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우리 학생들 음악 재능은 뛰어나다”
정상영 기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함께 연주를 해보았는데 역시 한국 학생들의 재능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어요.”

한국의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52·서울시향 예술고문)씨가 올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11일 오전 서울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서 예원학교 전교생 900명을 위해 마스터클래스를 가졌다.

“내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공부한 지 40년이 되었어요. 그런데 밖에서 연습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대단하던데 한번 해볼까요?. 지휘자는 소리를 안내죠? 템포를 결정하고 템포에 대한 사인을 줄 뿐이죠. 자 한번 해봅시다. 하나, 둘, 셋. 빰빰빰빠…”

정명훈씨는 이날 예원학교 전교생 9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60명의 남녀학생으로 이뤄진 예원학교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베토벤의 <교향곡 5번> 1악장을 연주했다.

그는 지휘하기 전 학생들이 너무 긴장하자 “지휘봉을 안 가져왔어요. 여러 도시를 다니며 연주를 하다 보니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봉을 관리해서”라고 농담을 던져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연주 도중 학생들이 계속 긴장해서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하자 여러 차례 지휘를 멈추고 “아니 왜 그리 긴장하나. 이 교향곡은 힘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사자같은 소리를 내라고!”하며 격려했다.

“나도 지휘하기 전에는 수줍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음악가는 음악을 하는 동안에는 수줍어하면 안돼요. 한국 사람의 성격에 대해 설명할 때 ‘빨리’라는 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위험해요. 빨라지면서 약해지기 때문에 빨라지려고 할 때는 힘을 찾아야 해요.” 그는 학생들에게 “경험이 없어서 힘든 줄 알지만 사랑과 힘을 담아서 노력해야 한다”고 다독거렸다.

2001년부터 정명훈씨가 특별예술고문으로 있는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지난 1일 상하이를 시작으로 아시아 순회공연에 나서 7일 부산, 9일 제주, 11일 과천에 이어 12일 저녁 7시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과 13일 저녁 7시 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연주회를 연다. (02)518-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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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동안 122권의 책을 지은 사람,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는 구절을 일반화한 사람, 무크·월간 <인물과 사상>을 33권 펴낸 사람, <한국 현대사 산책>을 15권 펴낸 사람, ‘1인 저널리즘’과 ‘실명 비판’이란 말을 유행시킨 사람, 철학자 김용옥씨의 ‘통나무’ 출판사처럼 ‘인물과사상사’라는 전용 출판사를 가진 사람, ‘김영삼’ ‘김대중’ ‘전라도’ ‘조선일보’ ‘서울대’ ‘이문열’ ‘김용옥’ ‘노무현’ ‘이건희’ 등 강자이거나 칼날 같은 이슈들과 정면 대결해온 사람, ‘죽이기’ ‘살리기’란 말을 책 제목으로 여섯 번 사용한 사람, 그리고 지지리도 상복이 없던 사람.

짐작하겠지만, 그의 이름은 강준만이다. 그 사람이 제4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게 됐다.

송건호 언론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정경희, 위원 이해동 김태진 방정배 이명순 변동현 김영석)는 23일 제4회 수상자로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선정했다. 심사위원회는 강 교수가 “1997년 <인물과 사상>을 창간해 ‘언론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며 무소불위의 언론을 견제했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차별’과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며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를 희망했다”며 “혼자 힘으로 시작한 작은 움직임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이 됐고, 실명비판의 문화 속에서 생산적인 논쟁과 토론이 성숙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으며, 지식인의 양심과 책무를 일깨웠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물음으로 수상 소감의 운을 뗐다. 숨가쁘게 ‘성역과 금기’에 도전해왔던 이제까지의 태도와 다르게 강 교수는 ‘겸손’의 코드로 세상을 꿰려 하고 있었다. 전주시 전북대 사회과학대학 211호 연구실에서 만난 강 교수는 “의례적 겸손, 처세술로서의 겸손이 아닌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본질로서의 겸손을 송건호 선생에게서 배웠다”며, 이것이 처음에 고사하려던 이 상을 받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라고 밝혔다. 동시에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맹렬한 자기성찰을 촉구했다.

왜 ‘겸손’인가? 강 교수가 지천명에 이르렀기 때문인가?(강 교수는 양력 1956년 1월생이다) “사람들은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일을 할 때는 좋은 뜻과 열망이 앞선 나머지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인정 욕구’나 ‘도덕적 우월감’을 자제하는 겸손을 보여야 자신의 소신을 실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맥락)에 주목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강 교수의 태도는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유럽식 세계관에서 벗어나 “덕이 너를 아름답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유가적 가치를 두둔하는 듯했다. 심지어 강 교수는 최근 <한국일보>에 “‘싸가지’가 ‘메시지’다”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이 역시 소통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강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겸손’의 코드에서 실패하고 있다”며 노 정부에 대한 애증을 숨기지 않았다. “왜 수구 기득권 세력이 미친 듯 악을 쓰는가? 나는 한 이유가 노 대통령이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그들을 내려다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지사지해보면 안다. 노 대통령이 개혁에 성공하려면 자신보다 일을 앞세워야 할 것이고, 빛을 내기보다 욕을 먹어야 할 것이다.”

최근 강 교수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지식인 참여’와 관련해 조기숙 대통령 비서실 홍보수석과의 한바탕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논쟁은 조 수석이 전주를 찾아와 산행 토론을 하며 마무리됐지만, 그의 비판은 그를 잠재적 ‘우군’으로 여겨온 집권 세력에게는 매우 곤혼스런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강 교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난 1~2년 동안엔 자의가 아닌 상황에 의해 퇴출당했다. 그가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문제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란다. “민주당의 문제는 지지했던 사람들이 성찰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뛰쳐나오면서 사람들은 그럴 기회를 잃었으며, 동시에 면책받았다. 그런 열린우리당이 예전의 민주당과 얼마나 다른가? 열린우리당은 정치에 대한 혐오와 염증을 이용해 위선을 저질렀다. 민주당처럼 열린우리당도 대통령의 당일 뿐이다.”

