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와 중국고전의 인연


  오늘은 나와 중국고전과의 관계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고전강독의 기본적인 방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여러분들 중에 의아해 하는 학생이 있을 것 같아서죠.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저는 현재 우리대학에서 사회과학개론, 정치경제학, 교육사회학을 강의하고 있지요. 그리고 제 전공이 경제학이구요. 그런데 왜 중국고전강독 강의를 하고 있는가가 궁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실제로 나한테 그걸 물어본 학생도 있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여러분이 이 강의를 수강한 이유가 도리어 궁금하지요. 컴퓨터정보학과 영어학과 일어학과 신문방송학과 등등 여기 출석부에 적힌 수강신청자 학과가 다양합니다. 다양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예 중국고전과 인연이 없습니다. 중어중국학과 학생들만 제외하구요. 중국고전 나아가서 동양학에 대한 여러분과 나의 관심을 이 시간에 조율해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중국고전에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려서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 사랑채에 불려간 것이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였어요. 그러나 그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였다고 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었지요.
  
  감옥에서 눈뜬 관심
  
  제가 그래도 본격적으로 동양학과 중국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런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제가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세대가 지향했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교육제도와 커리큘럼뿐만 아니라 교육적 정서 일반이 서구적 가치일변도였다는 반성이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었다고 기억합니다.
  
  우리의 대학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극도의 패배감과 좌절감속에서 그 유일한 탈출구를 소위 근대기획에서 찾고 있었다는 반성이었어요. 일제식민지 잔재에서부터 해방후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한국전쟁의 처참한 파괴와 상처 속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지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대안을 성급하게 찾고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소위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시간대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나로서는 어떤 바닥에서부터 생각하게 되었어요. 근본적 반성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은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지금은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나요. 소위 근본적 담론 자체가 봉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도 그러한 반성적 정서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지나고 보면 지금보다 도리어 덜 절망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촌 선생을 만나다
  
  감옥의 옥방 속에 앉아서 무기징역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앞에 놓고 먼저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통하여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다소 역설적인 것이긴 하지만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3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책에 비하여 중국고전은 1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주역(周易)’은 물론이고 ‘노자 도덕경’도 한 권이면 몇 달씩 읽을 수 있지요. 3권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교도소 규정이 별로 문제가 안될 수 있었어요. 나중에는 동양 고전 몇 권을 1권으로 제본해서 보내주도록 아버님께 부탁하여 받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중국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의 성향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중국고전 공부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옥방에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老村) 이구영( 李九榮) 선생님이십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작고하신 연민(淵民) 이가원( 李家源) 박사와 동학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시는 실로 한학의 대가입니다.
  
  노촌 선생님과 내가 감옥에서 한 방에서 무려 4년 이상을 지내게 됩니다. 같은 방에서 하루 24시간을 4년 이상 지냈다는 것은 내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노촌 선생님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가르지 않는다’는 일대기를 출간하시기도 하였지만 노촌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중국고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삶의 정직성 여부를 판별하는 것이라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봉건 사회, 일제하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290쪽의 사연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의 한가지를 예로 들자면, 해방 후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선생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키는 등 해방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그 번역을 옆에서 도우며 공부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번역한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중국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과 같이 강독하자는 교재의 대부분이 그때 표시해두었던 부분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여러분이 함께 공부하게 될 중국고전강독은 사실 감옥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노촌 선생님의 생각이 간접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인 아까 이야기한 ‘역사는 남북을 가르지 않는다’에 제가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발문을 썼지요. 그런데 그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무척 재미있다고 하는 부분을 소개하지요. 발문의 끝부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 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 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 뵙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2. 교재 문안의 선택에 관하여


  여러분과 한 학기동안 같이 읽을 교재가 학교 문구점에 있는 복사점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구입해야 됩니다. 교재가 없으면 강독할 수가 없습니다. 복사하여 제본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교 바깥의 복사점에서 주문제작했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요. 학생들이 복사점으로 원본 원고를 가지고 가서 맡겼는데 가격 흥정을 썩 잘해왔었어요. 그 까닭을 물었더니 가관이었지요. 그 복사점 이름이 ‘신영복’사점이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우기고 주인도 값을 깎아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가격이 지금도 학교 문구점의 제작가격에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교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중국고전의 극히 일부분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매우 기초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고전 문헌을 섭렵한다는 것은 평생을 걸려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5천년 동안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문자해독이 불가능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피라밋이 파라오의 무덤인가 아닌가를 판별할 수 있는 확실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중국문헌만이 고대로부터 해독이 가능한 유일한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특히 우리의 강의는 전공과정이 아니고 교양과정에서 비전공자들이 대상입니다. 강사인 나도 비전공자이구요. 그런 점에서 중국의 기본적인 고전을 대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등을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대의 신유학(新儒學)과 심론(心論), 선종불교(禪宗佛敎)의 개요를 읽을 수 있는 정도가 추가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 이후 시기는 그 당대의 시와 산문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공자가 아니고 나 역시 전공자가 아니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전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고전뿐만이 아니라 역사학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고전과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현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과제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재문안을 선택하는 기준을 나름대로 설정하였습니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감옥에서 표시해두었던 것을 기초로 만든 것입니다만 크게 2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변혁기 읽기
  
  첫째는 BC 7세기- BC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 즉 한 마디로 사회변혁기를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입니다. 주(周)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의 종법(宗法)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일대 변혁기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 시기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무한경쟁시대입니다.
  
  주(周)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覇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던 그리스시대와 같은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축의 시대(axial era)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초의 사회조직, 즉 국가를 건설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최대한의 담론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현대적 상황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변혁기와 거대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대적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본적 담론을 재조명하는 일은 후기 자본주의에 대하여, 특히 그것이 요구하는 세계체제와 일방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투기성과 비생산성에 대하여 비판적 전망을 체계적으로 조명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21세기라는 새로운 시점에서 새로운 문명의 문제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최대한의 사회건설담론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고전강독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기본적 주제로 할 것입니다.
  
  새 패러다임 모색
  
  둘째는 고전강독의 전 과정에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모색을 화두처럼 걸어 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이 화두는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서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그 모델을 현재와 현실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소위 건축적 의지가 바야흐로 해제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상황입니다. 관념적인 모델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교조적이거나 관념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주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발표한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From Substance-centered Paradigm to Relation-centered One)’에서 문제제기를 해두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서론 부분에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서구 특히 서구 근대사가 그 패러다임에 있어서 ‘존재론적‘임에 비하여 동양적 패러다임은 그 기본에 있어서 ‘관계론적‘입니다.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개별적 실체를 기본단위로 인식하고 개별적 실체들이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 가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회든 국가든 개별적 실체들은 각각 독립적 의미와 행동원리를 가집니다. 다만 그것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구조와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회론(社會論)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패러다임은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앞으로 여러 주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 학기 동안에 여러분과 강독하게 될 고전구절들은 대체로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재조명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강독의 참뜻
  
  고전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한 과제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학에 관한 최근의 저서에서 읽은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1차대전 때였다고 기억됩니다만 알프스산맥에 주둔한 일개 소대가 있었습니다. 젊은 소대장이 일개분대를 정찰임무를 주어 내보냈어요. 그런데 정찰분대가 떠나자 이내 폭설이 쏟아졌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연일 계속해서 내리 퍼부었다고 합니다.
  
