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0년에 대한 하나의 해석 : 민주주의자의 퍼스펙티브에서

최장집(고려대 정외과 교수·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문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1) ‘해방 60년’을 말한다는 것은,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시작된 냉전의 결과로 분단된 지난 60년의 역사와, 우리가 ‘한국’이라고 부르는 남한의 국가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자족적인 국가이자 주권국가로서 성장한 한국현대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오늘의 시점에서 전망해 볼만 하고, 또 그래야만 할 만큼 짧지 않은 긴 시간이 흘렀음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오늘의 시점에서 정부는 정부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시민운동은 시민운동대로, 언론이나 출판은 또 그것대로 해방 60년을 중요하게 여기고 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런데, 정부가 주도하는 다양한 기념행사들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해방 60년을 앞세우고, 언론과 방송매체를 비롯하여 다채로운 이벤트성 행사도 많고, 적잖은 예산이 고구려사 연구나 식민지시대 연구에 주어지고, 과거사청산 문제가 주요 정부정책으로 추진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 현대사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과 제대로 대면하는 성찰적 이해나 관심, 연구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해체 또는 소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민주화로의 전환의 과정에서 운동의 역사적 기초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한국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냉전 반공주의와 보수적 산업화를 주도했던 권위주의가 해체된 민주화이후의 시기에, 왜 소멸되고 있는가? 이는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특성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한다.

(2)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해방 60년을 주제로 한 행사나 논의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경우 ‘성찰 없는 현대사 이해’를 특징으로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오늘의 한국사회, 한국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한 회피 내지 문제의식의 결핍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최근 년에 이르러 고구려사나 한일관계사와 같이 고대사나 조선후기에서 식민지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관한 것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대학의 역사학과에서조차 해방 이후의 한국사, 다시말해 해방 60년사에 대한 교육이나 강의 자체가 공백으로 남아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는 “연대기적 역사는 죽은 역사”이고 “역사는 당대의 역사” (contemporary history)라고 말했다.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그는 철학, 예술, 문화와 역사를 동일시하고, 현재를 한 사회의 문화발전의 가장 성숙한 단계로 상정하면서 그것의 실현 또는 표현을 역사라고 이해했다. 문화적 정신생활과 역사의 통일성, 그것의 발전적 과정으로서 역사를 생각하는 그의 관념철학적 역사관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는 준거가 아니라 현재가 역사를 말하는 준거라는 점에서 그 말은 현재에도 큰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서는 적어도 대학의 역사교육을 중심으로 볼 때 고대사나 근대사는 존재할는지 모르지만, 현대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크로체의 정의로 본다면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3) 10년 전 종전 50주년을 맞은 1995년 일본에서는 그 의미를 둘러싼 한 집중적인 토론이 있었다. 이와나미서점이 출간하는 월간지『世界』는 한일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패전 50년과 해방 50년: 화해와 미래를 위하여”라는 주제의 특집호를 낸 바 있다. 두 나라가 종전에 대해 상극하는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 즉 일본은 종전을 패전으로 인식하고 한국은 종전을 해방으로 인식한다는 것으로부터 양국의 역사인식의 문제를 접근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이 종전 50년의 의미를 얼마나 잘 축약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의 종전을 패전으로, 한국에 있어서 종전을 해방으로 정의한 것으로부터 이미 논의의 방향과 범위, 이를 둘러싼 이성적 사고과정과 그 결과는 규정되었다. 이 정의는 한일관계의 특징적 단면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의 것을 설명하는 데는 커다란 한계를 갖는다. 종전을 패전 50년으로 정의하는 것의 핵심은 체제의 연속성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 정의는 전후 일본의 정치 및 사회체제가 전전 체제와 상당한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후 보수적인 정치 및 사회체제가 구축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한국의 “해방 50년”은 전전과의 단절, 비연속성을 핵심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해방 이후의 사태에 대해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분단과 남북한 대결구조는 통일된 민족국가건설의 실패 내지는 좌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통일된 민족국가의 복원에서 해방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일부는 일제식민지하의 독립운동세력들 사이에서의 어떤 컨센서스가 있었던 것으로 상정하는 이른바 “건국정신”이나 “건국이념”을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분단을 해방이후 한국역사의 가장 중요한 일탈로 해석하면서 한국현대사를 “분단시대”로 정의하곤 한다. 건국이념을 강조하는 것이나 분단시대로 정의하는 것이나 다른 점이 있다면, 건국이념을 통하여 문제를 보는 경우 통일된 국가의 정당성을 이론의 여지없이 남한 즉 한국을 중심으로 접근하지만, 분단시대라고 규정하는 경우 통일된 국가가 어떤 성격의 국가인가에 대해 분명히 규정하지 않는다는 정도일 뿐, 양자 모두 통일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며 통일된 국가를 완성된 민족국가로 상정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 점에서 양자 모두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반영한다 할 수 있다. 이들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한국 역사를 관통하여 면면히 흐르는 어떤 민족적 과제로부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흐름이 단절된 것에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부정적 문제의 근원을 찾고 역사의 복원을 강조하면서 이를 가로막는 일탈의 역사에 대한 청산을 개혁의 중심과제로 삼는다. 오늘날 과거사 청산문제가 민주정부의 최대 개혁사안으로 부각된 데에는 이러한 역사관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민족주의적 이념과 규범, 그 가치의 연속성으로 이해할 때, 좌우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양극화에서 전쟁으로 이어진 엄청난 폭력의 사태를 동반한 분단국가의 건설,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경험과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그 이후 남북한 간 사회구조와 발전정도의 극심한 비대칭적 차이 등이 가져온 여러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위기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즉 분단이전의 역사로의 복원을 강조하는 동안 분단의 과정과 분단된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변화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훨씬 취약해졌다.

(4) 앞에서 말했던 민주화이후 이른바 “현대사의 해체”는 민족주의적 역사관 내지 역사이해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바꾸어 말하면 민족주의적 역사관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관념적으로 도식화된 관점을 통해서는, 한국사회의 변화된 현실을 토대로 현대사를 재구성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오늘의 문제를 보는 관점의 상실을 결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역사로부터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점 즉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황과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로부터 과거를 되돌아보는 방법으로 현대사를 이해하고 싶다. 그러면서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한국의 현실 내부로부터 운동의 중심세력에 의해 제기되었고, 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기능하였던 민중주의적 이념과 가치의 중요성을 불러들이고자 한다. 한국현대사 60년에 대한 관점은, 한국 국가의 성격과 발전방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그 중심에 포괄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문제는 컨센서스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를 둘러싸고 문제설정과 해답이 자동적으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해방 6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먼저 해방 60년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분단시대와 같은 민족주의적 문제정의가 충분치 않다면 이를 보완하기 위한 또 다른 관점과 접근이 발전해야 할 것이다. 이글의 목적은 이 문제를 보는 필자의 견해를 말하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중심의제, 그리고 민주화