한편으로 그의 이런 일련의 활동에 대해 최근 비평가 김규항씨는 애정이 듬뿍 담긴 비판을 보내기도 했다. 김씨는 “강 교수가 보수 정당들을 출연자로 하는 기만적인 쇼의 정치에서 삶의 정치로 돌아오길 기대한다”며 “비정규직, 빈곤의 확대, 공공영역의 사유화, 제국주의 침략 전쟁 동조 등 끝없이 나열되는 이 참혹들에 대해 행동해달라”고 주문했다.

언론권력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언론학자로서 또 ‘안티조선’을 이끌었던 언론운동가로서 그가 보는 한국 언론계의 과제는 무엇일까? 그는 “근본 문제는 조·중·동이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 구축돼온 강고한 정치·경제 분리주의”라고 짚었다. “한국 독자들은 투표장에서 김대중·노무현을 찍으면서 집에서 조·중·동을 보고 부동산·주식 투자, 과외교육에 몰두한다. 이것은 이른바 민주·개혁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민들의 경제적 보수성을 바꿔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는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와 같은 개혁 언론이나 개혁·진보 세력들이 스스로 ‘경제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중동이 제시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미래를 대체할 비전과 방향을 진보 세력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문·사회과학도들이 경제 문제에 무지한 상태로 경제를 부정부패의 온상, 악의 근원으로만 바라보는 한 이런 한국 사회의 이율배반은 계속될 것이라고 비관했다. 이를테면 그는 <한겨레>가 저항자로서의 생각을 버리고 주도자로서 책임감있게 현실에 임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의 말은 처음의 ‘겸손’을 상기시켰다. “나는 책을 쓸 것이다. 과거처럼 깊이 개입하지는 않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해법을 구하겠다.”

다음은 지난 18일 전북 전주 전북대 사회과학대학 강준만 교수의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 전문이다.

-4회 송건호 언론상 수상 소감은?

=고민이 됐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받나? 송건호 선생을 생각해보고 받기로 했다. 사실 나는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 사람들이 리영희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엄혹했던 시절에 의식을 죽비(책)로 각성시킨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이유는 리 선생이 자신에게 대단히 정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권 붕괴 때 스스로 나서서 이를 인정했다. 꼭 안 해도 되는데, 굳이 인정했다. 최근 <대화>에서 임헌영 선생과 민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민중이 무오류 아니다”라고 말해 가벼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단선적이지 않다. 나도 그렇다.

송건호 선생을 생각해보니 지금 필요한 시대정신이 겸손 아닌가. 노무현 정부가 이제까지 해온 식으로 했으면서도 태도가 조금 달랐으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오만한 느낌을 준다. 도덕적 우월감 갖고 내려다 보면 상대는 견디기 힘들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악을 쓰고 미친 듯 날뛰는데, 역지사지 해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게 겸손 아닌가 정말로 겸손하면 자기보다 일을 내세운다. 성사시키기 위해 빛을 안 내고 욕을 먹는다. 인정욕구 앞서면 안 된다. 삶 주변에서도 겸손이 중요하다. 상식적인 처세술이 아니라, 진짜 겸손은 다수가 잘 되기 위해 나를 낮추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보여준 분이 송건호 선생이다. 송 선생의 가장 큰 특성이었다. 물론 내 아전인수다. 겸손에 대해 문제의식 느꼈는데, 그것을 보여준 분이니까.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면이지만, 지금 송 선생의 그 메시지를 전하는 데 애를 쓰라는 뜻으로 봤다.

-수상 소감에서 “겸손, 겸손, 겸손”에 대해 강조했는데?

=참 중요하다. 김대중 정부 이후에는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겪으면서 문제가 드러났다. 예전처럼 갈 수 없다. 스스로 성찰이 없어서 자신을 분석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아들 문제는 김영삼 때 있었는데, 김대중 때도 일어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또 무엇을 배웠나? 자기들은 다르다는 이야기만 한다. 내가 보기엔 같은 점이 더 많다. 수구에 대한 안티로의 역할만 하고 있다.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 무엇에 대한 반대·극복만 있고, 자신에 대한 생각이 없고 겸손하지 않다. 청운의 뜻을 품었으면 낮은 자세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상대를 윽박지르고 면박 준다. 이해찬 총리만 해도 충정 이해하지만, 고압적이다. 도덕적 우월감·자신감이 전반적으로 과잉이다.

노무현 정권의 이념 대결은 다른 문제까지 덮는다. 다르게 접근했다면 달랐다. 노무현은 자신을 한편으로 과대 평가하고 현실적으로 과소 평가한다.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 해야 한다. 경제 문제도 보수 신문 비판에 앞장 서고 집중한다.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것과 다르다. 위로가 필요한데, 낙관론을 펼치거나 수구세력과의 싸움으로 국민과의 커뮤니케이션 안 한다. 또 도덕적 우월감을 가졌으면서 스스로의 현실 역량을 과소 평가한다. 약자·소수자의 정신세계다. 정권 잡아서 국정 운영하면서 약자라고 하는가? 약자 멘털리티로 가다 보니 맞짱드는 상대만 생각하고 국민은 없다.

지식인이나 민주화 운동가, 시민운동가의 입지와 국정 책임자로서의 그것은 다르다. 지식인은 그럴 수 있지만, 국정 운영자는 달라야 한다. 소통 스타일이 중요하다. 소통 문제를 멀리 거리 두면 역사의 업보가 된다. 물론 80년대의 경험이 있고, 투쟁 정서가 있어서 하루 아침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겪어야 할 과정이라면 조금 단축할 수는 없느냐는 것이다.

-최근 <한국일보> 칼럼에서 ‘싸가지’에 대해 말했는데, 이것도 ‘겸손’ 코드와 일맥상통하나?