  제가 읽은 책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젊은 소대장은 그 일개분대가 틀림없이 폭설과 폭풍에 전원 조난당했다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주일인가 지난 후에 당당하게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정찰분대가 무사 귀대하였습니다. 반가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그 험한 풍설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어요.
  
  대답은 산맥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어느 계곡으로 행군할 것인지 어느 지점에서 설동(雪洞)을 파고 피신할 것인지 등을 모두 지도를 보고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그 풍설을 극복하고 행군할 수 있었고 무사히 귀대할 수 있었다는 의기양양한 답변이었어요, 그래서 소대장이 그 지도를 받아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도는 알프스산맥의 지도가 아니라 피레네산맥 지도였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펼쳐들고 있는 고전강독 교재가 이를테면 알프스산맥 지도가 아니라 피레네산맥 지도인 셈이지요. 그러나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알프스산맥과 피레네산맥은 그 구조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학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과학과 이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 중국고전과 한문공부


  앞으로 고전 원문을 함께 읽고 해석하는 일에서부터 강의가 시작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대체로 한자공부나 한문공부가 없는 세대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나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나 역시 한문은 전공과도 멀고 소양도 부족합니다.
  
  고전강독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전으로부터 사회와 인간에 관한 담론을 재조명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조명을 통하여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하여 다시 한번 근본적 사고를 간추려보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모색하는 일입니다.
  
  한자나 한문공부는 부차적입니다. 물론 욕심입니다만 교재에 있는 고전문장을 여러분들이 다 암기하면 좋지요. 암기는 못하더라도 혼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강의시간으로는 그것을 확인하거나 습득하게 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문공부에 왕도는 없습니다. 다른 어학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름길이나 편법은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의 서당에서 수학하던 방법은 참으로 우직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무조건 암기하는 것이지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무조건 암기하는 그런 우직한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서당 방식 놀랍다
  
  서당에서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록자대야(麋鹿者大也)라는 이야기입니다. 미록자대야란 ‘미(麋)는 사슴중의(鹿者) 큰놈이다(大也)’라는 뜻이지요. ‘麋’은 ‘큰사슴 미‘자거든요. 당연히 麋, 鹿者, 大也라 띄어 읽어야 맞지요.
  
  그런데 아침에 책방도령의 글 읽는 소리를 듣자니 麋鹿, 者大也로 읽더라는 것이지요.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책방도령의 읽는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麋, 鹿者, 大也로 바르게 끊어서 읽더라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직한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매우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영어공부를 대체로 10년정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논문을 쓰거나 영시를 짓고 감상할 정도가 되기는 어렵지 않나요?
  
  그러나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4, 5년이면 뛰어난 문장력과 작시(作詩)수준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과학적 방식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원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왕 내친 김에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학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의 탄식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교과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거나 심지어는 I am a dog. I bark.로 시작되는 교과서도 있었지요.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누님들의 영어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의 차이는 큽니다. 아무리 언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 교과서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한자나 한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학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담론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그 담론을 열심히 천착하는 동안에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항간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는지 아세요. 소머리를 삶으면 귀는 절로 익는다고 하지요.
  
  물론 한문공부를 열심히 해서 스스로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그러나 일단은 고전에 담겨 있는 사상을 중심으로 그 뜻을 이해하고 구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암기하는 식으로 순서를 잡는 것이 좋습니다.

 

4. 서구근대문명과 동양학


  이번 시간에는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에 대하여 몇 가지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명사적 비교에 관한 저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논하는 방식의 접근방법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밝히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가 지적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소위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우는 그것이 갖고 있는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표면에 국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존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것끼리 더 쉽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差異)보다는 관계(關係)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바로 그러한 관계망(關係網)을 주목하는 것이 바로 관계론적 패러다임입니다. 우리가 고전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서양문명은 동양문명에 대한 비교개념으로 만들어진 조어(造語)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류문명입니다. 현대세계를 주도하는 문화는 서양문화입니다.
  
  서양문화는 그 자체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문화적 준거(準據)입니다. 따라서 동양문화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변적 위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서양적 시각에서 동양문화가 조명되는 구도이지요.
  
  종교와 과학의 모순
  
  근대사는 서구문명이 전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양문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세계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문제점은 곧바로 현대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된다고 믿습니다. 현대자본주의 나아가서는 현대의 세계질서를 서양문명의 근본적 구조 즉 문명적 패러다임의 문제로 이해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還元主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전을 읽는 동기가 바로 현대적 과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혁시기의 근본담론이 이 강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양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명제(合)라는 것입니다. 흅(D. Hume)과 칸트(I. Kant)의 견해입니다. 서양근대문명은 유럽고대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2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과학은 진리(眞理)를 추구하고 기독교신앙은 선(善)을 추구한다. 과학정신은 외부세계를 탐구하고 사회발전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과 관계를 조정함으로써 그 기능이 잘 조화된 선진적 문화이었으며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이 서양문명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서양문명을 이루고 있는 이 2개의 축(軸)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 결정적 문제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반종교적이며 기독교신앙은 반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모순에 관한 역사적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 기독교 교리를 벗어난 과학자들이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지요. 여러분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천문학을 뒤엎으려하는 바보라고 비난하고 성경에 여호와가 태양을 멈추라고 명령했지 지구를 멈추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어 지동설을 비판하였지요. 칼빈도 마찬기지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난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을 위협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기의 이론을 감히 발표하지 못했으며 사후에 출판되었을 뿐입니다. 브루노는 지동설을 선전하다 불타죽었고 갈릴레이는 2차례 종교재판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말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 외에도 과학과 종교의 모순과 박해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종교의 과학에 대한 억압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문명 구도의 와해
  
  거듭되는 과학의 경이적 발전의 결과 오늘날에는 종교에 대한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眞理)와 선(善)이라는 2개의 축이 무너지고 그 조화와 균형의 구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서양문명의 기본적 구도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이 도덕과 인생가치의 기초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면서 사회의 모든 질서를 획일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점을 일찍이 지적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황혼,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였지요.
  
  오늘날에는 더욱 현실적인 문제들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하지요. 현대서양사회의 범죄율, 생명경시는 종교와 신앙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對立面)을 상실하고 무한질주를 거듭하였다는 주장입니다.
  