(1) 필자는 해방 60년의 한국현대사를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분단국가의 건설, 권위주의적 산업화, 민주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시기는 각 시기가 별개로 존재하기보다는 상당한 정도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누적적이고 중첩적인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해방이후 냉전초기 시기 분단국가의 조건이 6,70년대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동인을 만들었고, 이 두 시기의 문제점들이 누적적으로 작용하면서 1980년대 본격적인 민주화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앞선 두 시기는 민주화의 동인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의 성격을 규정하고 발전을 제약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민주화를 중심으로 현대사를 보는 이유는 민주화의 동력들이 한국사회 내부로부터 일차적으로 성장했고 그 동력이 민주화를 이끌어냈으며, 이러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 참여했다는 데 있다. 나아가 향후에도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민중적 참여의 폭이 확대됨과 아울러 그 역할이 커지는 것을 중시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는 결국 민중이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해방이후 냉전시기 분단국가 건설은 그 동력이 일차적으로 외부로부터 주어졌고, 타율적 성격이 매우 컸다는 것을 중요한 하나의 특징으로 한다. 미국은 분단국가의 건설자로서 냉전의 국제적 구조에서 신흥국가가 해야 할 국제정치적 역할을 부여하고, 이 새로운 국가에 자유주의-민주주의라는 기본이념을 부여했으며, 또한 정치체제의 기본구조를 창설한 ‘제도건설자’였다. 또 다른 특징은 분단국가건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이 매우 협애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지원 하에 분단국가를 건설했던 리더십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라고 하는 보수적 두 분파의 연합에 의한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보다 넓은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민족독립운동 세력들과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희구했던 광범한 사회세력은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정치사회적 기반의 협애함은, 분단국가 건설과정에서 높은 수준의 폭력을 동반하는 탈동원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초기 분단국가의 정당성과 헤게모니는 매우 취약했다고 하겠는데, 최초의 공화국 이승만정부가 1950년대를 거치면서 권위주의화한 것은,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회가 갖는 많은 전통적인 사회 및 권위구조 그리고 매우 낮은 경제발전 수준에서 허약한 중산층 등의 조건과 관계가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직접적으로는 초기 분단국가 건설을 둘러싸고 사실상 내전이나 다름없는 첨예한 갈등이 표출되고 국가의 정당성과 헤게모니가 크게 도전받았다는 사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한국의 산업화는 냉전체제하에서 반공의 보루로서 분단국가가 경제적으로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는 기능적 요구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한국전쟁은 초기 불안정했던 반공주의를 중심이념으로 하는 분단국가가 이제 국가에 대한 민중의 충성과 지지의 측면에서 자생력을 갖게 한 하나의 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6,70년대의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그렇지만 권위주의 산업화가 순전히 냉전체제의 역할이 부여하는 외적 동인 때문에, 그리고 외적으로 좋은 조건이 주어졌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못했던 박정희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통하여 산업화라는 실질적 변화를 통해 사후적으로 정당성을 보전하고자 했다는 능동적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말 그대로 권위주의정부가 주도하는 산업화를 의미한다.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고속성장을 목표로 국가-재벌기업의 연합을 통해 중심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자들의 참여를 정치와 생산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권위주의는 고도성장을 추동하고, 고도성장의 성과는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구조를 통하여 권위주의와 경제발전은 병행되었다. 권위주의산업화의 구조적 결함은 무엇보다도 그 발전체제가 민주적 요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체제란 국가가 앞장서 자본을 증대하고, 노동을 억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로부터의 소외는 발전의 성과를 분배하는 과정에서의 소외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4) 냉전 초기 분단국가의 건설과 권위주의적 방법에 의한 안정화, 그리고 권위주의국가에 의한 산업화가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던 동안 이들 체제의 구조적 결함은 커졌다. 이들 체제가 크든 적든 억압적 요소를 안고 있었던 한, 그 체제 내부로부터 이러한 체제를 부정하거나 개혁하기를 바라는 반체제적 사회세력들을 성장시키게 된다. 민주주의를 중심적으로 추동했던 운동세력들과, 이들이 주도했던 민주화투쟁 시기를 통해 형성된 개념으로서 “민중”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서 “내부로부터”라는 말은 중요하다. “내부로부터”는 민중적 요구라는 말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분단국가의 건설은 압도적으로 외적동인이 컸고,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외적동인과 내적 자원이 혼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민주화는 압도적으로 내적동인이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는 분단국가와 산업화를 주도한 권위주의 체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결함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만약 이들 권위주의 체제가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4.19 학생혁명에 의한 이승만정부의 붕괴나, 유신체제의 붕괴, 이후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대규모 민주화 운동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 4.19 학생혁명,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 사이 반유신운동과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이 제도권 내 정당과 정치인들이 아니라 제도권 밖의 대학생,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 지식인, 노동자, 농민 등과 같은 소외된 생산자 집단들이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이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모두 권위주의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었다.

운동의 전개는 탈권위주의 민주화로부터 시작하여 냉전시기 분단으로 만들어진 민족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과 사회경제적 차원의 민중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으로 심화되었다. 민족문제의 자율적인 해결은 권위주의화한 분단국가가 그 이슈를 주체적으로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억압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이를 첫 번째 의제라고 한다면, 민중문제의 해결은 권위주의적인 산업화가 재벌과 연합하고 노동을 배제하고 따라서 분배를 외면하는 성장지상주의를 중심으로 한 경제노선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이를 두 번째 의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의제의 성격과 관련하여 초기 분단국가의 건설을 주도했던 이승만정부와 4.19학생혁명, 그리고 권위주의 산업화와 1970년대 말 반유신운동과 1987년 6월항쟁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두 운동의 파고 사이에는 운동을 주도한 중심세력의 구성, 운동의 규모, 운동을 통해 제기된 의제에 있어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선 1950년대의 통치체제에 대응했던 4.19학생혁명은 그 중심세력이 학생과 지식인이었으며, 운동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은 학생중심의 민주화운동이었으며, 운동과정에서 제기된 주요의제는 민족문제였다. 4.19학생운동 이후 1960년대의 한일국교정상화반대운동도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전후 한일관계를 재정렬하려는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같은 민주화운동이라 하더라도 1960년까지의 운동과는 여러 면에서 크게 달랐다. 비록 대학생들이 운동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노동자, 농민을 포함하는 사회경제적 부문들이 광범하게 참여했고, 학생운동의 성격 또한 “노학연대”라는 말로 표현되듯 이들 세력과 결합했으며, 그 규모는 군부권위주의의 폭력적 기제를 압도할 정도로 대규모적이고 전사회적인 것으로, 운동의 성격 자체에서부터 민중운동적 내용을 강하게 드러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나? 말할 것도 없이 권위주의적 산업화가 이 양자 사이에 위치한다. 권위주의산업화는 통치의 중심세력을 식민지하에서 성장한 전통엘리트에서 근대조직으로서의 군부엘리트로 변화시켰고, 광범한 경제행정 관료기구와 국가의 권위주의적 강권기구를 중심으로 한 국가관료기구를 발전시켰으며, 냉전반공이념과 발전(성장)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경제적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강화했다.