=사회도 전반적으로 그렇다. 인터넷 보니 사람들이 튀어야 한다고 하면서 독설로 가는데, 뜻은 좋지만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말을 그런식으로 하면 선의 안 산다. 개인으로 그럴 수 있지만, 정·관·재계 인사까지 그러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소통에 뜻이 없는 것이다. 적대화하고 그쪽을 약올리고 분노하게 함으로써 내쪽 지지자 카타르시스 주는 것이다. 정치가 엔터테인먼트라서 그렇다면 말 할 것 없다. 글나 소통의 뜻이 있다면 그럴 수 없다.

-사람들은 강 교수가 민주당 분당에 반대하고 열린우리당 비판하는 것을 보고 민주당에 연민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다.

=나는 그 일로 퇴출됐다.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 분당 때부터 상황에 의해 그렇게 됐다. 어쨌든 나는 틀렸다. 열린우리당 체제를 국민 다수가 인정했으니까. 나는 예전에 민주화 원한 사람들과 함게 갔는데, 이제는 소수파가 된 것 같다.

나는 민주당 분당이 호남인들이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박탈했다고 본다. 그들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 각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북만 해도 유권자의 10%가 열린우리당 당원이다. 열린우리당이 생기면서 모두 면책받았다.

정당은 뭔가? 민주노동당 안에도 이견이 많다. 그렇다고 다 따로 가야 하나? 민노당 안에 문제가 있다고 개혁 세력이 당을 나가서 또 당을 만든다? 그것은 문제 아닌가? 민주당에 대해 연민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우리당 주체세력의 문제 푸는 방식에 문제 제기한 것이다. 시대의 업보다.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염증과 혐오, 저주를 이용해 열린우리당이 나왔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은 예전의 민주당과 얼마나 다른가? 그 당이 100년 갈까? 열린 우리당이 노 정권 말기에 가서 또 분당하면 문제 아닌가? 열린우리당이 혁명할 것처럼 한 것은 정말 위선이고 기회주의다. 열린당이 뜻대로 잘 나가면 내 판단의 과오지만, 그렇지 않고 같은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맞은 것이다. 그것은 김대중의 당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당일 뿐이다.

-최근 비평가 김규항씨가 한 글에서 강 교수에게 “보수 정당의 기만적인 쇼에 참여하지 말고 삶의 정치로 돌아오라”는 애정어린 글을 썼다. 보수 정치가 아니라 삶의 정치,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빈곤, 조·중·동 문제, 이라크 파병 등 각론을 다룰 생각 없나?

=한국같은 ‘소용돌이 사회’ 안에서는 정치 세력이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김규항씨의 주장 이해하지만, 나는 어렵다. 정치 분야에 의해 소용돌이가 일어나 막 빨아들이는데, 이 문제를 그냥 두나? 경중을 봤을 때 정권이 잘 못가는데, 구경만 해야 하나? 물론 더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노무현의 해체 전략에 동의 안 하면서 비판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해서 될 것 같지 않고, 그는 마이웨이로 가고 있다. 이제는 일반론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또 내 자신이 여러 분야 관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원래가 커뮤니케이션 전공이고, 소통이 주요 관심사다. 관심사를 제거하고 일할 수 있나.

-언론학자로서도 훌륭하지만, 사회과학자, 정치평론가, 행동가로서도 폭넓게 활동했는데, 스스로를 언론인으로 생각하나?

=언론인까지야. 대중적 글쓰기하는 언론학자지. 나를 언론인라고 하면 과찬이고, 전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언론인 역할 하면 좋겠지.

-안티조선의 주요 활동가였는데 최근 언론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발언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한 글에서 조중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성실함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조중동에 대한 생각은 같은데, 싸운 뒤에 이유를 생각해봤다. 내 생각은 국민이 호응을 안했는데, 그것은 강고한 ‘정치·경제 분리주의’ 때문이다. 유권자로서는 민주세력 찍지만, 신문은 안 바꾼다는 것이다. 어떤 민주 인사가 공직 들어서면 재산 공개했는데, 왜 돈이 그렇게 많은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다는 것을 감안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또 주류 영합주의가 강하다. 내 삶의 경쟁력에 대한 판단이 정치적 선택과 다르다. 주류 매체고 영향력 있다는 그 판단이 크다. 이것이 가장 세고 주류라는 것이 한국인 특유의 경쟁력주의를 부추긴다. 기러기 아빠가 일반 국민뿐 아니라, 개혁·진보 인사에서도 있다. 진정성 갖고 운동해도 신문 안 바꿨다.

이제 경제를 치고 들어가야 한다. 이재현씨가 어느 글에서 “진보적 진영에서 문화운동하고 그러면서 경제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정확한 말이다. 경제는 감시 대상일 뿐이고 스스로 ‘경제 플레이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겨레>같은 언론도 재벌들로부터 독립해 신문사를 꾸려가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에 치중한다. 한국 경제를 더 높은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일탈·비리만 다루지 주도적 플레이 안 한다. 그러면 영원히 조중동에게 깨진다. 엉거주춤하지 말고 분명히 해야 한다. 다수 국민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보수적이다.

-최근의 신문법이 시행됐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신문발전위원회, 신문유통원이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기구들이 신문시장 정상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여러 가지로 불만족스럽지만, 기대가 있다. 이런 기구들로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에는 의문이 있다. 왜냐면 한국 독자들이 가진 묘한 체질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광신도 노무현 광신도가 <조선일보>를 본다. 그런데 한국적 상황에서 합리주의다. 왜? 노가 개혁한다고 나서도 주변 핵심 인사들의 재산 규모가 역대 정권 비해 적지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는 보수고 진보고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은 경제가 중심이고 가외로 개혁을 이야기한다.

