 예세닌, 보르헤르트를 비롯해 몇몇 시인들의 시는 인상 깊게 읽었지만, 여전히 ‘그럴 바에야 우리의 시를’이라는 닫힌 태도를 꾸준히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그들의 아픔에는, 적어도 내일 아침의 밥 한 끼보다는,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가 누구나 한 때 겪는다는 문학청년의 시기는 이미 오래 전 지났으되, 여전히 그들의 백분지 일이나마, 날선 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즐겨’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든, 몇몇 영어권 작가들의(프랑스어나 독일어를 할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를 원서로 읽어야겠다, 라고 결심했으니, 이것은 무책임한 결심일까, 현학적인 만용일까. 아니면 때늦은 낭만의 발동일까.     


책 한권에 많은 인물을 다룰 경우, 인물별로 두 세 페이지 분량의 간략한 전기에 작품 한두 편과 그것의 해설을 덧붙여 놓고 책 팔아먹는 일도 있을 법 한데, 이 책은 총 600페이지 분량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내용이 채워져 있다. 물론 책의 사이사이에 있는 시가 워낙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에, 시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분량이 적지만, 조금 더 심화된 책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욕구가 생길 정도의 깊이는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이었던 상고르의 경우, 그가 주도한 네그리튜드 운동과 그것에 대한 파농과 월레 소잉카의 비판까지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참고서 느낌이 나는, ‘감수성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표지와 가끔 보이는 저자의 오버(이것은 독자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겠다)를 감안한다면, 나처럼 ‘세계의 명시’에 거리감‘만’ 있었던 사람들에게 입문서로는 적당할 듯하다. 물론, 입문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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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9-2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세닌이 20대에 자살했던가.
수업 시간에 러시아어로 시를 읽었지만, 말 그대로 '읽었'을 뿐이죠. 잘 모르긴 마찬가지였어요. 뭐 사실 우리나라 시도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_-
그나저나, 자주 좀 봅시다!

happyant 2006-09-26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살때라네요.
시야, 그래서 읽던 것만 읽게되죠. 그러다가, 가끔씩 찡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또 한동안 그것에 젖어 살다가, 잠시 잊었다가, 다시 빠져들었다가, 반복입니다.ㅎ

그러게요 자주 보면 좋겠네요. 언젠가 진짜 보면 더 좋을 지도요.ㅎㅎ
그래도 이렇게 잊지 않고 또 글을 남겨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urblue 2006-09-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로 봐도 좋죠 뭐.
안그래도 청첩장 돌리고 있는 중인데 하나 보내드리까? ^^a

happyant 2006-09-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히. 뒤늦게, 블루님의 공지에 댓글을 붙였습니다.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본래,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니체주의자이기 때문도 아니요,(오히려 난 니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맑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종교에 무심하게 된 것은, 내 성장기의 집안 형편과, 유년기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 이유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제법 놀 줄 아셨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워낙 살기에 바빠 종교집단에 가입할 여유가 없으셨으며, 어머니 또한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입에 풀칠하기 위해 회사에 다니셨던 터라, 연례행사로 절에 가는 것이 - 일년에 한 두 번 쯤? - 전부였으니, 우선 내게는 '모태신앙'같은 일종의 숙명적인 것에 묶일 가능성이 전무 했던 것이다. 또한 유년기 원체 소심했던 나는 차례로 발을 들인 교회와 절에서, 그 폐쇄적인 관계망에 빠르게 질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 그 가정형편과 외모의 '부유함'에 몰리는 어린 인간군상 들이여!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꼬임에 빠져, 하필이면 거리도 멀었던 강남의 큰 절에 발을 들인 것이 ‘원죄’였을까?) 그래서 나는 종교는 미워하지 않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구라치는) 인간은 미워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현실의 종교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갔는데, 훈련소에서 스님이 고 김선일씨가 나라에 해를 끼쳤다고 타박했던 것이 절정이었다. 나는 교회의 ‘초콜릿 바와 콜라’의 유혹도 뿌리치고 소신을 지켜 겨우 파이 하나 주는 절에 갔건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와 완전히 거리를 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험에서 노력한 만큼의 성적을 얻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기원이 담긴 '만卍' 모양의 목걸이를 10년 가까이 목에서 떼어 놓지 않고 있으며, 누군가가 나의 종교에 대해 물을라치면, '무교'라고 차갑게 대답하기보다는 '불교를 좋아합니다. 스스로의 수양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확실히, 내게 불교(절)는 기독교(교회)보다 덜 가진 것 같았고, 또한 무언가 그냥 인정해버리기에는 미심쩍은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양과 관련이 있는 담백한 종교로 이해되었기에, 호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그에 비해 ‘예수천국불신지옥’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특히 개신교)는 너무 많이 갖고, 너무 많이 부패하고, 너무 많이 폐쇄적인 것으로 느껴졌었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짧은 공부의 결과로,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비교적 덜 가진 것이 '정의로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과, 그 '불교답지 못함'이 - 아, 그 구라쟁이 조폭 스님들과, 구라쟁이 박사와의 연합이라니! - 개신교 못지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정의로운 불교도들과 정의로운 기독교인들이 지난 세월 어떻게 탄압받았으며, 오늘날 어떻게 힘들게 싸우고 있는지도 말이다.)