(5) 분단국가의 건설 자체가 일제독립운동시기와 해방직후의 상황과는 매우 다른 한국의 정치체제와 사회를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권위주의 산업화는 1950년대 한국과는 매우 다른 국가와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체제와 사회구조의 조건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 역시 매우 상이한 것이다. 요컨대 강력한 국가의 지배구조에 저항하는 역시 강력한 민주화운동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특별한 현상은 민중이 민주화운동의 사회적 기반이자 정치의 중심적 행위자의 하나로 나타났다는 것, 국가영역 밖에서 시민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 발전했다는 것, 그리고 일제하 독립운동, 냉전과 분단국가의 건설, 남북한관계,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한미관계에 대해, 과거 냉전반공주의 이념이 부과했던 역사의 이해방법과 크게 대립하거나 상이한 역사인식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민주화이후 두 의제의 변형

(1) 한국에서의 민주화가, 강력한 반공권위주의국가와 권위주의적 산업화가 한세대 남짓한 짧은 시간 내에 한국사회의 기본구조를 사실상 완전히 재편해놓은 조건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무엇보다도 그 결과는 보수적 지배질서 (이를 ‘구체제’라고 부르겠음)를 유지하고자하는 기득구조와 그에 대응하는 민주화운동 사이에, 권위주의를 추동했던 사회세력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세력 사이에, 지극히 첨예한 긴장과 갈등의 표출로 나타났다. 그들은 각기 다른 (분단)국가에 대한 인식, 냉전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 발전과 성장에 대한 방법과 가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으로 대립했다. 구체제의 지배구조가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이었던 것만큼 그에 대응하는 민주화운동의 비전과 이념은 안티테제적이었고, 나아가서는 운동의 이념 속에는 혁명적 급진성을 포함하게 되었다. 1980년대 현대사의 비판적 인식과 이른바 ‘사구체논쟁’ 속에서의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의 발전은 그러한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NLPDR론의 혁명적 급진성이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앞서 살펴본 한국 민주화의 실질적 두 의제를 축약한다는 것이다. 구체제의 엘리트들과 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들이 생각했던 민주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극을 이루다시피 달랐다. 구체제의 정치엘리트와 경제적 부르주아지는 권위주의를 통해 현상의 유지(status quo)가 더 이상 어렵게 되었을 때, 정치학자 디 팔마 (Di Palma)가 말하듯이, 민주주의가 자본의 재생산과 기성체제의 유지에 큰 해악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면서, 그들이 일정하게 적응해야 할 체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운동의 중심세력은 민주화란 구체제 엘리트들이 향유했던 특권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자 그들을 언제나 지배적 위치에 있도록 했던 구체제의 게임 룰과 사회적 기반에 대한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민주화란, 구체제가 구축한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체제 내에 다시 위치시키고 정렬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민주주의의 근본 문제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체제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양자 간의 갈등을 어떻게 민주주의에 의해 제도화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2) 권위주의와 억압의 중요한 정치적 의미의 하나는, 그것이 대안을 준비하는 정치적, 이념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억압의 강도가 강한 것만큼 그 안티테제는 급진성을 갖는다. 더구나 권위주의의 붕괴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면, 대안의 준비는 더더욱 어렵다. 이러한 사태는 한국의 근현사에서 되풀이 되는 현상이기도하다. 종전과 해방은 정치공간을 급작스럽게 열었고 제도화가 충분히 이루어지기 전에 제어불가능한 혼란을 만들어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사태 역시 그것과 큰 차이는 없다. 이 과정에서 사태의 변화를 가져온 운동의 중심세력들은 제도화의 과정에서 대체로 소외되기 일쑤였다. 해방이후 정국, 4.19혁명 이후, 6월항쟁 이후는 그와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운동을 통해 변화를 유발한 그룹이 제도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과 요구의 표출은 사회의 중심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체제비판 세력에 의한 도전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그들 요구의 일정한 부분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기존의 제도내에서의 엘리트들은 이들의 요구를 포섭(co-opt)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한국현대사에서 중요한 특징의 하나였다. 필자는 이를 “수동혁명”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는 제도권과 비제도권 간의 괴리, 제도화된 부분의 사회로부터의 괴리에서 기인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사회로부터 괴리된 제도권의 문제는 6월항쟁 이후 정치적 대표체제가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이기도 하다. 정당과 정당체제는 현대 대의제민주주의에 있어 중심제도이다. 그러므로 정당체제의 수준은 곧 민주주의 발전에 직결된다. 민주화이후의 정당체제가 구체제 하에서 발전한 정당체제를 얼마나 변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성격을 형성하고, 발전방향에 영향을 미치는데 결정적 변수라 하겠다. 구체제의 정당체제는, 매우 협애한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 내에서 제도화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구체제의 지배적 이념이요 가치라 할 냉전반공주의와 발전주의을 중심 내용으로 했으며 또한 그 틀이 유지되는 조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제약하는 조건이었다. 그 부수적 결과의 하나는 지역감정의 동원과 지역기반에 의존하는 지역주의 정당체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민주화의 중심적인 두 의제를 다룰 수 있는 정당체제가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민주화 이후의 정당체제는, 운동의 중심세력이 참여함으로써 그것이 변화의 계기를 가졌던 것도 아니고, 한국현대사의 중대과제이자 운동의 두 중심의제가 정당 간 경쟁구조 내로 포섭되지도 못했다.

(3) 민주화이후 운동의 중심세력이 제도화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데는, 구체제로부터 민주화로의 전환이 급속했다는 이유와 더불어 이 전환과정에서 그들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대안이념이나 대안적 가치를 조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크게 기인한다. 냉전시기 분단국가의 정착은 사회의 탈동원화를 위한 높은 수준의 폭력과 억압에 크게 의존했고 이를 주도한 권위주의의 중심이념은 냉전반공주의와 발전주의였다.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발전모델은 미국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한국사회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어떠한 대안이념이나 사회적 가치를 제도권의 영역에서 발전시키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민주화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대안이념으로서 NLPD는 이런 조건에서 등장했다. 이 대안이념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모순적 요소를 함축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구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민주화의 핵심의제를 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혁명적 급진성, 낭만주의, 추상적 도식성을 많이 함축했다. 민주적 틀 속에서 어떻게 이를 의제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조건에서 중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권위주의 시기의 한국적 조건에 있어 강력한 권위주의와 맞서기 위한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이념과 집단적 열정의 동원은 필연적이었다. 냉전시기 동안 반공이념은 지배적 이념이 아닌 어떠한 이념적 논의와 발전을 어렵게 만들었다. 자유주의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한데, 첫째는 한국의 부르주아지들이 자유주의를 내면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주의를 주창할 역사적 계기를 갖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그들은 식민지의 종속적 부르주아지였고, 해방이후 특히 권위주의산업화의 조건에서 그들은 대기업집단을 창출한 권위주의국가의 종속적 파트너로서 체제를 지탱하는 중심 지주로 동원되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불러들였던 서구의 “패권적 부르주아지”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리고 권위주의의 지배적 이념의 범주 내에 머물렀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는 한국의 민중들도 자유주의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반공세력인 “자유총연맹”이라는 명칭이 상징하듯, 자유주의는 반공주의의 레토릭으로 수용되었고 외부에서 부여된 어떤 서구적인 것을 상징하는 것, 그리고 냉전 하에서 상당히 억압적 이념으로서 나타났다. 물론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를 통해 서구적 의미에서 (고전적)자유주의가 발전하고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6,70년대의 산업화의 결과는 한국에 국가의 개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토록 하는 사적영역과 시장자율성의 요구를 대폭 확대했고, 권위주의 국가에 도전하는 시민사회의 운동부문을 창출했으며, 노동자, 농민과 같은 중요 사회구성원들에게도 보편적인 시민권에 대한 요구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한국의 민주화는 자유주의적 계기를 갖지 못했다. 자유주의를 담지한 정치, 사회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물론 사회민주주의적 계기도 갖지 못했다. 결과는 구체제에서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여전히 민주화이후 사회에서도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다.