  핵, 세균, 화학무기, 기타 고분자화합물질의 대량생산과 배출로 인하여 생태계는 파괴되고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존조건마저 파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를 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기되는 성찰이 바로 서양문명의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문명의 구조 자체의 불완전성 즉 과학과 종교의 이원적 구성과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처방으로 제기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여 과학이성에 대한 종교의 지도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종교의 지도성 회복은 불가능하며 현대서양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는 예언까지 등장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패권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경영은 또 다른 형태의 몰락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지요.
  
  인문주의로 바라보자
  
  이러한 반성과 성찰의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동양학적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서양근대문명의 모순이 바로 과학과 용납될 수 없는 종교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성과 함께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이러한 모순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은 없으며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현실론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 살펴 보겠지만 자연과 인간과 나아가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문명론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양학의 기본구도가 인문주의인 것은 사실이며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는 구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동양학에 대한 관심은 종래의 운동관성이 그대로 연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대륙에 이어서 다시 떠오르는 광범한 중국시장과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일본자본에 대한 국제금융자본의 관심이 오히려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자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어쨌든 구미 중심의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의 실체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계화라는 형식을 띤 패권주의적 팽창정책 역시 바로 근대 서양문명의 기본적 모순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자본주의 역시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 군사과학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동구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소연방의 해체와 러시아의 몰락 그리고 중국의 자본주의화 과정 등 이를테면 대립면을 상실한 과학의 질주에 다름 아니지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논리는 한마디로 자본축적운동의 파상적 확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 왔고 또 당분간 주도해 갈 세계질서 역시 서구 근대문명이 당면한 문제와 동일한 모순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학에 대한 관심의 출발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심 역시 이러한 과제와 관련되는 범위에 국한하여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5. 동양사상의 특징

       (1)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자본축적운동의 파상적 확장이 마치 대립면을 상실한 근대 서양문명과 그 구조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자본축적은 이제 실물생산으로부터 유리되고 실물생산은 수요로부터 유리되고 있습니다. 자본은 생산과 무관하고 생산은 소비와 무관한 운동을 합니다.
  
  자본운동의 원리는 가치증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그 가치증식이 반드시 실물생산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증권시장이라는 투기장에서 그것이 실현되더라도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실물생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리지 않더라고 팔린 것으로 간주하고 다음 생산과정에 들어갑니다. 팔리지 않았더라도 팔린 것으로 간주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신용입니다. 어음을 할인해주기도 하고 대출해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축적운동이 대립면을 상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립면을 상실한 근대 서양문명의 모순구조와 같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모순구조를 조명해주는 것이 동양사상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동양사상의 현대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서구인들의 동양관을 원천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대하여 이야기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즉 청교도윤리로서의 금욕주의가 자본축적을 이루었으며 그것이 근대사회를 만들어낸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프로테스탄티즘이 곧 자본주의정신이라는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베버에게 있어서는 자본주의는 최고 최선의 사회제도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입니다. 막스 베버에게 있어서의 동양적 윤리란 이 프로테스탄티즘 즉 청교도윤리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도구이며 장치적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원형이지요.
  
  여러 가지 이론적 분식을 하고 있습니다만 프로테스탄티즘을 요약하면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재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욕주의가 자본축적을 가져왔고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서양문명의 모순구조와 관련하려 베버를 이해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근검 절약 그리고 자본축적이라는 이러한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며, 초월적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본축적은 그것 자체로서 절대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근검 절약의 정신이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합리적 제어장치로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며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매우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버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의 개념은 지극히 순결한 것이며 이에 반하여 동양사상에 대하여는 바로 이 초월적 순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욕망에 대한 합리적 제어장치가 없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이지요. 유교적 윤리는 이러한 초월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내면적으로 초극의 독백이 없고 현세성 또는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현세적 향유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와 도덕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인 체면(face)의 문화라는 것이 베버의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결론적으로 동양사상은 비종교적 현실주의이기 때문에 역사적 지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성립과 프로테스탄티즘간에 정신사적 필연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또 자본주의를 기준으로 기독교와 유교사상을 비교하는 방식 자체가 갖는 비대칭적 구조를 논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더구나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와 절약 저축 재투자 그리고 거대한 자본축적이 신의 소명이며 신의 영광을 구현시키는 것이라는 베버의 체계가 현대자본주의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관하여 논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베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 논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자본논리를 합리화하는 작업에 충실하였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 즉 자본이 사회로부터 독립하고 신의 소명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아가 인간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키는 거대한 모순구조에 대하여 베버는 최소한의 전망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면죄부를 주기 위한 논리에 충실하였을 뿐이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와 동양사상에 대하여 저급한 이해의 층위를 드러내었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현실성으로부터 현세적 향락과 체면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것이 하나의 종교적 지배력(The Religion of China)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2)道는 가까이 있다


  동양사상은 그 기본적 체계에 있어서 사후(死後)의 시공(時空)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입니다.
  
  베버가 동양적 형식주의와 체면에 대하여 지적한 것은 물론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에 담겨있는, 즉 그것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동양사상의 관계론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하였음이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양적 사고는 현세를 하나의 초월적 신의 소명(Beruf, Calling, Vocation)과 개인의 직업과 직선적으로 관계 맺는 형식의 단선적 기계적 사유체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과 삶은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자연과의 관계성 그리고 인간관계라는 연기(緣起)의 장(場)에서 순간(瞬間)과 점(點)과 가능성(可能性)과 확률(確率)로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베버의 비판은 동양사상이 비종교적 인문주의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적 지(智)와 동양의 도(道)가 보여주는 차이에서 그것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philosophy)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과 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道)란 실천하며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이와는 판이한 것입니다.
  
  로댕의 조각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서 터득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의 문제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종교적 존재임에 반하여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에 있습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이고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 현실주의적이며 당연히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1601년 마테오리치가 가져온 과학이 중국 사대부 계층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을 적대시하던 서양의 기독교 사회와는 판이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적 패러다임은 종교라는 대립면을 따로 상정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조화와 균형의 체계를 스스로 완성하고 있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3)자연은 生氣의 場


  그러나 동양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을 ‘생기(生氣)의 장(場)‘으로 인식하는 통체적 사상 특히 자연과의 조화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생기(生氣)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농본적(農本的) 성격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동양사상의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양사상의 바로 이러한 특징이 후기산업사회의 모순구조를 드러내는 것과 아울러 대립면을 상실한 현대자본주의의 패권적 속성을 명쾌하게 조명해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사상에 있어서 자연은 하나의 장(場)입니다.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란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력장(磁力場), 중력장(重力場), 전자장(電磁場)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힘의 질서입니다. 그것을 ‘생기(生氣)의 장(場)‘이라 합니다.
  