진보적 입장의 정통 좌파들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신자유주의라고 싸잡아 비판한다. 한편으로 노 정부 요직 인사들도 자기 재산 다 챙기고, 국민들은 신문에서 아이들 논술과외 서비스도 받아야 하고, 부동산·증권 투자 정보도 얻어야 하고, 각종 광고도 봐야 한다. 그런 신문이 유리하다. 경제는 이렇게 간다. 앞서 안티조선 운동 하면서 모멸을 가하는 공격도 해봤다. 소용없었다. 북·서유럽 복지 국가 모델? 나 죽을 때까지 안 된다고 본다. 자원 없고 수출로 사는 나라를 어떻게 북유럽 나라들에 비할 것인가?

우리 나라 사람 경제적 보수성을 낮은 곳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택시 타보면 운전기사들이 결코 무식하지 않다. 물론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지혜를 갖고 있다. 장하준 교수 글에 대해 여러 말 많지만, 그 정도 글을 갖고 이야기해야 한다. <한겨레>가 장하준 정도의 시각을 받아들인 것만 해도 대단하다. 세상을 아는 체하는 인문·사회학도들이 경제를 모른다. 경제에 대해 뭘 알아야 국민들 마음 속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다.

-<한겨레>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아직 창간 정신을 잊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 초심을 갖고 있는 게 문제다. 창간 당시는 기적이고 감동이었다. 독재정권에게 대항했던 이들이 자체 매체 가진 감격이었다. 지금은 민주적인 정권이 둘이나 나왔는데, <한겨레>가 비판을 넘어서서 의제를 스스로 만들고 끌어가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저항세력이 가졌던 견제·감시·비판 수준이다. 반면 조중동은 의제 설정을 멋대로 하지만 한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하고 독자들은 익숙해 있다.

국가보안법 처리 문제 때 경호권 발동 문제가 핵심이었다고 본다. 유시민 의원·리영희 선생도 경호권 발동 반대했고, 열린당 그것을 망설였다. 당시 <한겨레>는 때묻히지 않으려고 원론 수준으로만 얘기했는데,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한겨레>가 경호권 발동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 마당을 펼쳤어야 했다. 경호권 발동 안 된다는 리영희 선생 얘기도 싣고, 또 예외적으로 경호권 발동해서 보안법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다뤘어야 한다. 기사로 다룰 수 있고, 나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유시민 의원은 다 끝나고 국회 사망선고하면 뭐하나? 한겨레가 썼으면 여야가 심각히 고려했을 것이다. <한겨레>는 고급지로서 어젠다에 대한 영향력이 있다. 전술·방식의 차이는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국가보안법 말고 다른 것에도 적극성이 없다. 진보세력의 문제점 안 다룬다. 조중동 따라서만 조금 다룬다. 그러다 보니 어젠다를 다 넘겨준다. 정권 주류가 비주류적으로 일관하듯 <한겨레>도 그런다. 나는 그걸 아웃사이더 체질이라고 본다. 아웃사이더는 고귀하다. 권력·부에 욕심 없고, 옳은 소리하고 저항하고 감시·견제한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집단을 어디론가 끌고가면서 궂은일, 더러운일 하는 것이다. 아웃사이더는 욕할 것 많지만, 인사이더는 어렵고 욕먹을 일이 많다.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 인사이더는 책임져야 한다. 아웃사이더는 휘말리지 않고 옳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한다. 메이저로서 아웃사이더 하면 좋겠지만, 조중동 70%가 인사이더 하는데, 마이너만 아웃사이더 한다? 결단이 필요하다. 정파성을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비판도 더 하고, 개혁진보세력을 더 세게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의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기사 쓸때는 진보세력과의 유대도 끊어야 한다.

-최근 칼럼에서 신문산업이 지식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신문시장은 지금 조중동이 문제가 아니다. 조선·동아는 그래봐야 거대자본의 소유는 아니다. 그런데 앞으로 인터넷 언론 기업 성장하고 통신업체 중심으로 매체 융합 나타나면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이를테면 한나라 집권하면 케이비에스2·엠비시 민영화 안 할 것 같나? 신문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루퍼트 머독 식의 거대한 미디어그룹이 나오면 현재의 조중동보다 민주주의에 더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당파적이니 편파적이니 해도 신문이 살아남아야 한다. 살 방법은 지식인 전통을 살리는 것이다. 아직 기자에 대한 신화가 있다. 그것을 살려서 지식 산업쪽으로 힘을 펼쳐야 한다. 거대 기업들속에 편입되면 절대 안 된다. 비교 우위는 지식 산업인데, 신문업계 선두주자인 조중동은 정권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큰 일이다. 제 무덤을 파고 있다.

-엑스파일 사건으로 이건희·홍석현에 대한 수사가 진행중이다. 최근 책 <이건희 시대>에서 삼성의 문제에 대해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벼락공부하지 않으려면?

=한국 사회에 ‘홍수민주주의’가 있다. 지난 민주당 분당에 민주당의 책임만 있나? 삼성에 대해서도 그렇다. 문제가 있으면 평소에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평소에 잘못된 것을 잘 눈감아 주다가 건수 생기면 국민 모두 짱돌 하나씩 들고 나선다.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처리하는 홍수식이 화끈한 맛은 있다. 그런데 홍수 났을 때 사람들이 신중하게 하겠나. 우격다짐식이다. 아무리 우리 체질이어도 이제 와서 삼성만 죽일 놈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도 공부해야 한다. 평소에 대학 총장들도 삼성 포함한 재벌 돈을 끌어와야 한다. 재벌 은전 받는 것이다. 삼성의 문제를 평소에 이야기하면 문제가 덜 할 텐데, 이벤트성이 강하다. 한 번 걸리면 홍수 맛좀 봐야 한다는 쏠림이 강하다.

-이번 사건에서 보면 <중앙일보>는 또다른 삼성이자, 언론계의 실력자다.