(4) 한국의 민주화가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화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조건은, NLPD의 이념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제거하고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이념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애초 그것은 현실 속에서 실현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기보다 현실에 존재하는 분단국가와 냉전질서, 그리고 남북대결이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이상주의적인 안티테제를 특징으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화이후의 조건에서는 현실의 핵심문제를 다룰 수 있는 내용으로 재구성될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 이념을 대표하는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정당체제 내로 들어오고, 그럼으로써 구체제하에서의 정당체제가 재편성되고, 그 정당이 선거경쟁을 통해 다수당이 되고 정부가 되어 그 개혁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것일 것이다. 현실의 상황변화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의 상황변화는 NLPD론이 급속히 분해되고 담론의 수준에서도 소멸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NLPD는 민족문제에 초점을 둔 NL과 민중문제에 초점을 둔 PD가 상호연계성을 잃고 분리되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하나의 이념으로서 NLPD의 장점은, 한국의 역사로부터 생성된 체제가 안고 있는 핵심적 두 문제를 상호연관성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NL-PD의 연계가 유지될 때 서로를 뒷받침하면서 상승적으로 그 의미를 크게 한다. 연계가 유지될 때, 민족문제는 민중문제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반대로 민중문제는 민족문제의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계가 단절될 때 상대를 밀어냄과 극단으로의 쏠림, 하나가 다른 것을 희생하여 자기정당화와 자기권력의 증진을 도모하는 분열과 적대성을 창출할 수 있다. 특히 NL의 경우가 그러한데, 무엇보다도 PD적 요소가 뒷받침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NL은 운동의 열정과 에너지로 충만된 하나의 민족주의가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NL이 이러한 민족주의가 될 때, 남북한의 평화공존의 모색, 민족지상주의적 통일의 추구, 반일 혹은 반중의 민족주의적 대응, 세계화에 대한 경제적 민족주의 등이 정서적으로 교묘하게 융합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민주화이후 정치지도자들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적 이념의 하나이자 정서인 민족주의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어떤 경우는 전통적인 한미공조에 대한 대안으로서 남북한 민족공조를 통한 대북평화정책을 위해, 어떤 경우는 동북아평화에 크게 기여하기 어려운 반일정서의 동원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반중정서의 동원을 통해, 국내정치의 문제와 인접국가간 관계의 문제를 연계시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적 정서의 동원이나 이슈의 활용은 민중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저평가하게 하거나, 나아가서는 민중문제를 민족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분열적 요소로 보게 만들기까지 한다. NL-PD의 분리는 시민사회 내에서도 뚜렷해졌다. 민족문제와 민중문제가 그 연계성을 상실하면서 민주화이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을 분리시키고 서로 각자의 내부 힘들을 약화하는데 기여하는 바 컸기 때문이다.

(5) 민주정부들이 민중문제와 관련된 정책영역, 즉 경제정책과 노동/사회정책에 있어서 대안을 갖지 못할 때 결과는 매우 역진적이다. 민주화이후 상황의 한 중요한 특징은, NL-PD의 두 구성요소가 분리되고 PD적 문제의식이 약화 또는 소진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의 결과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대안형성의 틀과 방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세력화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의 결과는 민주정부들이, 필자가 “신자유주의적 정책레짐”이라고 불렀던 정책 즉, 구체제 하에서 완결된 권위주의산업화 발전모델에 워싱턴컨센서스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결합한 정책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게 된 것이다. 정책노선만 문제가 아니라 권위주의산업화 시기 국가가 목표달성을 위해 드라이브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신자유주의적 기조위에서 성장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극히 과격하게 추진한다는 것이다. 헤게모니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고 효과를 미치는 영역은, 바로 보통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이 핵심이 되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제 및 사회-노동정책이라고 하겠다. 민주화이후 민주정부들이 발전시켰던 신자유주의 정책레짐은 경제영역이나 사회의 구조와 계층화에 있어서나 미시적 삶의 영역에 있어서나 여러 형태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빈부격차를 악화시키고 사회적 양극화를 확대하였고, 사회해체 효과를 심화시켰다. 보다 직접적으로 재벌대기업을 세계적 수준의 대기업으로 발전시키면서 수익과 생산성을 가파르게 성장시키는 동안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을 약화시키는 생산체제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한국경제를 선도하는 소수업종에서 재벌기업의 빠른 성장은 가능했으나, 국가 전체의 성장은 제자리걸음을 했고, 고용의 대부분을 흡수하는 중소기업의 침체로 노동시장의 질은 나빠졌으며, 재벌 대기업에서의 정규직-비정규직노동시장의 분화는 대다수 노동자의 시민권과 복지의 질을 크게 악화시키고 불평등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경제적 기반의 침하와 더불어 한국경제의 민주적 발전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 나아가 사회경제적 문제해결을 위한 공적 집합적 결정능력과 수행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정치의 구조도 취약해졌다. 신자유주의적 정책레짐이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없는 민주주의’, ‘민중 배제적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그 정의에 있어 보통사람들이 그들의 이익, 요구, 열정을 그들의 대표를 통하여 실현하는, 보통사람들 스스로의 통치체제이다. 즉 민주정치는 공공선을 결정하고 창출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수의 힘이 지배적인 결정원리인 민주주의 하에서는 보통사람들의 의지와 권력이 권위주의와 같은 다른 엘리트중심 체제와 비교하여 더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민주주의의 경험에서 가장 큰 역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와 리더십이 IMF금융위기 이후, 구체제의 성장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노력 없이 구체제의 성장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이고 무매개적으로 그리고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드라이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 민주정부들에게 기대한 것은, IMF 위기가 부과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수용하면서도, 이와 병행하여 민주주의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구체제가 구축한 경제체제를 구조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민주정부들의 정책방향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레짐과 노동없는 민주주의는 구체제의 사회구조를 더 강화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양극화를 증폭시켜왔다. 한국현대사가 냉전반공주의 이념과 분단국가의 발전--고도성장과 권위주의적 산업화--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동안, 우리사회는 소수의 대규모 조직들, 몇 개의 대기업집단, 몇 개의 대학, 몇 개의 언론사, 몇 개의 강력한 이익집단들과 그들 간의 상호 연계망에 의해 지배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한 사회가 동심원적 구조를 갖는 것을 말하는데, 그리하여 모든 사회적 힘이 중심의 정점으로 초집중화하면서 특권 계층 간의 폐쇄적 순환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반면 서민대중의 보통사람들은 그들의 이익과 요구를 조직하고 대변함에 있어 별다른 진전을 얻지 못하고,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스스로를 대표하는 자율적 권력의 중심으로 성장하지 못한 힘없는 익명의 다중으로 떨어지고, 따라서 자주 그들은 이데올로기와 대중조작에 의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했다. 경제적 생산체제에서만이 재벌대기업과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이 양극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주요영역에 있어서도 중간이 존재하지 않는 양극화는 최근 사회구조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양극화, 즉 잘 발달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경제적 자원에 있어서나 강력한 대규모 조직과 그 중심과 주변에서 기능하는 엘리트집단을 한편으로 하고, 힘없고 조직-대표되지 못한 다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것이 한국사회 양극화의 또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대규모 조직과 상층엘리트 집단을 통째로 비민주적, 반민주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과장되었거나 도식적인 비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대체로 보수적이라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의 매우 특징적인 양상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헤게모니적 사회구조의 재생산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구조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현실과 그것을 인식하는 관념적 도식, 관념적 기제 사이의 괴리를 만드는 것을 중심적인 기능으로 하고, 사회적 현실과 관념적 도식간의 괴리를 통하여 스스로를 존립시킨다. 그럼으로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현실에 기초한 자유롭고 다양한 사고의 생성과 발전을 가로막는 억압적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강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가치의 다원주의와 상상력과 창조적 사고, 그리고 대안이념들의 발전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다원적 발전이 억압된다. 결과는 냉전반공주의나 발전주의와 같은 일괴암적 유일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을 모델로 하는 워싱턴콘센서스와 노동없는 민주주의 또한 대표적인 지배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한국사회에 유일가치와 몽매주의를 만연하게 한다. 민주화이후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치적 수준에서의 민주화가 경제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넘쳐흐르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거대조직과 기득이익들의 보수적 대응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산 경험이 꿈틀거리는 현실, 변화를 요구하는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도전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갖는 강한 효과는, 민주화이후 집권정당과 집권엘리트들이 그것을 변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통해 여전히 발현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한국 사회의 과제, 한국 현대사의 과제