  그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조화되고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 인하여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the complex of partial totalities)’이며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입니다.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 다시 말하자면 관계망(關係網)과 연기(緣起)의 장(場)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것 중의 최고(最高), 최량(最良)의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은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우주(宇宙)의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우(宇)는 상하사방 즉 공간의 개념으로서 유한공간(有限空間)--->체(體)--->지(知)--->상도(常道)의 체계를 구성하고, 주(宙)는 고금왕래(古今往來) 즉 시간의 개념으로서 무궁시간(無窮時間)--->용(用)--->도(道)--->무상(無常)의 체계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유한과 무한의 통일 즉 공간과 시간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체를 이루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이 통일되는 태극(太極)의 상태 태극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설명이 다소 추상적입니다만 예를 들어 진흙(空)은 그릇(色)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主我)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흙-그릇-진흙의 과정 즉 생성이 계속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질서는 변화하는 것입니다. 생주이멸(生住移滅),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한 것으로 됩니다.
  
  이러한 통체적(holistic) 체계와 질서에 있어서 어떤 한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한다거나 확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주의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자연주의 속에 해소됩니다.
  
  인간주의에 대하여도 특별한 지위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어느 특정분야의 불균형적 자기확대는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화와 절제가 당연한 가치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가치는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나고 절용휼물(節用恤物), 수분지족(守分知足), 나아가서 안빈(安貧)함으로써 낙도(樂道)하는 삶의 철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항상 천(天), 지(地), 인(人) 즉 삼재지도(三才之道)의 관점에서 규정됩니다.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다.’ (맹자) 자연과 우주의 생성체계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지요.
  
  동양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규정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초월적 가치로부터 인간을 상대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을 처음부터 부분이면서 전체인 생기의 장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사상의 인간주의는 서구적 휴머니즘과 다른 차원의 의미내용을 갖는 것입니다.

(4)동양적 인간주의


  흔히 인간주의를 동양사상의 특징으로 거론하는 경우 우리는 자칫 인정주의 수준의 내용으로 파악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서양의 고대노예제에 비하여 동양적 노예제가 훨씬 인간적이라는 평가가 그렇습니다.
  
  인정주의도 인간주의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양사상의 인간주의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입니다.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인간의 외부에 어떤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것의 종속적 개념으로서 선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善)한 인간, 어진(仁) 인간처럼 그 자체로서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인성은 그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로서 파악된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이 개인적으로 이룩하고 있는 품성의 의미를 넘어선 관계론적 관점에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동양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仁)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인이 무엇인가는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논어에서 그것을 묻는 제자에 따라서 공자는 각각 다른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만 인은 기본적으로 人 + 人 즉 二人의 의미입니다.
  
  즉 관계론의 관점에서 본 인간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人間) 즉 인(人)의 사이(間)로 이해하는 다석 유영모의 ‘사이의 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여하튼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 가는 어떤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과 장의 개념으로 그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관계론적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동양적 사상에서 인간주의는 이처럼 철저하게 이러한 관계론적 개념입니다.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은 곧바로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성의 고양이며 관계론의 사회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사상은 초월적 가치를 바깥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종교적이며 인간주의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의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적 의미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그것의 내용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개인주의적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조화와 중용


  서양문명이 과학과 종교를 2개의 축으로 하는 구조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서양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대립모순의 구조를 내장(內藏)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가 내재되어 있음으로서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모든 사상과 문명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적 패러다임이 인문주의적이고 따라서 과학과 종교간의 모순이 없다고 했지만 이것은 그 자체를 실체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내부의 대립모순구조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동양적 패러다임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적대적이지 않은 형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중용사상(中庸思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의 2개의 축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의 인간이며 문화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소위 감천역물(勘天役物)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에 견제하고 사후에 위로하는 체계가 동양적 패러다임 내에 존재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라 할 수 있습니다.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의 질서, 최선의 질서로 상정한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하였습니다. 자연이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이 생명과 지구의 역사가 임상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가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을 선언합니다. 사람은 땅을 배우고 땅은 하늘을 배우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는 것이지요.(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慾)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완전지향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위선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로서의 반대측면에 서로를 견제하면서 전체적으로 중용의 조화와 균형으로 이끌도록 하는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 다른 사상을 대립면으로 삼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사상으로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의 관계론적 구조입니다.

   6. 동양철학의 현대적 의미

  중국 고전강독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학기의 짧은 시간으로는 가늠도 못하고 끝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처음처럼 각오가 지나쳐서 우리는 지금 너무 엄청난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친 김에 하나만 더 합의하고 시작하지요.
  
  21세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래담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20세기의 연장을 바라는 이데올로기적 내용입니다.
  
  미래에 대한 객관적 전망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망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각각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소망이 전망의 형식을 띠고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를 그 기본적 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어내는 담론이 아닌 한 그것은 새로운 담론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먼저 21세기의 과제를 가장 앞서 도전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중국적 모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Aufheben)이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통일과정을 새로운 패러다임과의 관련 속에서 인식하고 관리해나가는 문제에 대하여도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민족문제를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와 함께 사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남과 북이라는 냉전질서의 청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문제이기도 하면서 나아가 그것은 동(同)과 화(和)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동과 화의 논리는 앞으로 고전강독에서 지속적으로 그 의미를 심화시켜가도록 하겠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동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돌이켜보면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며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의 논리를 화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패러다임 쉬프트의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통일과정을 어떠한 논리로 관리하고 이끌어 가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화동논의는 과거와 미래로 열려 있는 귀중한 키워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성격규정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통일과정이라는 민족문제를 세계사적 문제와 연결시키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고전강독을 진행하면서 적절한 곳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으며 대개는 길을 틀린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도 합니다.
  
  근본적 논의가 갖는 의미가 오늘의 상황에서 더욱 더 결정적 의미를 가지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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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발(發) 대안의 모색

대담 : 신영복, 김명인

2003년 7월 26일,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교수 연구실


김명인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희 『황해문화』는 2003년 가을호로 통권 40호를 맞이해서 ‘이라크 전쟁, 그 이후’라는 주제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우리와 상관없는 먼 곳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그 전쟁 자체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보입니다. 냉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라크 전쟁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신영복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나눠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신영복 : 우선 멀리까지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다른 분들께도 자주 얘기하지만 멀다는 것은 성공회대학은 우리사회의 담론 지형에 비주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ꡔ황해문화ꡕ 역시 비판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험대에 올라선 포스트냉전시대의 미국과 세계