그러던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세상을 조금 더 겪으면서, 종교라는 것이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한번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라는 얼마간의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그와 비슷한 시기에 김규항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읽게 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일련의 글들을 통해, 그리고 [서준식 옥중서한]에서 읽게 된 예수님에 대한 서준식 선생의 주옥같은(아, 이 통속적인 수사라니. 하지만 이 책에 대해 말장난이 포함된 개성적인 찬사를 붙이는 것은 오히려 실례라고 생각된다.) 글들을 통해, 종교라는 것이(혹은 신이라는 것이)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본보기로서, 하나의 교훈으로서, 하나의 위로로서, 얼마든지 내게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로 매일 일정한 분량씩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지장보살의 가르침에 대한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지옥에 가서 함께 고통을 겪으며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지장보살님의 실천은, 고고한 신들의 허공에 뜬 말씀들 보다 얼마나 멋진가!) 물론 아직 많은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종교마저 ‘아는 만큼 믿는’ 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황빠들이 그들의 신에게 그러하듯)


그러다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때마침 워낙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던지라, 내가 즐겨 찾는 사이트의 운영자이신 '학생 겸 선생'님의 짧은 추천의 글을 읽고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문하게 되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핵심을 잡지 못하고 파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터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 이하였다. '일단 믿으면 구원이 찾아오리니'라는 가르침도 설득력이 없었고,(아, 이 여전히 믿음이 없는 가여운 자의 구원받지 못할 얼어붙은 마음이여!)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 누구의? 하느님의? 작가의? -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실소마저 튀어나왔다. 물론, '믿음과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소득이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인자하고, 쿨하고,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말씀 잘 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듯한 기분(뒤에서는 교세의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 아니면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마음속의 예수님을 실천하고 계신지 도무지 알 수 없는)을 느꼈을 뿐인 것이다. 전직 부르주아의 예수(지금은 어떠할는지. 법정스님의 인세보다 많이 버셨을라나?)는, 독실한 신자 부시가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서나, 혹은 일찍이 예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아프리카나 아랍, 아시아의 민중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들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한 찬사 일색인 일련의 리뷰를 보아하니, 누군가가 이 리뷰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타 종교인의 악의적인 비난'이라고. 하지만 난 '어느 정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난 지금 당당히 내 마음속의 예수님과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부처처럼 내면을 가꾸고 예수처럼 세상과 싸워, 극락천국에 가겠다. 라고 다짐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실천의 수준은 저열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말이다. 이것 역시 ‘믿음’이 부족해서 일까?)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니야, 라고 반문한다면, 그 기준은 누가 만들었지? 일요일마다 반드시 교회에 가야 한다고 강요한 바리새인?, 이라고 되물어 주겠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안고 오늘 날 부활하신다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반전집회를 열고, 미국의 제국주의에 비정치적인 형태로(그럼으로써 가장 정치적이고 기득권 세력이 위협이 되는 형태로) 대항하셨을 것이라고, 또한 불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상관없이 고통 받고 있는 민중들이라면 '나만을 믿어라'라는 강요 없이 은총을 내려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략 이천년 전에 그러하였듯이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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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3-2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시원한 글입니다. 이래서 내가 님 리뷰를 좋아한다니까.