(1) 앞서도 말했듯이 필자는 해방 60년의 역사를 어떻게 보고, 앞으로 한국사회가 어디를 지행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란 곧 오늘 한국민주주의가 당면한 과제를 통하여 조망할 수 있다고 본다. 역사는 오늘의 문제와 단절된 채 과거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현재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를 둘러싼 정치, 사회적 갈등의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불러들여지고 재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에게 해방 60년은 한국민주주의의 과제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이 점에서 필자가 보는 역사이해의 방법은 한국의 현대사란, 더 거슬러 올라가 한국의 근대사란 곧 민주주의를 향한 전개과정이라는 것, 그러나 그 과정은 어떤 단선적 발전과정을 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전진과 후퇴,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고, 사전에 어떤 진행과정이 누구에 의해서 또는 외부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가 사회 내부로부터 만들어가는, 그리고 다양한 방향이 선택될 수 있는 열린 역사의 진행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대체적인 방향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2) 이 문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 이념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념은, 그것이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가 커질 때 이데올로기가 되고, 보수적 체제에 의해서든 혁명적 체제에 의해서든 정치적 억압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이념은 이데올로기의 성격보다는 현실을 축약하고, 그 축약 속에 사회의 구성 원리와 가치, 규범, 신념의 요소들을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NLPD의 문제를 다시 불러들일 필요가 있다. 필자의 관점에서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국가가 형성되고 경제가 발전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내부로부터 제기되었고 민주주의의 근본가치라고 할 민중성을 관심의 중심에 두는 것이었으며, 실천적이고 지적인 상상력이 자유의 공간에서 표현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매우 한국적인 해방의 이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보다는 운동이라는 집단적 열정이 분출했던 시기에 투쟁을 위한 지적 무기로서 출현했고, 또한 기존 지배이념에 대한 안티테제였기 때문에, 현실의 구체적 기반이 약하며 민주주의를 최대강령적(maximalist) 이념의 관철로 이해하는 관념적 혁명성의 한계를 갖는다. 최대강령적 혁명은 민주주의의 작동과 병립하기 어렵다. 혁명적 사태를 동반하면서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될 수는 있으나, 민주주의는 항시적인 민중동원과 운동을 통해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한 정치적 참여와 법 앞의 평등의 권리를 가지며, 공공선을 창출하는 집합적 결정과정에 개인이 개별적인 단위로서 또는 유사한 이익과 요구를 조직하는 방법을 통하여 참여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그것은 경쟁하는 이익의 평등한 참여가 보장된 제도의 틀 안에서 갈등하는 이익들 간의 경쟁을 허용하고 타협하도록 이끄는 체제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운동이 중심이 되는 비상한 시기의 체제가 아니라 일상성 속에서, 다시말해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에서의 일상적 관심사와 더불어 작동하는 체제이다. 그럼으로 이 체제에서는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포괄하는 최소강령적(minimalist) 이념이 가장 효과적이다. 즉 혁명적 NLPD는 보편성과 아울러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이념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환 과정에서 한국의 NLPD론은 유럽에서 발전한 사민주의의 이념이나 실천, 또는 자유주의 이론으로부터 분기한 “자유주의적 평등주의”(liberal egalitarianism)와 같은 보편적인 이념과의 대화를 통해 그 내용이 보편화되고 심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구 민주주의가 보여주었던 여러 사례들의 맥락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서구 민주주의의 궤적을 표시할 수 있는 간략한 도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의 극을 신자유주의로 하고 다른 한편의 극을 사회주의로 하는 양극 사이의 스펙트럼에 민주주의의 여러 사례들을 위치시켜 본다고 해보자. 신자유주의의 축은 공적영역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국가영역/역할의 축소, 사적소유 불가침의 원리와 경쟁과 시장효율성의 극대화를 대변한다. 사회주의의 축은 공공부문의 발전과 공적영역의 확대, 사적 시장영역의 축소, 규제강화, 정부지원의 확대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작동이 양극의 어느 것이든 극단으로 갈 때 그 체제의 기반이 약화되고 민주정치의 실천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전자의 신자유주의적 극단은 공공선의 창출과 집단적 요구에 적대적이고 정당한 권위를 부정하기 때문에, 후자의 사회주의적 극단은 개인적 선호를 만족시킬 기반을 없애고 정당성 없는 정부행위를 통제할 제도적 조건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적 제도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갈등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어떤 최적의 배합을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그 중심 내용으로 한다. 한국사회는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민중주의는 민주적 국가의 역할을 통한 개혁의 프로그램들, 즉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노동을 정당한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생산체제의 각 수준에서 노동자/조직노동의 참여에 의한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며, 분배구조의 개선과 사회복지권의 확대를 포함하는 공동체와 공공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의 원리로 실현되었다. 오늘의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게 되는 것은, 민주정부의 개혁정책 내용들이 사회주의적 극의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신자유주의적 극단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신자유주의적 독트린과 그에 입각한 경제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 한다면, 최소한 여기에 노동참여, 사회복지 및 사회통합을 가치로 하는 사회적 유럽 (social Europe) 모델의 내용이 가미될 수는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발상은 이데올로기이며 민주주의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례가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양자 사이의 결합이 가능한 스펙트럼은 폭넓게 열려 있으며, 그 결합을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 하는 것은 민주정부가 정치와 정책을 어떻게 운영하는가에 따른 함수적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4) 다른 글에서도 계속해서 강조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정당체제의 저발전에 기인하는 바 크다. 그것은 자본주의시장경제와 분배구조, 즉 사회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갈등과 균열을 대표하고 이를 해결하면서 사회통합에 이바지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경제적 해결이라는 문제보다도 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갈등과 통합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두루 알다시피 한국의 현대사는, 해방이후 초기 건국과정에서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양극화로 인한 내전적 상황과 6.25전쟁으로 나타난 실제의 전쟁을 통하여, 그리고 남북한 분단과 항구적 대결구조를 통해 어느 나라 보다도 큰 폭력과 보통사람들의 많은 희생,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균열과 갈등을 경험했다. 이 갈등과 균열위에서 군부엘리트 지배와 권위주의산업화는, 경제발전이라는 긍정적 효과 못지않게 엘리트지배의 공고화와 노동배제/소외라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고, 또 다른 커다란 균열과 갈등구조를 창출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이를 냉전체제하에서의 제1의 갈등에 이은 제2의 갈등이라고 말했다. 한국사회에서 갈등이 쉽게 증폭되게 되는 데는 이 두 갈등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민주화란 무엇을 의미하나? 민주화는 이러한 중첩적 갈등으로부터 배태되고, 분출되었고, 그것은 이 갈등을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틀을 통해 재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는다.