김명인 : 감사합니다. 저희로서도 선생님께서 부담 없이 편하게 이야기하실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4월에서 5월 사이에 이라크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을 보면서 아마 미국의 부시 정권이나 또 그들을 지지했던 일부 미국민을 제외한 상당수의 세계인들이 ‘아니,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눈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일종의 열패감을 많이 느꼈을 것 같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전 세계 시민들이 반대하고 찬성하지 않는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결행을 했지요. 미국이 자기들의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끝까지 자기들 생각대로 전쟁을 마무리짓는 걸 보면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존재와 일극지배를 그냥 방관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무력감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굉장히 컸으리라고 생각하고요. 이 전쟁이 과거의 양극체제, 냉전체제에서 이제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것을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어떻게 대응할 방법은 없는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하는 고민들, 그것은 지식인 사회에서의 고민이기도 하고 세계 시민사회의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도 나름대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이라크 전쟁이 도대체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신영복 : 그처럼 치열한 반전 여론에도 불구하고, 또 명분이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일방주의적으로 패권을 관철하는 과정을 보면서 방금 말씀하셨듯이 열패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문제는 이라크라는 한 국가의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고,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특히 이라크 침공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이 언론을 통해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주로 석유자원 확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아프칸 이라크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석유자원 확보하기 위해서라거나 또는 지중해 쪽으로 송유관을 건설하기 위해서라는 논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저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1945년 이후에 석유결제화폐가 줄곧 미국달러로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이 석유결제화폐가 달러라는 사실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미국 달러가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지요. 석유대금으로 받은 달러가 미국 상품에 대한 유효수요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오일달러가 미국의 금융을 받쳐주는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또 미국 증시를 뒷받침하기도 하고, 미국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메우는 재원이 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석유결제화폐가 달러라는 사실이 미국 경제에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미국달러가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미국경제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붕괴될 수 있는 그런 구조거든요. 현대자본주의는 금융자본주의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정적인 것이지요. 미국경제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기본적인 경제학 이론을 예로 들어보지요. 상품의 물량이 100이고 화폐량이 100이라면 균형을 유지합니다. 물량의 증가가 없는데도 화폐 증발(增發)을 하면 인플레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상품의 물량이 백에서 천, 만으로 증가했는데 화폐가 그대로 백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화폐경색이 일어나서 경제가 침체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인플레 유발없이 화폐가 증발될 수 있고 증발되어야 하지요.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규모가 얼마나 커졌는지 상상을 초월하지요. 미국은 불환지폐인 달러를 찍어내었지요. 그리고 자기들의 화폐로 삼은 거예요.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달러의 형태로 지금 1,300억 달러 가까운 외환을 보유하고 있잖아요. 세계 모든 나라들이 다 달러를 가지고 있죠. 만약에 이 달러가 가격이 폭락해서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간다면 미국 경제는 도저히 지탱을 할 수가 없죠. 그만큼 미국이 자국화폐를 국제통화로 가짐으로써 과도한 팽창을 한 거죠. 그래서 그 팽창된 미국의 자본축적 구조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광범한 개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라크 침공도 예외가 아니지요. 미국으로서는 사활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돼요. 전문가들은 석유결제화폐가 EU화폐로 바뀌는 경우 최소 20~40%의 달러 가치 폭락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EU진영에서는 결제화폐를 EU화폐로 바꾸려고 계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고, 그래서 EU를 이끌고 있는 독일이나 프랑스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끝까지 반대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거죠. 아마 앞으로도 석유결제화폐를 달러에서 EU화폐로 바꾸려는 시도는 꾸준히 계속되리라고 봐요. 후세인도 EU화폐로의 전환을 2002년에 선언했었고, 이란은 이미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를 EU화폐로 바꿨고, 베네수엘라의 미CIA가 개입된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것도 이러한 조치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지요. 북한의 경우는 경제규모가 크지 않지만 지금 북한에 들어가려면 EU화폐를 가지고 들어가야 돼요. 이건 미국의 팽창과 과도한 자본축적구조, 그야말로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자본주의를 어떻게 포위해야 되는가에 대한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있는 것이고, 미국은 그걸 깨뜨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이라크침공은 미국경제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봐야됩니다. 미국이 왜 그처럼 치열한 반미, 반전여론을 무릅쓰고 이라크를 침공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자본주의, 자본축적 구조의 결정적인 모순 구조를 우리가 간과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명인 : 제가 과문해서 결제화폐로서의 달러의 가치 하락과 유로화의 대체 가능성, 이런 부분들이 이라크 침공을 밀어붙인 요인이 된다는 건 잘 몰랐습니다. 통상적인 파악으로는 미국의 군수자본이라든가 석유자본의 개입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신영복 : 물론 그것도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패권의 강한 측면만 보고 그 강한 측면의 반대 편을 못 보는 경우가 흔히 있거든요. 그래서 이건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공룡이 계속 생존하기 위한 몸집의 크기에 관한 논의라고도 얘기할 수가 있는 거죠.


김명인 : 우리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두고 열패감을 느낀다거나 무력감을 느낍니다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미국이라는 나라가 무리한 세계 지배를 해나가려는 데서 오는 취약성도 발견할 수 있는 사건으로 봐야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미국 자체의 취약성으로 열패감이나 무력감을 상쇄시킬 수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서 자기들의 의도를 일단은 어느 정도 관철했다고 보십니까?


신영복 : 일단은 물리적인 전쟁형식에 있어서는 관철한 걸로 보죠. 미국에 비판적인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베트남전쟁과 같은 수렁에 빠졌으면 하는 일방적인 소망도 가지고 있었고, 또 지금도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국지적인 게릴라전도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해서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군사적인 전술 차원에서는 끝났다고 봐야되는 거죠. 다만 이제 문제는 베트남 전쟁 당시에 호치민이 “베트남은 월남의 정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이길 것이다” 라고 얘기한 것처럼, 중동지역은 물론 세계화를 반대하는 제3세계진영에서는 오히려 월스트리트에서 이길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승리가 완결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팍스 아메리카의 모순을 뚫는 세계화의 바깥은 가능한가.


김명인 : 그리고 이번 이라크 전쟁의 의미가 이런 게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몇몇 활동가들이 이라크 현지에 가서 고통받는 이라크인들과 같이 고통을 나누고, 계속해서 현지보고를 보내오고, 그리고 우리가 파병결정을 했을 때 그곳의 활동가 일부는 한국국적을 포기하겠다고 까지 하면서 강하게 우리의 미국 추종적인 외교를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했는데요. 우리의 시민운동이 그렇게 급박한 위기에 처한 다른 나라의 시민들과 연대를 표명하고, 직접 현지에 가서 활동을 하고, 또 그곳의 시민들하고 계속해서 관계를 가져가면서 결속을 다지고 하는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파괴당하고 침략당한 고난받는 이라크인에 대한 연대라든지 공감의 표명도 많았고요. 이것이 아마 미국이 세계여론에서 고립됐다고 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굉장히 몰리게 된 주요한 원인이 중의 하나일 텐데요. 이것이 열패감이라든지 무력감과는 다른, 또 다른 의미의 세계시민운동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모습들이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우리뿐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계속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적절히 평가를 해야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영복 : 예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 시민사회의 양심적인 사회운동가들이 그 위험한 피폭지역에 가서 고난받는 이라크 인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 아주 중요하죠. 그게 미국의 폭격이나 침공을 저지하지는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이 인정주의라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결단은 미국의 부당한 침공을 폭로하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투쟁을 조직해내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내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 시민사회가 그런 활동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 것은 전 또 다른 각도에서 우리가 평가해야 된다고 봐요.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의 억압과 지배 하에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드러내는 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거든요. 우리들의 객관적인 조건, 우리들의 처지, 한반도에 있어서의 미국의 이해관계가 이라크에 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라크에 대한 동참이 비단 이라크 문제만 제기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제를 보다 중요하게 제기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명인 : 그 전의 우리 사회운동이라고 하면 국내적 관점이 굉장히 지배적이었죠. 그걸 넘어서서 세계평화라든지 세계시민운동을 얘기하면 관념적이라거나 이단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만, 저도 이번 이라크 침공 기간을 거치면서 이제는 바람직하고 진보적인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근래에 들어서 눈에 띄는 양상이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굉장히 중요시한다는 점인데요.


