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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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출근하고, 일 끝나면 퇴근하고 tv보다가 다시 잠이 들면, 어느새 다음날 아침, 그렇게 수십 년. 이처럼 일상은 대체로 안전하다. 바로 며칠 전 유럽의 한 나라에서는 끔직한 동시다발 폭탄테러가 있었고, 크고 작은 온갖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위험한 한국 사회'이지만, 어쨌거나 위험은 그것을 직접 겪기 전에는 결국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실, 기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텍스트 위에 구성된 이러한 안전한 일상의 사이사이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익숙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툭 던지듯 급작스럽게, 혹은 탑을 쌓듯 차분히 배치함으로서 대부분의 공포물이 성립한다. 공포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로부터 찾아온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부엌, 익숙한 거리, 익숙한 집 등등의 복제된 일상의 조각이 낯선(주로 잔혹한) 이미지와 마주치는 순간, 동공이 확대되고, 심장박동수가 증가하고, 침이 마르고, 소변이 마려워 오는 등, 우리는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일상의 틈입에 공포를 끼워 넣는 것이 호러가 성립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을 뒤집음으로써 공포는 ‘자극과 반응’이라는 단순한 조건반사적인 과정(그리고 그  와중에 온갖 상품을 팔아먹는 페스티벌의 과정)을 넘어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사회학적 시선으로 승화된다. 즉 우리가 공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일상'으로 만들면, 그것은 대체로 현실의 이면을 파헤치는 탁월한 괭이질이 되는 것이다. 바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처럼 말이다.

책을 낸 출판사는 몇몇 공포 영화 흥행작들의 설정상의 기원으로서 이 작품의 강점을 밀어붙이고 있는 듯 하나 이 책의 진가는 ‘무엇의 원류’라는 기원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대체로 어떤 작품의 가치를 기원적인 측면에만 둘 경우, 그것은 존경할 만한 것이 되는 반면, 읽기에는 별로인 것이 되기 쉽다) 오히려 이 책의 진가는, 공포를 일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공포의 극복조차 또 다른 공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그의 ‘문장과 구성’에 있다.

로버트 네빌이 흡혈좀비를 막아내는 - 집안을 수리하고 취미를 즐기는 - 과정은 매우 익숙한 일상적인 그 무엇이다. 문밖의 흡혈좀비들이 네빌의 ‘인간다움’을 갉아먹기 위해 고함지르고 공격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그 무엇이다. 네빌이 전설이 되고 난 이후에 펼쳐질 미래도 여전히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공포가 결코 특별하지 않은 어디에나 잠재된 것이라는 사실과, ‘현재’의 정상적인 모든 것의 종말이 결국 ‘끝’이 아닌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와 마주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로버트 네빌의 익숙함, 그것은 지금 세상을 사는 우리의 익숙함과 무엇이 다르지? 라고 말이다. 한번 물어보자. 모두가 개인이라는 철벽같은 울타리에 갇힌 사이에 밖에서는 한명씩 굶어 죽어 나가고, 어느새 ‘인간다움’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설이 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은 로버트 네빌이 살아간 그의 세상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고문 총 책임자를 대표자로 모시며 함께 사는 이 세상(여기에서 민중이 역사적 범죄의 공범이라는 몇몇 학자들의 지적은 너무나 쉽게 증명된다. 물론 이것이 막가파보다도 백만 배 더 나쁜 초대형 범죄자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혹은 민중에 의한 진보를 차갑게 회의하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살자를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함께 사는 이 세상, 살 빼서 드디어 잘 팔리는 몸을 소유하게 된 연예인을 스스로를 초월한 ‘깨달은 자’(무얼 깨달은 게지? 자본주의의 생리?)로 모시고 숭배하는 이 세상, 돈 버는 것만이 - 그래서 그것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구입하는 것만이 -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이 세상. 과연 흡혈좀비로 가득 찬 로버트 네빌의 공포스러운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 같은 말을 반복하자면, 흡혈좀비 바이러스에 적응한 또 다른 무엇으로 가득 찬 세상(로버트 네빌이 전설이 된)과 무엇이 다른가?(역의 역은 본래의 것?) 우리를 잡아먹는 진짜 무서운 것은 종이 위에도, 스크린 안에도 없다. 바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 괴물이 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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