=<중앙일보>가 조·동에 비해 개혁세력으로부터 덜 얻어맞는다. 유시민도 조·동은 독극물, <중앙>은 불량식품이라고 했던가? 남북문제에서 비교적 자본의 합리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동은 자본의 합리성도 없이 생래적 거부감으로 접근했다. 한국사회에서 민족문제 다루면서 자본의 위험이 가려졌는데, 사실은 운동권도 그렇지만 민족문제와 자본문제가 쌍벽이다. 중앙의 잘못이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 조·동이 중앙을 키운 셈이다. 아마 조동이 남북문제 시각 바꾸면 중앙 입지가 위축될 수 있겠다.

-인물과 사상의 중단과 인터넷 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나? 휴대전화도 쓰지 않는데?

=최근 <한겨레21>에 휴대전화 관련 글을 썼는데, 일종의 균형잡기 지적이었다. 휴대전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본에 친화적이다. 새 기술에 대한 거부감은 자본주의를 보는 시각과 관련 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고 대중문화 자체를 좋아한다. 딴따라 끼도 있다. 영화도 엄청 좋아한다.

-전북 전주에 살고 전북대 교수를 하고 있다. 지방이라는 것은 언론사도 그렇고 한국 사회의 또다른 문제라고 했는데?

=내부 식민지이론을 믿는다. 여기는 식민지 체제인데, 열이 나지 않는가? 서울서 국회의원하는 지방의 엘리트 계층이 여기 사람인가? 여기를 대변하는가? 여기 사는가? 아이들이 여기 있나? 다만 여기 근거로 제 입신양명하는 것이다. 이 신문 제목 좀 봐라. 지역 언론이 정말 이러면 안 된다. (전북 지역의 신문 두 개를 보이며) “노대통령 전북홀대 심각” “전북 홀대론 확산 분노” 언론은 이런 보도 좀 하지 말고, 중앙정부는 지역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이 지역 엘리트들이 이런 문제 생각하나? 인구가 계속 줄어든다. 60년대 250만명이 넘었는데, 최근 190만명선이 무너졌다. 내가 처음에 전북대 와서 지역 문제 갖고 혈압 좀 올렸다. 그런데 나만 성격 이상한 놈으로 찍혔다. 가만 보니 이 곳 사람들에게는 체념의 지혜가 있었다. 괜한 소리 했다가는 “억울하면 출세해라” “서울 못 가서 배 아파서 그러냐” 그런다. 최근에 지역 신문 발전기금 나눠주는 것도 그렇다. 지방 언론사 사주가 토호라고 해서 매우 엄격한 기준 적용해 특정 지역 언론이 집중 지원받았다. 그런데 토호와 재벌이 다른가? 재벌은 선진적이라서 좋고, 토호는 비리 복마전이라서 나쁜가? 재벌처럼 토호도 장단점이 있다. 그런데 지역기업이 잘 되면 악질로 본다. 그 시각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싶다.

좋은 지역 신문은 경제력에 달렸다. 어느 지역에는 <한겨레>만한 매출을 올리는 신문사가 있고, 대부분 다른 지역에는 그런 신문사가 없다. 기업의 건전성은 경제력에 달렸다. 이렇게 기준 만들다 보니 지원이 일부 지역에 몰렸다. 사람도 같다. 빈곤층을 볼 때 게으르고 못난 사람이라고 봐야 하나.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양면을 봐야 한다. 지방을 썩어빠진 것으로만 보는데, 그렇지 않다. 이런 얘기하면 지방에 오래 있어 물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지방대 교수들도 지방언론사를 욕한다. 그리고 지방대에서 좋은 학생은 다 서울로 편입가고 교수도 서울로 떠난다. 지금은 무조건 서울에 있는 것이 경쟁력이다. 안면 몰수하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지역안배는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지역 안배가 지역 균형발전 정책이다.

-지역을 살리기 위해 균형발전 정책, 행정도시, 기업도시, 공기업 이전 추진중이다.

=노 정부가 요만큼 지역 균형발전 하는 기미 보이더니 수도권을 풀었다. 지방에 공기업 이전 계획 발표하고 수도권에 공장 신·증설 허용한 것은 지방에 어음주고 수도권에 현찰준 꼴이다. 균형발전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지역 균형발전 정책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서울쪽은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신도시, 공장 신·증설 풀어줬다. 갑갑하다. 인구가 아무리 수도권에 몰려도 아직 지방이 다수다. 전북 국회의원들은 서울서 아이들 교육시키고 또 본국(?)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지방은 묘한 이중 식민지 구조가 돼 있다. 이런 이야기하면 그러면 당신 애는 공부 잘 해도 지방대 보내겠냐고 말한다.

-서울대 문제 책도 쓰고 해법 제시했는데, 잘 바뀌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국공립대 통합안을 제시했는데?

=국공립대 통합은 정말 좋은 안인데, 민주노동당 집권해야 된다. 손호철 교수가 민주노동당 쓴소리 강연 갔다가 이래서는 집권 못한다고 호통쳤다고 한다. 진보진영 쓴소리 경청 했는데, 손 교수가 2010년대에 집권 못한다고 그랬다. <한겨레 21>하고 서울대 문제 갖고 토론도 했는데, 서울대 개혁 얘기하는 사람도 학벌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나는 정운찬 총장처럼 서울대와 연·고대 비중 축소해서 가자는 것이다. 명문 일류대도 경쟁의 필요성이 있다. 주요 권력기관 출신대를 봤더니 3개 대학이 50%를 먹어버리는데, 이것은 안 된다. 적어도 수십개 대학이 경쟁할 수 있는 체제는 돼야 한다. 그래야 대학에서 공부한다. 대학들이 공부하는 데 드는 돈 아끼려고 고교등급제를 하는 것이다. 또 고교 등급제보다 대학 등급제가 더 큰 문제다. 기업에서 원초적 차별 가하니 명문대 아닌 대학생들 공부할 맛이 안 난다. 노 대통령이 그런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사법고시 식으로 경쟁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시 덕에 노 대통령도 나온 것 아닌가?