신영복 :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세계체제, 특히 G7에 대해서 강력한 세계 각처의 반대투쟁들이 신속하게 조직되는 걸 보면 이런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투쟁, 그러니까 반세계화의 세계화는 지금부터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국제연대의 형식이라고 봅니다.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그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변혁역량이 그런 네트워크의 일환으로 연대할 수 있고, 실제로 하고 있다는 것도 운동역량의 상당한 발전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김명인 :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역량이 성숙한 뒤에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참여함으로써 성숙해진다고 봐야될 것 같습니다.


신영복 : 맞습니다. 상호보완적인 것이죠.


김명인 : 그런 면에서 우리가 큰 역할을 했다거나 우리의 활동이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첫 걸음을 잘 떼었고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훌륭한 기회를 마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일국적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을 하는 데 있어서, 또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에 있어서, 전쟁이라는 게 갖는 참담한 결과를 보면서도 한 편으로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신영복 : 네 그렇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만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 즉 미국자본주의의 모순구조 즉 자본축적 구조의 모순과 결정적인 뇌관을 동시에 주목하게 된 것이 첫번째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미국을 반대하고 일국패권주의를 반대하는 반세계화 투쟁의 네트워크가 다시 작동된다는 것이 성과랄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좌절이나 열패감만으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명인 : 90년대부터 많이 나온 말입니다만 ‘세계화의 바깥은 없다’ 또는 ‘팍스아메리카의 바깥은 없다’ 는 말이 이번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느껴진 부분이기는 한데, 과연 그런지. 그러니까 세계화의 바깥, 팍스아메리카의 바깥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고는 누구도 얘기하지 않고 분명히 있다고 보긴 합니다만, 그것의 가시성이라고 할 부분들이 어느 정도까지 구체성을 띨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지금 시대가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완성된 단계라고 보는데요.


신영복 : 완성된 단계,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세계체제가 거의 완성되고 더 이상 흡수해낼 만한 시장이라든가 자원 같은 게 없다는 것인데요.


김명인 : 그리고 그 중심에 미국이 서있고요.


신영복 : 그렇습니다. 현재 바깥이라고 하면 쿠바를 비롯해서 이번에 무너졌습니다만 이라크, 이란, 리비아, 북한 같은 소수정권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주의 러시아와 중국이 일단 자본주의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또 국제금융자본에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깥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깥이 없다는 사실이 일단 공룡으로서는 위기가 아닌가 생각돼요. 언젠가 세계화의 실상을 고발하는 외국 시사만화 중에서 공룡이 어느 평온한 가정의 안방 밥상에 한 발을 올려놓고 있는 그림이 있었어요. 그 그림을 보면서 이것은 세계화의 완성, 즉 바깥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공룡은 울창한 밀림 속에 있어야 생존할 수 있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안방의 밥상을 덮칠 정도면 공룡의 삶의 조건도 사라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하는 역설적인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래서 세계화의 바깥이 없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전략의 완성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 소멸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김명인 : 바닥을 쳤을 수도 있다라는 말씀이군요.


신영복 : 그렇지요. 소멸의 시작이고, 붕괴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이 문제는 나중에 논의를 좀 더 했으면 싶습니다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자본축적 구조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화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경제학적으로 따지면 초국적 금융자본의 축적구조거든요. 자본이 금융자본화 한다는 것은 산업자본이 실패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돼요. 금융자본이라는 것은 실물생산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거죠. 극단적으로 얘기한다면 IMF 사태에서 우리가 잘 겪었듯이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 합병하는 거죠. 산업자본의 축적구조가 정치경제학으로 얘기하자면 소위 잉여노동과 그 잉여노동이 창출한 잉여가치를 영유하는 것인데 비하여, 금융자본은 그러한 산업자본의 축적방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축적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다른 자본에 대한 수탈의 단계로 넘어간 것이지요. 이것이 산업화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라고 얘길 하거든요. 그래서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한 초국적 자본의 세계전략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그야말로 후기 단계의 성격을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얘기해서 더 이상의 산업자본 축적이 가능하려면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창출이 필요하고, 그걸 위해서는 주로 농촌으로부터의 이농에 의한 노동력의 추가공급이 필요한데 이게 세계적으로 완료됐어요.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까지도 탈 농촌화가 거의 완성돼서 더 이상의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이 고갈 됐죠. 특히 노동력에 대해서는 노동력의 발전과 계승에 필요한 만큼의 분배를 안 했어요. 그리고 자연생태계의 경우에도 산업자본이 수탈적으로 이용만 했지 다시 복원해놓지 않았거든요. 자기들이 부담해야될 자연복구의 비용을 외화했었지요. 그걸 국가에다가 떠 넘겼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적자로 이어지게 됐죠. 재정적자는 결국 조세부담으로 다시 소비자에게 떠 넘기는 형식이지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적인 순환과정을 가졌기 때문에 이게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산업자본들이 만들어낸 제품들이 더 이상 유효수요를 발견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전쟁과 경제군사화라는 파괴적 순환체제가 작동하였던 것이지요. 무기를 생산하고 그 무기로 파괴하고 다시 자본축적의 기회를 창출하는 과정을 답습해왔었다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자본축적 구조가 그나마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초국적 금융자본의 단계이고 세계화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라크 침공은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화의 완성이라는 것은 이처럼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산업자본의 실패와 그에 따른 초국적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입니다. 세계화란 금융자본의 세계적인 규모로의 확장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건 완성이면서 동시에 어떤 붕괴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김명인 :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것도 더 이상 새롭게 농촌에서 분해돼 나오는 노동력이 없기 때문에 유연화 제도를 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계급이 금리생활자 층이죠. 생산을 하지 않고 금리를 통해서, 금리를 수취함으로써 생활을 영위하는 그런 층이 많아지면 그 사회의 건전성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하는 것인데, 아마 금융자본의 형상이라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그런 금리수탈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신영복 :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가 소멸한 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한 이유가 바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갖는 역동적인 생산력 발전이었지여. 자본주의 200년동안의 생산력의 발전이 전역사의 생산력발전을 능가하였다는 사실이었지요.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체제가 이제 그것의 최소한의 의미마저도 잃고 기생적인 체제로 전락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죠.