happyant 2006-03-2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오히려 좋게 읽어주셔서 매번 제가 감사하죠.^^

DJ뽀스 2006-03-2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볼까 고민중인데 님의 리뷰를 보니 더욱 망설여집니다. ^^:
남들이 극찬하는 "긍정의힘"이란 책을 읽고 실망, 낙담했던 제 모습과 비슷하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happyant 2006-03-24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읽어봐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뽀스님에 대해 잘 모르기에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닭고기 수프' 수준 이상의 어떤 '통찰'을 바라신다면, 권정생 선생님의 책을 읽거나, 언젠가 나올 김규항 선생의 책을 기다리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더 좋은 책들도 많이 있겠지만, 제가 공부가 짧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이레앤샬롬 2006-03-3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였습니다. 충분히 님과 같은 느낌을 갖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고있는데요. 이제 목사가 될 사람의 아내랍니다. 그 누구를 통해서가 아닌 1:1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것 말로 설명이 도저히 안되는 그런 삶.. 제가 보기에 님은 이제 그 첫 발걸음을 디디신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님을 꼭 만나주시길 날마다 하나님주시는 은혜가운데 머무시는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당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치 못할 것입니다. 사고의 깊이와 글의 표현이 정말 뛰어나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서 영혼을 울리는 더 아름다운 지체가 되시길 바랍니다.

happyant 2006-03-3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 감사드리고, 기도는 더욱 감사드립니다. 이레앤샬롬님의 말씀처럼 첫 발걸음은 떼었을지 모르나, 막상 떼고 보니 그 한걸음 한걸음이 보통 어려운 걸음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매일같은 일상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변함없는 자그마한 너그러움을 보이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님의 기도 헛되지 않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만분지 일이라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랙하트 2006-07-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정도는 동감, 어느 정도는 반감을 가지면서 님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글의 내용도 조리있어 이해하기도 어렵지는 않더군요.

전 기독교인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이 옳은 것이라 편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걔 중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법을 행한 자'들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자유로이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아는 만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만큼 아는 것이라고요.

또한 머리의 지식이 아닌 가슴의 사랑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 역시 수많은 <우연: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말하더군요>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고, 영적인 경험은 성경적인 지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니까요.

