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권하는 사회 - 신용 불량자 문제를 통해서 본 신용의 상품화와 사회적 재난 아연 민주주의 총서 15
김순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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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만으로 이토록 가슴을 먹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단 한 번 갚기 버거운 빚을 진 사람이 카드 돌려막기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과정에서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합리로 치장된 착취의 희생양이 되는지 이 책은 아주 잘 보여준다. 저자가 다루는 시기를 IMF 구제금융 직후부터 2천 년대 초반으로 보면 대략 10년 전 쯤이 되는데, 강산이 한 번 바뀔 때가 됐으니, 현재를 이루는 과거를 되새기고, 피로 쓰인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차원에서 매우 적절한 시점의 발간인 것 같다. 내가 워낙 과문해서인지 신용카드나 신용불량자 문제를 다룬 기사나 잡지의 특집은 많이 접했지만 이 정도의 짜임새와 데이터를 갖춘 책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10년 뒤에도, 20년 전을 돌아보는 소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분석이 필요한 많은 세세한 결을 지닌 책이지만 큰 줄기만 대략 이해한다고 할 때, 담긴 내용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원인이 후반에 등장하는 책의 순서를 재구성하면, IMF 직후 경제 회복의 임무를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김대중 정부는 책임성이 부여되지 않는 허약한 한국 정당체계의 토대에서 친서민적인 해결방안을 마련하기보다 재벌 친화적인 신용카드 남발을 통해 경기 부흥 및 세수 확대를 꾀한다. 그래서 실시된 것이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인 규제 개혁이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액이 늘고, 재벌의 참여가 독려되며, 이자율은 제어되지 않는다. (일부 방탕한 소비생활의 장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은 자신이 업을 복리 이율의 무게조차 제대로 모른 채 구조조정과 경기침체에 몰려 `카드질'에 빠져들고, 결과는 경제활동인구의 20%에 육박하는 신용불량자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지금 이 순간 나의 과소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든가, `부자되세요' 라는 광고 카피를 보며 무엇인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얼마간의 명확한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책은 세상의 어떤 주도적인 현상을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전통적인 의미의 잘 쓰인 사회과학 서적의 미덕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다. 한국 사회는 재벌이 만든 경제 위기를 이토록 휘황찬란한 소비문화로 돌파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빼앗았다. 

다만 본문에서 수차례 인용되고, 저자의 뒷 글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이름인, 최장집 현 고려대 명예교수의 그늘에서 책 전체가 벗어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눈앞의 현실의 기반이 된 과거를 만든 정책적 근거를 다루고 그 정책을 낳은 원인까지 다루려면 - 과거를 다루더라도 - 적어도 새롭거나, 혹은 미래 지향적이어야 할 터인데, 논의의 결론은 돌고 돌아 최장집 교수가 그토록 주구장창 십 수 년 전부터 외쳐온 정당정치의 허약함에 머문다. 그 전개는 내가 최 교수를 존경하는 만큼 흠 잡을 데는 없지만, 방금 나온 책의 일부로서는 게으르거나 지나치게 무난하다. 아울러 교양서적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수치와 딱딱한 표현이 많고, 학술서적으로 보기에는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점, 공부가 부족한 학생의 보고서처럼 같은 이야기를 중언부언 반복한다는 점은 책을 아끼는 만큼 지적할 수밖에 없는 단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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