김명인 : 결국 이 위기 이후의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논리적으로 자본주의가 고도의 위기 단계에 놓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위기도 참 오래 됐습니다. 100년 전부터 위기라고 했으니까요.


신영복 : 냉전체제 하에서는 사회주의 진영이 자본주의의 그런 일방주의적인 독주를 견제하기도 하였고, 또 자본주의 측에서도 사회주의 진영을 의식해서 복지제도를 계속 확충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게 오히려 자본축적구조를 보완했던 그런 역설적인 구조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 반대 측면이 사라졌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비판적 타자(他者)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모순구조를 더욱 첨예화하는 걸로 봐야 되죠.


김명인 : 야만성을 통제할 수 있는 기제가 사라진 거죠.


신영복 : 네, 그것뿐만 아니라 자본축적구조가 더 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라크 이후의 한반도



김명인 : 우리가 세계적 네트워크에 참여해서 세계체제에 대한 저항에 참여한다는 점도 중요한 발견이고 우리의 중요한 과제입니다만,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습니다. 한반도 문제가 사실은 한반도를 생존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또 남북한 민중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미국이 지금 어떤 식으로 갈지는 아주 불투명한 것 같습니다. 최근에 다시 북한에 대해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적대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 적대성은 또 도덕적 적대성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전략상의 필요에 의해서 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 적대성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위기의식으로 주어진다고 봅니다.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설정했습니다만 어쨌거나 미국이 이라크 다음에 선택할 수 있는 몇 개의 가능한 선택중의 하나가 한반도이고, 그게 우리에게는 특수한 문제이지만 미국이나 전세계적인 입장에서 보면 보편적인 미국의 세계전략의 한 지점일 뿐이거든요. 그렇다면 거기엔 우리의 정서나 우리의 주관적인 열망과는 상관없이 냉정하고 냉혹한 힘의 논리가 관철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에 우리에게는, 마치 이라크 민중의 실제적인 고통을 우리가 이해 못하듯이 세계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정도의 고통이 또 우리에게 가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에서 이라크 이후가 세계사적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우리 한반도의 역사, 한반도의 현실 속에서도 정말 큰 문제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현재의 부시정권 뿐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한반도에 대한 시각이라고 할까요, 북한 문제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영복 : 우선 저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것인가 라는 논의부터 시작해야된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은 한국의 은인이라는 것이지요. 보수진영의 주장입니다만 한반도 논의는 혈맹의 한미동맹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미국관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점령군으로 인천에 상륙해서 실시한 미군정에서부터 그 이후에 한국에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분단정치권력을 창출하고 미국경제의 하위 구조로서 경제구조를 편성했던 과정들을 냉정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미국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냉정한 인식이 없이는 미국이 앞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를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서도 미국 자체의 철저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정하리라고 봅니다. 이라크 침공이 좋은 예가 됩니다.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북핵문제를 포함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 동북아 정책이 그 연장선상에서 결정될 거라는 걸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경우는 다른 개인에 대해서 희생적일 수 있지만,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됩니다. 국가는 그런 점에서 냉정한 이성국가(理性國家)일 뿐이지요. 특히 지금까지의 미국의 역사로 봤을 때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선택은 최소한의 유보와 배려도 기대할 수 없다고 봐야지요. 문제는 북한 핵과 북한이 악의 축이라는 규정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논의를 굉장히 협소한 틀 속에다가 가두는 겁니다. 핵으로 말한다면 사실은 한국전쟁 이후 50년 간 핵의 공포 속에서 계속 떨었던 건 북한이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핵공격 작전 계획을 실제로 수립했었고, 그 이후로 미국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지만 주한미군의 해군과 공군이 핵을 가지고 있었지요. 핵배낭, 핵지뢰, 전술핵이 한 반도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특히 팀스피리트 훈련이 소위 핵전쟁 연습이라는 것도 다 알려진 사실이고요. 이게 소위 한반도 핵문제의 본질이지요. 최근에 북한 핵을 한반도 핵문제의 본질로 만들고 있지만 이것은 핵문제라기보다는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국가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일단 이해를 해야된다고 봅니다. 북한 핵이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라크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무기는 오히려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본질은 최근의 여러 상황을 거치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에 이라크 침공, 한반도의 핵 위기 그리고 여중생사망을 항의하는 집회를 통해서도 한반도의 전쟁 위험이라는 것이 북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이 이런 점으로 볼 때 북한 핵문제를 다루고 접근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우리가 다시 한 번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여러가지로 기회라고 생각되기도 하지요.


김명인 : 그 인식은 이제 많이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KBS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까 누가 한반도 안정에 더 위협적인가라는 질문에 미국이 48%, 북한이 39% 정도로 미국이 더 위협적이라고 많이 인식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문제가 북한문제 자체로 다뤄졌다기 보다는 동북아전략의 일환으로 다뤄진 것이고,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북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마 미국의 국가 위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신영복 : 그렇습니다. 소위 북미단독대화를 미국이 계속 기피하고 중국, 일본을 포함한 다자간 대화로 이끌려는 이유가 북한문제가 미국의 동북아전략과 관련이 있다는 걸 반증하는 거죠.