깊은 배움에 감사를 드리면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맨발의 겐 1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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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과연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는 별개로, 한 철학자의 "앞으로 300년은 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망할 게 무어란 말인가?"라는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주어진 상황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나의 경우, 특히나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라서 - 그래서 피곤한 편이라서 - 더욱 그러하다. 짐멜의 말처럼 '감정에 휩쓸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주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면서 이른바 자신의 밑천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때로는 사태를 넓고 느긋하게 파악하는 태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현실에는 래디컬하게, 성과에는 느긋하게, 이런 얘기다. 관념적이지 않기 위해, 그래도 언젠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고대가 그러했고, 중세가 그러했듯, 무너지고(변화되고) 말 것이라고 느긋하게, 관념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느긋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서는 결코 창조되지 못했던 무기, 핵무기다. 고대의 어떤 전쟁도, 중세의 어떤 역병도, 인류 문명을 단번에 멸절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핵무기는 다르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무기로 내 영혼은 수 십 번 죽고도 몇 번 더 죽을 수 있다. 우주에 지구와 같이 지성을 갖춘 생명체가 문화를 영위하는 행성이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개수가 수백을 넘지 않는다면, 인류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 크리스 하먼의 말처럼 권한을 소유한 누군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조직화 된 인간 생활의 종말을 초래‘하는 일이 생길까봐 말이다. 영화나 만화를 보면, '버려진 자들의 반항'과 함께 세상이 바뀌는 데는 몇 개의 탑과 빌딩이 무너지는 데서 발생하는 굉음과 분진만이 필요할 뿐이지만, 아마도 자본주의가 끝날 때에는 그렇게 쉽사리 일이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실재는, 스탠리 큐브릭의 풍자처럼 ’어느 쪽으로 보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가치가 실현되는, 그 무시무시하게 쌓여있는 폭탄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다른 극단의 세계의 끝자락에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빼앗으려하는 노동자들을 과연 인간이라 생각할까?(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뭐.......)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은, 그러한 핵무기가 현 인류를 대상으로 처음으로 사용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의 일본사회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히로시마에서의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직접 원폭을 경험한 작가는(그래서 현재 작가도 병마와 싸우고 있다), 원폭투하 4개월 전인 1945년 4월에서부터 1952년의 한국전쟁 종전 직후까지의 이야기를 마치 자서전을 쓰듯 풀어낸다. 무식했던 나는 맨발의 겐을 [닥터 노구치]나 [캔디캔디] 류의 단순한 인간승리 드라마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읽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투박한 그림체는 놀랍도록 잔혹한 현실을 묘사하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 한 시대의 정신을 증언한다. 정치와 구조가 제거되고 감정과 드라마만 부각되는 여느 전쟁을 다룬 작품들과 달리 [맨발의 겐]에는 개인과 개인간의, 그리고 개인과 사회 간의 권력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에서 겐과 그의 ‘어린’(피를 밥 먹듯이 보는 ‘어린’이들) 친구들은 특별히 공부를 한 것이 아님에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민중-권력자-천황을 통틀어 전쟁에 책임이 있는 총체적 존재로서의)과, 종전을 명목으로 무책임한 살상을 저지른 미국(등의 강대국들)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이해하고 비판하고 싸운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실’은 관념적인 이론이나 미사여구로 치장된 형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처절하게 진솔한 형태로 전해지기에 가슴에 더욱 커다란 울림을 남긴다. 


한발자국 물러나 바라보면, [맨발의 겐]은 과도하게 소유함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한국을 지배하고, 만주까지 점령했던,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 동-남아시아의 상당부분을 착취했던, 자신들만을 위한 대동아공영권을 꿈꿨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우리는 [맨발의 겐] 1권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부의 언론 조작, 비국민에 대한 차별을 통한 집단주의의 강화, 천황의 신격화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입, 그리고 이어지는 잔악한 범죄들. 우리는 난징대학살과 관동대학살을 비롯해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일본의 그러한 ‘욕망’은 또 다른 지배를 꿈꾸는 ‘욕망’에 의해 ‘파괴’되어서만 멈추어 질 수 있었다. 제국을 꿈꿨던 일본은, 자신들의 욕망에 취해 가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제 발로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을 보며 한때의 피지배국이었던 한국의 구성원인 우리는, 직접적인 피해자들을 위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배상금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본에게 면죄부를 줄 필요도 없고, 고소해 해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혹자는 이 책도 ‘반딧불의 묘’의 우를 범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시선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본이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고, 집단 안의 ‘또 다른 목소리’(겐의 아버지처럼)를 외면했듯,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고, 우리 사회 안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사회의 건강성을 잃게 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에게 남겨질 것은 피폐함과 황폐함 뿐이기 때문이다.(나는, 얼마 전 잡지에서 본, 거짓에 절망하고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한 여성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 한겨레21 제591호 <‘성스러운 여인’이 신음한다.>) 같은 의미로, 우리는 베트남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가해진 범죄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의 ‘비국민’들에게 가하고 있는 범죄에 대해 과연 얼마나 반성을 하고 있는가. 황우석 쇼크를 거치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의 치부를 목도하며,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었던가? 여전히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또 다시 월드컵이라는 소용돌이에 몸을 던질 채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반성하는 만큼 일본에도 그것을 요구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당연한 것이지만, 이 얘기는 현재 한국 사회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정권의 유지를 위해 자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했던/하는 정부를 향해 하는 이야기이지, 수요일마다 찬바람을 맞으며 수 십 년 째 시위를 해 오고 계시는 할머니들이나, 베트남 전에서의 고엽제 피해로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을 ‘향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책을 잃으며, 솔직히 말해 꺼이꺼이 울었던 것은 아니지만, 참담한 마음에 크게 한숨을 내쉬며,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머리를 맞추면 한번에 죽일 수 있어'따위의 대사가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튀어나와 0.1초면 접속이 가능한 링크를 타고 온갖 잔인한 이미지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휘젓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온갖 가상과 실재와 실재 같은 가상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너무나도 쉽게 몸이 부스러져 죽어가고 있는 세상이지만, 조금만 반성적 사유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그것 자체는 물론, 그것에 익숙해 져 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그리고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알 수 있다. 저항할 줄 모르는 우리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저항하지 않는/못하는 무관심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ps. 가능하면 목돈을 마련해서 세트로 구입하시기를 권한다. 낱권으로 구입하게 되면, 2권  이후는 읽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너무나도 비참한 만화 속의 현실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해, 읽는 도중에 몇 번이나 페이지를 그냥 덮으려 했다. 힘겹게 다 읽다 보니, 리뷰도 격해져서, 마음만 더 불편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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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2-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책들은 잘 읽지 못하는데, 음, 기억해두겠습니다.