해방정국 이후 중심적인 정치담론의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캐치플레이스였던 “대동단결”에서부터 오늘날 보수파든 진보파이든 모두가 내세우고 있는 정치, 사회, 문화, 세대 간의 “갈등 극복과 통합”이라는 말에 이르는 것이라 하겠다. 분명 이러한 일종의 ‘통합의 담론’은 우파적/보수적 성격을 갖는다. 그 말 자체가 틀리다기보다, 역사와 현실에서 창출된 갈등을 은폐하고 갈등의 표출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언어적 표현으로 자주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언어가 쉽게 이데올로기화하고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정치문화적 특성을 발전시키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한국의 정당체제를 협애한 보수적 이념의 한계에 머물게 만들면서, 사회문화적으로 대안적 이념에 대한 전체주의적 억압을 일상화하고 민중참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장벽으로 기능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갈등과 균열의 표출과 정치적 대표를 부정시하는 한 통합의 이데올로기와 담론은 대안의 봉쇄, 곧 이데올로기적 전체주의를 말하는 것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한국의 정당체제는 사회의 중심적 갈등과 균열을 대표해야 하며, 기존의 지배적 이념이 아닌 대안적 이념을 통해 이를 조직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민주화는 가능하지 않으며, 진정한 사회통합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에 따르면, 현대의 대규모 사회에서 갈등은, 그것이 제도화되지 않고 억압될 때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는 사회가 강해지고 통합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갈등을 억압하거나 마구 뒤섞거나 치환되지 않게 해야 하며 그 자체가 표출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렌도르프의 관점은 한국의 역사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화이후 정당체제가 오늘의 무기력과 무책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를 통해 누적되었고 오늘의 현실사회에서도 문제의 근원이 되는 갈등과 균열이 표출되고 대표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정당과 정당간의 차이를 통해 이러한 갈등을 대변하고 이를 현대적 언어와 이념과 이론으로 정의하고, 그리고 이들 차이들이 정당과 정당간의 경쟁을 제도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접근되고 해결될 때 비로소 한국사회의 해체적 경향은 서서히 제어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정당체제하에서 모든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사회통합을 말한다고 역사적 기초를 갖고 사회경제 체제의 내부로부터 형성되고 누적된 갈등이 통합될 수 있을까? 대답은 물론 아니다. 예컨대 197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기민당과 공산당이 “역사적 타협”을 실현하고 이념적 갈등을 좁혔던 것은 사회의 대표적 갈등이 기민당과 공산당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이었고, 역시 같은 시기 스페인 민주화과정에서 프랑코 체제의 계승자인 보수적 정당, 사회당, 공산당 간의 “몽크로아협약”은 사회의 주요세력들이 정당으로 대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일본의 전후 보수질서의 완결은 역설적으로 사회당과 공산당의 조직화가 허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누적된 사회경제적 균열이 정당으로 조직되지 않고,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진 현대사는 화해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한국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컨센서스는 창출될 수 없다. 그 양자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실질적 민주화와 정당체제의 구조개혁이라 하겠다.

(5) 탈냉전시기 남북한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평화와 공존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해답을 갖고 있는가? 일견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은, 국내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NLPD 이론에서의 두 이슈의 연계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냉전과 분단이후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특징이자 당시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은, 남북한이 근대화와 경제발전 수준, 사회역량, 정치안정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격차가 생겼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엄청난 비대칭적 남북한 관계가 놓인 탈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 또한 냉전 시기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즉 북한의 존립문제는 민족문제 해결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통일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민족통일은 한국민이 실현해야 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최대의 명제인가?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관점은, 해방후사를 “분단시대”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정의가 함축하는 핵심적 의미는 해방후사는 통일된 민족독립국가에 대한 안티테제가 실현된 역사라는 것이다. 분단은 남북한 각각에 있어 자립적인 국가의 정당한 근거로서 설정되기보다 불안정한 과도기적 상태로 인식된다. 그러할 때 한국민에게 있어 통일은 두 개의 분단국가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이 점에 있어 민족주의는 남북한 각각에 있어 공통적인 국가 이념이 된다. 통일이라는 역사적 복원의 관점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뿐 아니라 북한사회에서도 지배적인 가치와 역사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통일을 한국민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다면, 남북한 간의 일방적인 사회경제적인 차이로 인하여, 그것이 반드시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폭력적인,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극심하게 불평등한 두 개의 사회를 통합하는 고통스런 문제를 수반할 것이다. 한국민의 가치와 목표가 통일로 모아질 때, 정서적 민족주의에 침윤된 진보파들이나, 적극적 개입을 해서라도 북한체제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냉전적 반공주의자들이나 보수파들 사이의 차이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날 민중부문을 소외시키고 권위주의국가-재벌연합이 이루어낸 권위주의산업화는 민주주의 하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한 체질변화를 통하여 세계적 수준의 새로운 시장경제체제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 뿐만 아니라 근대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이 근대화를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산업사회로의 사회적 변화, 근대국민국가의 형성, 민주화라고 하는 거시적 사회변화로 이해할 때, 북한은 이 점에서도 심각한 결함을 갖는다. 그러므로 남북한의 통일을 말하기에 앞서, 남한사회에서의 민주화와 시장자본주의 질서의 인간화가 선행되어야 하며, 북한이 경제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 일정한 경제발전이 필요하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에 충분히 발전된 민주주의를 갖지 못한 한 사회가, 매우 낮은 수준의 경제발전 정도와 전체주의적 병영국가체제를 갖는 다른 한 사회를 평화적으로 통합하면서 그 과정에서나 그 이후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극히 의문이다. 그리고 두 사회는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전쟁이라는 경험과 아울러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구원과 적대관계를 내면화하고 있다. 동시에 적어도 오늘의 남한사회는 분단시대라는 정의가 함의하듯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반쪽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근대화되고 자족적으로 완성된 사회이자 국가이며,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을 절대명제처럼 상정하면서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근본주의적 민족주의의 관점인 것처럼 보인다. 남북한 간의 이상적인 관계는 얼마라고 예측하기 어려운 장기간에 걸쳐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경제협력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북한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남한과 같이 자족적인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와 안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단일민족→분단→통일된 국가로의 복원이라는 명제는 자동적으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일 민족 두 국가”의 다음 단계는 완전히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평화는 통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이다.