-강 교수가 펴낸 책을 검색해보니 122권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쓰는가?

=내가 창피해서 언제부터인가 권수를 세지 않는다. 나는 책을 작품으로 생각 안한다. 주위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역작을 내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 나는 책 내는 쪽으로는 디지털화돼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예전에 책이 귀할 때는 밟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책을 함부로 본다. 메모도 함부로 하고, 소모되는 것으로 본다. 물론 철학과 같은 분야는 다르다. 이론 분야는 작품이 나온다. 그렇지만 우리 신방과 쪽에서 작품이 나오겠나? 흐름이 빨리빨리 지나간다. 한 책을 오래 쓰다 보면 이미 낡은 것이 돼버린다. 내게 책 내는 데 불성실하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공을 들일 수 있지만, 이 정도면 된다는 생각이다.

내게 책 쓰는 것은 중독인 것 같고,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사명감 같은 게 없고, 누구는 내가 돈 때문에 많이 쓴다고 하지만, 오히려 거꾸로다. 자주 내는 것은 덜 팔려서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띄엄띄엄 내는 게 돈벌이로는 낫다. 나는 그냥 책 쓸 준비하고 책을 내는 게 취미다. 매우 재미있다. 요즘은 한국인의 특성을 범주화하는 책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쏠림, 홍수민주주의, 소용돌이 현상, 빨리빨리. 냄비 근성 등 한국 상황을 보여주는 개념들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재미있다고 하는데, 내겐 책 쓰는 게 그 재미다.

-그렇게 쓸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따로 있나?

=무작위로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면 입력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한다. 또 신문 보다가 사례가 나오면 오려놓는다. 그런 것들을 각 주제별로 파일에 입력한다. 지금도 이미 쓸 책들이 정리돼 있다. 자료 입력을 미리미리 했기 때문이다. 보통 10~20권씩 진행한다. 주제별로 입력해놓은 것이 20권 정도 분량이 된다.

전주/글·사진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 (왼쪽) 반민족적 족벌언론에 사망을 선고하고 풀뿌리 민주언론을 통한 언론개혁을 염원하는 만장이 옥천 언론문화제 들머리를 수놓았다. (가운데) 옥천 언론문화제에서는 이 지역 출신인 〈한겨레〉 초대사장 청암 송건호 선생을 추모하는 사진전도 열렸다. 문화제 참가자들은 송건호 선생 생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오른쪽) 옥천 언론문화제에서 ‘조선일보’ 사망 상주들이 축하 노래를 하며 문상객을 맞고 있다.

‘송건호 언론상’심사위원회는 강준만님을 제4회 ‘송건호 언론상’수상자로 선정합니다.

강준만님은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서 70여권의 저서와 40여권의 편저와 공저를 펴내며 저술활동을 활발히 벌여 온 언론학자이며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문제의식을 던져 온 비판적 지식인입니다.

그동안 강준만님은 <대중매체 이론과 사상>ㆍ<세계의 대중매체 1~3> <대중문화의 겉과 속 1~2> 등의 저서에서 매체와 문화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제공했고, <권력변환: 한국언론 117년사>ㆍ<한국현대사산책 1940년~1980년대> 등의 책을 통해 한국언론사와 현대사를 정리 기록하여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대중매체ㆍ대중문화ㆍ역사 등 다방면에 걸친 이러한 시도는 사회ㆍ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언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소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결과 언론연구의 지평을 넓혔고 학문의 대중화에도 이바지했습니다.

강준만님은 1997년 <인물과 사상>을 창간하여 ‘언론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며 무소불위의 언론을 견제했고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차별’과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며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를 희망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시작한 작은 움직임은 우리사회에 큰 울림이 되었고, 실명비판의 문화 속에서 생산적인 논쟁과 토론이 성숙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심사위원회는 성실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언론연구의 발전에 기여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현실의 문제를 제기하며, 지식인의 양심과 책무를 일깨운 강준만님의 활동이 고 송건호 선생께서 남기신 민주 민족 자유 비판이란 뜻에 맞다고 판단하여 이 상을 드리도록 결정합니다.

심사위원회는 이 상이 지난 수년간 찬성과 반대, 비판과 비난 속에서도 현실에대한 고민을 늦추지 않은 수상자에게 격려가 되리라 믿으며 동시에 강준만님의 앞길에 무거운 책임감을 더하는 계기이기를 희망합니다.

2005년 11월 7일
제4회 송건호언론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정경희 언론인
위원 이해동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위원 김태진 도서출판 다섯수레 대표
위원 방정배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위원 이명순 (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위원 변동현 17대 한국방송학회장
위원 김영석 32대 한국언론학회장

■ 강준만 교수 송건호 언론상 수상 소감문

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무엇이 또 있을까요?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격려와 채찍질의 뜻으로 알고 상을 받겠습니다.” 늘 다른 분들 상 받는 구경을 하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을 받을 땐 그런 말을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그 말뜻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만, ‘격려와 채찍질’의 뜻이라 하더라도 이 상은 제게 과분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앞섭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상을 받지 못하는 저의 심정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송건호 선생님을 개인적으론 알지 못했습니다만, 그 분의 사회적 의미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한국현대사와 언론사 공부를 할 때엔 그 분은 통찰을 제시해준 역사학자로 나타나셨고, 언론이 사회적 공기로 거듭 나기를 열망했을 땐 온몸으로 그 길을 제시해준 언론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 앞에선 그 분은 범인으로선 너무도 따르기 어려운 길을 보여주셔서 많은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거나 좌절케 했을 것입니다.