happyant 2006-02-28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여러모로 매우 불편해지는 책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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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세계명작'을 즐겨 읽지 않게 되었다. 잘된 번역과 못된 번역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에 구입했던, 깨알만한 글씨가 압박이었던 소담출판사의 책들은 어느 샌가 책꽂이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민음사나 범우사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괴테, 단테를 향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여전하지만, 예전처럼 더 이상 다급하지는 않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 고뇌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눈길이 더 많이 가게 되는 내 취향과 관심사의 문제이자, 근래 갖게 된 문학작품의 번역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인 의심 때문인데, 이것은 더듬더듬 원서를 읽는 정도의 영어실력으로 지나친 의역이나 오역의 문제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언어를 바탕으로 작가와 얼마간의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않고서 과연 문학작품의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몇 년 유학한 미국인 한국어학자가 번역한 박민규의 단편을 읽은 미국인들이, 박민규와 같은(혹은 유사한) 시대를 보낸 한국의 2,30대들과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마찬가지로, '토니오 크뢰거'가 다른 독일어 이름보다 '어색하게' 들리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독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넘는 이 단편집을 손에 쥐고 하루에 한두 편씩 읽기 시작한 것은, 내 무의식에 남아있는 몇몇 그의 작품의 제목들에 대한(예컨대, [토니오 크뢰거]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처럼) 알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며, 또한 예술가적인 기질과 시민적인 기질 간의 분열이 인생의 주제였던 그가, 파시즘을 거치며 정치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는 (언제나)흥미로운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이고, 좀 더 직접적으로는 근래 두 달째 읽고 있는 [사로잡힌 영혼]에서 라니츠키가 그를 독일을 대표하는 두 이름 중의 하나로 꼽았기 때문이다.(나머지 한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한 문화의 절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꽤나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노벨상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보통 그러하듯, 결코 쉽거나 즐겁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분열과 그것을 다루는 그의 지성을 읽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분열은 대체로 자서전으로 보이는 [토니오 크뢰거]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잘 드러나 있는데,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106p)와 같은 진지한 문장도 있지만, 한편에는 "나는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해 내느라고 가끔 죽도록 피곤하단 말입니다."(46p)와 같이 재밌는, 혹은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하고 생산적인 사랑이랍니다."(108p)와 같은 순수한(!) 문장도 있다. 또한 "소박한 결혼반지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그녀의 아름답고 창백한 손은 직물로 짜서 무거워 보이는 어두운 색 치마의 무릎 주름 속에 편안히 놓여 있었다."(353p)로 시작해 한 페이지 넘게 이어지는 [트리스탄]의 묘사처럼 대체로 그의 문장은 발자크의 작품들만큼이나 화려했지만, 결코 어지럽지는 않았다.(역시!) 덧붙여 큰 감동은 없었지만, 1930년에 발표된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다룬 [마리오와 마술사]도 현실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마술적인 느낌의 문학으로서, 비교적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서, ‘따스하지만 엄격한 화려함’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격조 높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만의 정신과 마주하는 동안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토니오 크뢰거]부터 시작하여, [키 작은 프리데만 씨]와 [어릿광대]에서 선명해지는 그가 가진 어떠한 패배감(혹은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컨대, 고귀한 지성이 때때로 세속적 아름다움의 앞에서 순식간에 그 빛을 잃고 마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인데, 과거 끊임없이 감탄하며 읽은 어떤 혁명가의 치열한 이론보다, 몸이 기억하는 듯한 오래 전 이성과의 짧은 육체적 접촉의 추억이 더욱 강렬하게 지금 내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혹은 연예계의 저속함을 비난하는 대부분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소유한 이들도, 자신의 앞에 등장한 멋진 이성/동성 배우에게 향하는 자신의 선망과 동경의 눈빛을 돌리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처럼,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혹은 토마스 만 자신의) 완성된 고귀한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정신이 어떠한 세속적 대상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에 나는 무척이나 즐겁게 공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감히'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으며, '이 녀석, 나와 같은 종류의 열등감이 장난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낄낄대었던 것이다. 물론 토마스 만은 지성적으로 대가이듯, 열등감과 그것의 표현에도 대가이고, 나는 그저 '키 작은 프리데만’일 뿐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지금껏 아마도 나만 몰랐던 사실을 이 리뷰를 거의 작성해가는 시점에서야 알게 되었다. 유언에 따라 뒤늦게 발간된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동성애와 상업적 허리우드 영화에 대한 취향 등이 밝혀지면서, 그의 근엄한 지식인, 아버지, 시민의 이미지가 상당부분 깨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래, 역시 그랬군. 하였다.