결 론

(1)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이념, 준거, 규범, 가치로부터 현재를 규정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혹자는 건국이념으로부터, 혹자는 분단시대라는 정의로부터, 혹자는 한국사를 관통하여 면면히 흐르는 것으로 가정하는 어떤 민족성으로부터 오늘을 규정하고 과제를 정의하고자 한다. 이런 역사에 대한 이해나 관점은 극히 자의적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해방이후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의 실패와 그로인한 분단국가의 건설과정은 전쟁으로 귀결되었을 정도로 격렬한 갈등은 동반했다. 만약 냉전시기의 어느 중간에 분단된 남북한을 묶어 하나의 통일된 민족국가로 뭉쳐놓았다면 신념과 이념의 갈등은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16,7세기 유럽전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종교전쟁에 비유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남북한의 분단은 동아시아 냉전체제 하에서 남북한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의 대가로 지불된 측면도 있다.

(2) 해방의 최대 정치적 가치를 반제독립운동이라고 했을 때 북한은 남한에 비해 정당성에 있어서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가 될 수 없는 동질적으로 통합된 전체주의적 사회 정치체제를 가졌다. 남한의 분단국가는 타율적으로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측면이 더 큰 매우 불안정한 조건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남한은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의 잠재력과 공간을 발전시켰다. 남북한 간의 사태의 추이가 미소간 대결을 중심으로 한 냉전의 전개와 그 결과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내부체제의 성격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분단국가의 건설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남한사회의 변화의 방향은, 외부로부터 부과된 국가가 사회 내에 뿌리내리면서 그 정당성을 확대하는 하나의 국가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는 여러 사회수준에서의 변화의 총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역시 경제발전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이래 근대화의 과제는 1960,70년대를 전기로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근대화라는 특성으로 실현되었다.

(3) 이제 분단국가의 건설과 권위주의 산업화가 내포했던 갈등과 이로부터 제기된 문제해결의 과제는 민주화로 떠 넘겨졌다. 그럼으로 민주화는 한국사회를 진정으로 성숙하게 하는, 한국민이 대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억압과 궁핍,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었던 민중을 역사와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냈다는 것일 것이다. 민중이 소외된 국가건설, 민중이 소외된 근대화로부터 민중이 중심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를 통하여 앞선 시기의 정치와 사회가 남긴 문제들을 대면하고 풀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민주화 역시 매우 불완전하고 미숙한 수준에 있다. 필자의 관점에서 오늘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민중이 소외된 민주주의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제 앞에는 앞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도전들이 있다. 민주화의 결과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성숙으로 이어지리 라는 보장도 없다.

(4) 이 과정에서 문제해결의 열쇠는 갈등을 수용하고 그것과 정면으로 씨름하는 노력을 통하여 해방이후부터 누적된 갈등을 완화하면서 실질적으로 사회통합에 근접하는 일이다. 우리사회에서 깊은 상처와 더불어 내장되어있는 갈등,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배태해 왔던 갈등들은 서로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면 그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한국사회의 갈등을 그대로 투영하기 때문에 분열적이다. 그러므로 현대사에 대한 인식에 있어 컨센서스를 넓히는 문제와 오늘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을 완화시키는 문제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사회의 정당성의 기준은, 그리고 역사에 대한 평가기준은, 그것이 어떤 특정의 시점에서 정의된 어떤 형태의 이념의 구현이 아니라 시민적 자유, 권리, 복지,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얼마나 훌륭하게 실현하는가에 두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조건에서 누가 문제를 정의하고,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어떻게 설정하고 나아가야할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민중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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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점에 갔다가 우연히 얻은 종이쪽지다.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 중에 보니까 뒤쪽에 종이쪽지가 있길래 주워서 보았더니 바로 이것이었다. 재미있는 글이라서 가져갈까 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바로 아래의 그림이 나왔다. 알고보니 교회의 전도지였다. 전도도 알차게 하는구나 싶었다. 이 쪽지는 내 서재의 책상 유리 밑에 들어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이렇게 잠시 나들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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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권선영

숨은 쉰다고 합니다. 즉 숨을 쉽니다. 휴식이라는 말을 할 때 쉴 휴 자에 숨 쉴 식자를 씁니다. 그래서 휴식은 숨과 관련이 있습니다. 숨을 잘 쉬어야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숨도 잘 못 쉬면서-예를 들어 너무 숨죽이는 분위기나 숨이 거칠게 들떠 흥분되어 있는 상태-휴식한다는 것은 진짜로 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숨을 잘 쉬는 것은 실제로는 마음과 정신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다 숨을 쉽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잠자는 갓난아이의 옆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면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화난 사람은 숨이 들떠 있고 거칠게 숨을 쉬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동물에게서도 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의 숨소리나 헐떡거리는 개의 숨소리 또 잠자는 고양이의 숨결도 있습니다. 하나같이 편안할 때는 숨을 편안히 깊게 쉽니다.

식물도 숨을 쉽니다. 나무나 풀들의 숨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귀를 기울이면 아마 들릴 것입니다. 숨에 대한 신비한 표현도 있습니다.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숨이란 하느님의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와 모든 생명체들이 쉬고 있는 숨은 바로 하느님의 성령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숨으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과도 숨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음과 정신도 이어져 있습니다. 숨이 그 매개체가 되어줍니다. 숨을 성령이라고 하듯이 또 인간은 소우주라고 하는 동양의 지혜가 있듯이 우리는 숨을 통해 자연과 하늘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숨을 통해 너와 나, 사람과 동식물, 그리고 하늘과 서로 이어져 잇습니다. 숨결을 통해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도 서로 교류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숨을 아주 잘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의학에서도 숨은 참 중요합니다. 숨을 통해 들어온 우주의 생명에너지가 음식물을 통해 생성된 에너지와 합성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합성된 에너지는 인체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힘이 됩니다. 먹는 것을 잘 먹는다 해도 몸 보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숨이 깊지 않으면 생명력이 약해집니다. 이렇게 생성된 에너지는 몸의 여러 곳을 흐르면서 몸의 모든 세포들을 활성화시킵니다. 그러니 숨은 우리의 생명뿐 아니라 그 유지인 건강에도 아주 중요합니다. 천식, 비염, 축농증 등은 숨 쉬는 것과 관련된 병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식은 사망에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숨에 대한 큰 의미로 살펴보면 이런 병은 어른의 경우 타인이나 사회, 가족, 특히 자식들과 교류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오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 집안 분위기 등에 대한 거부일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단절이 숨의 자연적인 흐름을 막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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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건강] 모기약 대신 모기장 쓰세요
11월에 들어선 지금에도 민지(가명)네 집은 아직 밤마다 여름풍경이 펼쳐진다. 잠자기 전에 꼭 모기장을 치고 자는 모습이다. 가을이 되었는데도 기온이 많이 내려가지 않다 보니 모기장을 치지 않고 누워있으면 모기가 귀에서 앵앵 소리를 내며 시위를 벌여 밤잠을 설치기 일쑤이다.