청암언론문화재단의 발족 선언문 제목은 “송건호 바이러스에 감염되자”였습니다. 과연 어떤 ‘바이러스’를 말한 것이었을까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해석하는 ‘송건호 바이러스’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겸손, 겸손, 겸손입니다. 의례적인 겸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처세술로서의 겸손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뼈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본질로서의 겸손입니다.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님은 과거 송건호 선생님의 강연 활동을 회고하면서 “개인적으로는 20~30년 어린 후배들에게도 늘 형이라는 존칭을 쓸 정도로 깍듯하고 부드러운 분이 어떻게 저처럼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 놀라곤 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송건호 선생님을 몇 번 뵈었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송 선생님의 겸손에 놀랐습니다만, 전 그 땐 그 겸손의 가치와 무게를 잘 몰랐습니다. 그저 보기 드문 미덕을 갖고 계시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후 김대중정권이 들어섰고 노무현정권도 탄생했습니다. 이 두 정권의 핵심 세력은 모두 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고생했던 분들입니다. 저는 두 정권이 잘 되길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실망스러운 일들이 벌어졌고, 저는 사회과학도의 자세로 그 원인이 무엇일까 내내 고민해 보았습니다.

제가 찾은 답은 겸손이었습니다. 두 정권 모두 겸손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겸손은 정말 어려운 겁니다. 성경에 겸손을 역설한 구절이 32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겸손의 실천이 얼마나 어려우면 그랬을까요.

우리는 송건호 선생님이 온몸으로 ‘언행일치’를 실천하셨고, 주변의 그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옳게 사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가시밭길을 걸으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고 용감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역정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겸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도 ‘겸손 코드’로 보고자 합니다.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해방정국의 역사도 당시 모든 이들이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그런 ‘겸손 부재’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었고, 오늘의 상황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뜻과 열망이 앞선 나머지 겸손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일을 할 때엔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조차 내부 성원들 사이에서 묵묵히 빛이 안나는 곳에 임하면서 ‘겸손 바이러스’로 결속을 다져주는 사람이 없다면 출발조차 기대하기 어렵지요. 송건호 선생님의 업적은 바로 그런 역할에도 있었던 게 아닐까요?

겸손은 사회과학적 개념은 아닙니다. 유능한 사회과학자일수록 그런 개념은 피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저는 서구 사회과학의 틀과 개념만으로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 해도 자신의 ‘인정 욕구’나 ‘도덕적 우월감’을 자제하는 겸손을 보일 때에 비로소 자신의 소신을 실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건 서구 사회과학에선 찾기 어려운 답이지요.

저 개인적으로도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 속이 상하거나 분노했을 때 그 이유를 잘 뜯어보면 그건 제가 겸손하지 못한 탓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남에 대한 비판을 권리로만 알고 남의 비판은 의무로 받아 들이지 않는 이중성이 문제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현미경으로 관찰하려 들면서 자신의 허물은 망원경으로도 보지 않으려는 독선과 오만이 문제였던 겁니다. 저는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제가 송건호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인은 형평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들입니다. 텍스트보다는 컨텍스트에 더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아무리 옳은 주장을 펴더라도 그 주장을 펴는 사람의 자격과 행실을 따집니다. 텍스트에만 주목해달라는 주문은 무력합니다. 텍스트 생산자의 독선과 오만은 텍스트를 죽입니다. 겸손으로 무장할 때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성실과 용기와 책임감도 같이 생겨납니다. 사회 진보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무기로 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무엇이 또 있을까요?

저는 그게 바로 ‘송건호 바이러스’의 정체라고 믿습니다. 저는 ‘송건호 겸손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퍼지길 바랍니다. 앞으로 그 일을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감히 이 상을 받습니다만, 두려운 마음은 여전히 어쩌질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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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계 고민하는 진짜 음악인이고 싶다”
정상영 기자 이정아 기자

지난 10월 말 독일 오페라의 명문 하노버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투표를 통해 차기 수석 상임지휘자로 한국 출신의 젊은 마에스트로를 선택했다.

1672년부터 궁정 오페라를 공연했고 1889년부터 국립극장으로 운영되어온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은 베를린, 쾰른, 뮌헨, 함부르크 등과 함께 독일에서 최고등급(1A급)의 오페라극장으로 꼽힌다. 한국인들에게는 1965년 1월 고 윤이상의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 연꽃 속의 진주여!’> 초연으로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절대음감 타고난 피아노 신동

구자범(35)씨. 내년 8월부터 2년간 하노버 국립오케스트라의 수석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게 될 그를 24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났다. 전날 미하엘 클뤼글 신임 극장장과 계약을 마치고 막 한국에 도착한 그는 소주와 돼지족발이 먹고 싶다며 기자를 공덕시장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미 2002년부터 다름슈타트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최연소 상임지휘자(카펠 마이스터)로 활동하며 정명훈씨 이후 차세대 거장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인이 유럽 정상의 오페라극장에서 상임지휘자가 된 것은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를 이끌었던 정명훈씨 이후 그가 처음이다.

“유럽의 명문인 하노버 국립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것도 영광스런 일인데 수석 상임지휘자까지 맡게 돼 더욱 어깨가 무겁습니다. 지난 10월 말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의 의뢰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객원 지휘했는데 당시 관객들의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단원과 합창단원, 솔리스트그룹들이 적극적으로 저를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독일 오케스트라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음악공부로 잘 다져진 단원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앙상블만큼은 최고 수준”이라면서 “내가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이 지휘해도 소리가 제대로 나온다”고 소개했다.

“상임지휘자와 수석 상임지휘자의 위치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시즌 레퍼토리를 결정하거나 오케스트라 단원 오디션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공연할 솔리스트와 성악가를 결정하고, 지휘할 작품과 횟수를 정할 때도 충분히 의견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에 딱 10년이 걸렸습니다.”