전쟁 중 망명 지식인들의 조직화 문제(즉 지식인의 참여 문제)와 전후 독일의 책임을 둘러싸고 토마스 만과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증오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세부적인 사항은 차치하고, 둘 간의 어떠한 명백한 대조를 볼 수 있는데 - 격변기의 치열한 참여주의의 경향과, 개인주의적이고 귀족적인 성향 간의 대조를 - 나의 이성은 브레히트를 지지하되, 나의 감성은 만을 지지하니, 나에게도 토마스 만 못하지 않은 분열이 있는 셈인데, 문제는 항상 그거다. 어쨌거나 나는 [토니오 크뢰거] 같은 작품을 쓸만한 능력이나 재능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질투는 나의 힘이라, 말할 수밖에.


못된(?) 생각이지만, 그의 일기가 너무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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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2-0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에 세계 명작 어쩌구 하는 책들을 제법 봤는데, 유독 몇몇 작가들은 전혀 시작도 못한 경우가 있어요. 그 중 한명이 토마스 만이네요. 어쩜 단편 하나도 본 게 없는지. 보관함에 책이 또 한 권 늘어납니다.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 ㅎㅎ

happyant 2006-02-0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코' 재미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즐거웠어요. 토마스 만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는 캐릭터인것 같아요.^^일기를 읽고 싶은데, 어떻게 구해야 할 지를 모르겠네요.

urblue 2006-02-20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 뽑혔네요. 축하~

happyant 2006-02-2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그동안 봐 두었던 몇 권의 책을 살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오우아 2006-02-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도 이쪽에 관심이 많은데요. 좋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이리뷰 축하드립니다.

happyant 2006-02-2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비연 2006-02-22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좋은 리뷰이네요.

happyant 2006-02-23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기는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