유난히 모기가 많았던 지난해 여름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까 밤마다 모기와의 전쟁으로 벽지가 모두 붉은 얼룩이 졌음에도 자고 일어나면 여기저기가 부풀어올라 가려움과 한바탕 씨름을 해야 했다. 특히 피부가 예민한 민지는 모기에 물리면 붓기도 심하지만 가려움을 이기지 못해 긁다보면 항상 상처가 생겨 더 오랫동안 고생하곤 했다. 그래서 올해에는 모기장을 장만하여 여름내 사용해보니 모기에 물리는 것을 예방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효과가 좋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민지네 집은 간단하게 모기약을 뿌리거나 피우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시판 되는 모기약의 대부분은 향기로운 향을 첨가한 것이 많아 거부감을 덜어주고 있지만 그 향기 속에는 많은 독성이 숨어있다. 대부분의 화학적 살균, 살충제는 신경 독성 인자로서 신경조직 내의 이온이동을 저해하고 신호전달물질의 비정상적 분비를 초래한다. 또한 내분비계 장애물질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살충제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면역기능이 저하되고 암을 유발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 특히 민감해서 적은 양으로도 구토나 메스꺼움, 어지럼증 등의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여름에 해충의 피해를 막는답시고 밤새도록 모기향이나 모기약을 곁에 두고 잘 경우 왠지 머리가 무겁고 기운이 없는 것도 이러한 살충제의 독성 때문일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둥근 모기향의 경우도 알레트린 농약을 나무 가루에 섞어 굳혀 형태를 만든 후 최근 문제시되고 있는 말라카이트 그린으로 색을 입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전한 것처럼 선전되는 전자매트 모기향의 주성분도 역시 트리클로로에틸렌, 디에틸렌글리콜, 포름알데히드, 붕산염, 벤젠 등의 살충제이므로 아이들에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민지네 집도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여름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모기약을 뿌리고, 밤에는 모기향을 피우고 자야 하는 줄 알았지만 살충제의 유해성을 알고 나서는 선뜻 모기약에 손이 가지 않게 되었다. 밤마다 모기장을 치는 것이 때로는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유해물질로부터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런 수고로움 쯤은 기꺼이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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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암아이별학교 수업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 김지현(가운데) 교장으로부터 천체망원경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현암아이별학교 제공
현암아이별학교 김지현 교장

김지현(37)씨는 별을 좋아한다. 강원도 동해의 고향마을에서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을 지금도 기억한다. 고교 때 천체망원경으로 띠가 있는 토성을 관측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몸이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자라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저 별들을 늘 가까이서 지켜보며 살겠노라 마음 먹었다.

김씨는 지금 어린 시절의 다짐처럼 산다. 김씨는 현암아이별학교 교장이다. 그는 3개월 단위로 열리는 별학교를 통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상상력을 키워준다. 별학교는 서울 한복판에 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현암사 사옥에 있다. 이곳에는 매주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초등학생들이 그를 따라 별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10일은 날이 흐려 수업이 취소됐다. 대신 김 교장의 ‘특강’을 들을 수 있었다. 강의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영상자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와 안드로메다 등 아름다운 모양의 성운과 페가수스 자리, 물고기 자리, 큰곰 자리 등 별자리들, 그리고 화성, 목성, 토성 등 태양계 행성의 모습을 담은 3차원 영상물은 환상적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모자란다. 빅뱅에서 지구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상물은 어떤 판타지 영화보다 놀라운 광경을 연출한다. 이날은 못했지만 다른 날 같으면 교실 수업이 끝나고 수강생들이 현암사 옥상으로 올라가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하는 시간을 가진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넓고 오래되고 아름다운 미술관입니다. 돈도 필요없어요. 고개만 들면 드넓디 넓은 우주를 자신의 가슴 안에 담아낼 수가 있습니다. 공부와 컴퓨터에 매몰되어 혼자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워줄 수 있는 기회지요.”

2001년 7월 문을 연 현암아이별학교는 지금까지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공개관측행사에 참여한 사람까지 합하면 그의 안내로 별세계를 찾은 이들은 5천 명이 넘는다. 그들 모두 밤이면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들만의 우주여행을 하리라.

별학교 교장으로, 2003년 한국과학문화재단의 과학기술홍보대사로 선정되어 각급 학교에 강의도 다니는 별 전문가지만 그의 전공은 물리학이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는 고교 때의 꿈을 잊지 않고 별 관측 동아리인 천문반에 들어갔고 1990년 전국대학생아마추어천문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열심히 별 헤는 밤을 보냈다.

대학 졸업 뒤 안성천문대에서 일하던 그는 98년 <밤하늘로 가는 길>이란 책을 내면서 현암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천문회 활동 때 알게 된 김동훈씨와 함께 엮은 이 책은 별관측을 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안내서다. 그가 처음 망원경을 갖게 됐을 때 어떻게 별을 보는지 몰라서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으로 별을 보고자하는 이들을 위해 만들었다. 그 뒤에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풀코스 우주여행> <별대장과 함께 떠나는 우주탐험시리즈 별자리> 등 별과 관련된 4권의 책을 더 냈다.


그 인연이 별학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김씨는 2000년 현암사에서 사옥을 개보수한다는 말을 듣고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동아리 후배들까지 동원해 반사경을 깎고 황동으로 뼈대를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 그가 천체망원경을 기증하자 자연스럽게 별학교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현암아이별학교는 그렇게 개교했다.

별학교는 12월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매주 목요일 저녁 8시에는 ‘별자리탐험’(참가비 1만5천원)이, 수요일 7시30분부터는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우주과학강연’(참가비 2만원)이 참가자를 기다리고 있다. 모두 하루짜리 프로그램이다.

김씨는 별학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자리를 소개했다. “저녁에 해진 뒤 7시쯤 서쪽 하늘을 보세요. 제일 밝은 별이 금성입니다. 그로부터 2시간쯤 뒤인 9시께 이번에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세요. 아주 밝고 불그스레한 별이 나타납니다. 화성이지요.”(02)313-2729.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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