정명훈 대잇는 차세대 거장 각광

그는 지난 95년 여름의 기억을 떠올렸다. 절대음감을 타고나, 일곱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우면서 신동 소리를 들었던 그는 틀에 박힌 음악교육이 싫어 철학을 지망했다. 연세대와 대학원에서 존재론과 미학에 심취했지만 음악에 대한 본원적인 갈증으로 괴로와했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음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많지 않을까’라는 회의에 빠져 고통스러워 했을 때 유명한 운동권이었던 여자 친구가 ‘음악을 함으로도 해방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 길로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를 중퇴하고 지휘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 유학길에 올라 97년 만하임 음대 대학원에서 클라우스 아르프 교수를 사사하고 지휘과 사상 처음으로 전과목 최고성적을 받고 수석 졸업해 화제를 모았다. 그해 만하임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라벨의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 공연에 첫 지휘봉을 잡은 뒤 빌레펠트 오페라극장을 거쳐 하겐 시립오페라극장에서 첫 상임지휘자로 데뷔했으며, 2002년부터 독일 다름슈타트 국립오페라극장 상임 지휘자로 활동해왔다.

철학도에서 음악인의 길로 방향을 바꾸게 된 계기를 묻자 “음악과 철학은 존재론적으로 절대지평에서 하나라고 생각한다”면서 “철학은 논리와 수학보다는 시와 음악에 더 가깝다”고 에둘러 설명했다.

소주 돼지족발 그립다며 시장으로

“내가 보는 세계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과 음의 관계, 무의미한 음과 쉼 속에 꿈틀거림을 집어넣어 필연적인 의미를 끄집어내는 작업이 음악입니다. 새로운 관계를 의미 있게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서 해석하고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매개로 좋은 세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음악인이라면 새로운 세계, 좋은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김영삼 정부시절인 97년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충격적인 모습이 독일에 알려지자 담배를 끊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수입의 10분의 1 보내기 운동을 벌였고 자신은 수입의 5분의 1을 북한어린이돕기에 바쳤다. 또 친구 강정수(독일 거주·<한겨레21> 해외 전문위원)씨와 함께 독일에서 활약하는 한국 음악가들을 모아 북한어린이돕기 자선공연을 벌여 수익금 전액을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98년 비자 문제로 서울에 반년 동안 체류한 때에는 미아리 철거민촌에서 야학교사로 일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는 8년 동안 피워오던 미국산 말보로 담배를 버리고 즐겨 마시던 코카콜라를 끊었다. 미국에서 연주회를 제의했을 때는 ‘반전음악회’나 ‘평화음악회’ ‘전쟁고아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요구하며 거절했다. 그는 “주빈 메타는 오스트리아에서 극우정권이 들어서자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며 “나 자신을 그런 거장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고,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 신념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북한어린이돕고 이라크전은 반대

“아직도 내 관심은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를 항상 고민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짜가 너무 판치고 있습니다. 항상 후배들에게 ‘진짜가 되어라. 그러기 위해서는 가짜를 거부하고 비웃을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물론 나 자신이 아직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는 독일에서는 상임지휘자가 되려면 처음 본 오페라도 악보를 한 번 보고 피아노로 ‘오케스트라처럼’ 소리내며 칠 줄 알아야 하며, 독일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해 성악가를 연습시키고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9월 로시니의 오페라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첫 지휘를 시작으로 정기 연주회를 포함한 5번의 심포니 콘서트와 함께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 푸치니의 <투란도트>,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등 오페라 7편, 프로코피에프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시즌 내내 지휘한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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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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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징병제는 세대간의 착취다
연천 총기 난사사건 뒤로 모병제 논의가 불거지고 있다. 지난 5일엔 국회에서 ‘전투력 강화를 위한 병역제도 개선방안-모병제를 중심으로’ 토론회도 열렸다. 모병제를 지지할지 말지의 주된 논거는 이 토론회 제목에서 보듯 ‘전투력 강화’에 더해 국방비 등 병역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비용의 효율적 집행이다. ‘돈을 더 쓰자’거나 ‘세금을 더 내자’는 말은 드물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나를 포함한 한국의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수탈하며 살고 있다. 그 수탈이 거의 강도 수준이다. 20대 초반 젊은이들을 월 3만3천~4만4천원씩 주고 2년 동안 군복무를 시킨다. 분단국가이고 전쟁 발발 위협이 높기 때문에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해도, 돈은 줘야 할 것 아닌가? 옛날엔 못 살아서 그랬다 치자. 세계 선진국들이 모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10년이 넘었다. OECD 국가 중 드물게 복무기간 9개월의 징병제를 실시하는 독일은 입대 최하 연령인 만 22살 남자의 각종 수당을 뗀 최저 기본급(2004년 8월1일 기준)으로 월 1470유로(약 180만원)를 지급하고 있다. 여기에 부인이 있으면 월 100유로, 자식이 있으면 90유로의 수당이 추가된다.

대한민국 기성세대는 국가공동체를 유지·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통상 세금으로 부담해야 할)을 20대 초반 젊은이들에게서 거의 공짜로 착취하면서 자기들은 웰빙을 노래하고 있다. 그 사이 젊은이들은 고민하고 고통받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는다. 연천 총기 사건이 돈 문제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관한 것도 아니다. 자기 노동의 대가를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데 그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또래 연령층이 일반 직장에서 버는 돈 만큼을 지급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병영 문화가 눈에 띄게 개선되지 않을까? 그럼 그 돈이 얼마냐고? 앞의 토론회 발제자인 이상목 국방대학교 교수가, 사병의 연령과 학력을 감안해 평균급여를 산출하고 여기에 전체 사병수, 특수 근무요원수를 따져 계산한 결과에 따르면 1년에 7조3천억원이다.

7조3천억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만 놀랄 액수도 아니다. 지난해 국민들이 낸 세금 총액(총세입) 152조원의 5%가 채 안된다. 지난해 조세부담률이 19.8%니까, 거칠게 계산하면 지금 납세자들이 매년 연봉의 1%를 세금으로 더 내면 이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젊을 때 군에 갔다온 기성세대들은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돈으로 얻을 걸 생각해보자. 지금 병력을 감축하지 않고서 그들에게 평균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말은 감군 없이 모병제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의 80% 이상을 연다는 말이 된다. 모병제를 둘러싼 다른 논란들은 세부적인 장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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