김명인 :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것이, 이라크의 경우에는 주변에 강대국이 없어서 미국의 침공에 대해서 견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북한의 경우는 어떤 견제나 협상이 가능한 강대국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게 아마도 한반도 문제의 파국적인 전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로서는 그 강대국간의 합의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우산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 걱정스러운 것인데요. 현재로서는 미국이 북한을 하나의 축으로 해서 동북아 전략을 짜나가고 있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서 굉장히 복잡하고 다층적인 어떤 사건들이 전개돼 나갈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반도 문제가 단지 우리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기보다도 이런 세계사적 흐름과 맥락에서 아주 미묘하고도 어려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신영복 : 네 복잡한 상황인 게 사실인데, 우선 북한의 의도와 미국의 의도를 나눠서 본다면 북한은 7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주장했었어요. 그런데 미국이 늘 기피해왔죠. 그래서 사실은 핵카드의 의미가 체제 보장이라고 지금 흔히 알려져 있듯이,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북한이 자기들의 경제문제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하는, 이런 평화체제를 위한 협상용의 성격이 저는 북한 핵의 기본이라고 봅니다. 한편 미국입장에서 보면 중국과 러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동북아의 새로운 냉전구조에 대비한, 또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는 미국의 전통적인 국가전략과 관련해서 북한 핵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국 또는 동북아에 대한 전략구상의 축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것이죠. 특히 부시정권에 와서 북한 핵문제의 위기구조를 고조시키고 있는데요. 부시정권은 텍사스를 중심으로 한 석유자본을 기반으로 한 정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는 보잉사를 중심으로 한 군산복합체와도 밀착해 있는 정권이기도 하구요. 부시가 대변하는 자본의 성격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자본이지요. 과거 키신저 시대의 자본을 대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자본분파간의 헤게머니에서 주도적이지 못한 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자본에 비하여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고 지배불럭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현대자본주의을 초국적 금융자본이라고 하였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차기 대선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미국의 권력구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헤게머니 그룹인 IT자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부시 정권자체의 미국 내 안정기반이 취약해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력한 카드가 바로 MD체제이지요. 부시로서는 사활이 걸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MD체제를 합리화하고 추진하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북한 핵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주장은 북한 핵은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용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대량살상무기의 수출은 테러지원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일본을 MD체제에 끌어넣기 위한 구상이 거기에 하나 더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한반도 정세와 북한 핵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라든가 난민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미국의 그러한 동북아전략을 옆에서 방조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셈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북한 고립정책과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을 비판해서 북한이 자력으로 여러 가지 경제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도록 우리가 돕는 게 필요해요. 그것이 남북의 군축입니다. 군비부담이 북한 경제규모로는 엄청난 짐이지요. 미국은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군비축소는 선제공격이 불가능한 10만이하의 수준으로 단번에 결행해야 합니다.40만 20만 등의 중간단계를 거치는 경우 각 단계마다 전체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됩니다. 단호하게 단번에 결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군비축소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기본입니다. 북한으로 하여금 군사비부담을 덜어주고 경제를 살려낼 수 있도록 도우는 일임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통일과정에서 우리의 부담도 덜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한국경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분단비용을 부담하면서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 그 자체가 분단의식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현 단계에서는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세계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장기간의 휴전체제를 종식시키고 교류협력과정을 활성화하는 것, 그리고 평화협정 체결과 평화구조의 정착이 기본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통일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통일에 이르는 전 과제를 100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평화구조의 정착이 전체의 90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만 되면, 즉 평화구조가 정착되어, 북한의 군사비부담을 덜어주고 자력으로 경제문제에 몰두할 수 있는 그런 구조만 만들어지면 통일은 어떤 과정을 밟아 언제 이루어지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북한 핵문제는 바로 그런 관점, 미국의 부시정권과 미국자본의 축적구조의 문제, 또 미국의 동북아전략 즉 신 냉전구도 즉 중국을 가상적으로 하는 새로운 대결구도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중국을 가상적으로 하는 구도가 2025년에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구도인지 아니면 미국이 역사적으로 항상 필요로 해 온 악마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상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어쨌든 북한핵문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 핵을 북한 정치지도자의 야심이라든가 북한의 정치적인 오판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분단의식이나 반공의식의 연장선상에 우리의 논의를 가두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명인 : 저는 오히려 조금 낙관적인데 미국에 의한 북한 안전보장이 저는 조만간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럼 북한이 그것을 무엇과 맞바꿀 것인가. 이를테면 남한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추종국가이고 일종의 종속국가인데 북한도 그 체제 내에, 이를테면 김정일 정권의 존립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라도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편입해 들어가는 과정으로 갈 것인지, 그게 어떤 교환조건이 될 것인지 아닌지에 더 관심이 있거든요.


신영복 : 그것은 북한의 선택이기에 앞서 우리나라의 미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먼저 논의 순서 상 미국의 북한에 대한 외과수술적 처치 즉 선별적인 핵시설 폭격에 대해서 이야기하지요. 이것은 인접해있는 일본이나 중국, 소련의 이해관계와 바로 맞물려있고 그 쪽으로 확산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이라크의 사막지형과는 달리 북한의 지질구조로 봤을 때 현재 미국이 개발하고 있는 벙커버스터로는 지하군사시설의 파괴가 사실상 어렵다고 해요. 그래서 의회에 소형핵탄두 개발을 금지하는 조항을 해제해달라는 안건을 상정했는데 오히려 의회에서 그 예산을 삭감했죠. 그래서 당분간은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만약 그게 개발이 돼서 소형핵탄두에 의한 선별적인 선제공격이 행해지게 되면 그 때는 바로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된다면 일본열도를 포함해서 미국 본토까지도 핵전쟁의 피해지역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굉장한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시나리오는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북한의 요구는 명백합니다. 한마디로 평화협정체결입니다. 협정체결이 아니더라도 평화보장에 관한 요구이지요. 이러한 요구는 누가 보더라도 미국이 그걸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전세계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기는 하지만, 평화보장이 미국으로서는 전혀 추가부담이 없는 것이거든요. 미국이 북한 지도자들을 일컬어 인민을 굶기는 지도자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를 하자면 조직폭력배들이 가게문을 막고 손님들을 못 들어가게 하면서 그 가게의 경영를 나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폭들이 업소를 인수하는 방법이 그러하지요. 50여년 동안 군사적 압력과 고립 봉쇄정책으로 일관해온 미국으로서 논리가 맞지 않는 비난이라는 것이 북한측의 반론입니다. 한국은 장사하는 나라니까 잘 알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김명인 : 북한 민중을 굶기는 것은 미국이죠. 오랫동안 경제봉쇄를 하고 계속해서 평화를 위협하니까 북한도 자위적으로 군사력을 계속해서 늘리지 않을 수 없는, 그 구조를 만든 것은 미국인데요.


신영복 : 1차 걸프전 이후 이라크 봉쇄로 말미암아 의약품과 식량이 없어서 병사하고 아사한 노약자와 어린이들의 숫자는 정확한 보도가 없습니다만 수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작전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공개된 소위 OP PLAN 5030이라는 작전계획서는 북한을 목표로 한 일종의 저강도 전쟁을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군비지출을 증가시키고 경제봉쇄와 미사일 수출봉쇄를 통하여 경제력을 고갈시키는 그런 작전이지요. 이러한 저강도 전쟁은 물론 주변상황을 고려한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해요. 그리고 지금 북한이 벼랑끝 정책을 구사한다고 하고 있지만 북한으로서는 평화협정에 대한 주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네바 평화협정을 위반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여론조작을 통하여 북한의 의도를 왜곡하고 고립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명인 : 현재는 북한을 잠재적 가상적으로 전재하고 남한과 일본에 MD 시스템을 도입하게 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게 저는 좀 단기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때문에 북한 핵문제를 자꾸 강조하고 위기를 얘기하고 그러는 것인데, 만약에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평화보장을 해주면서 북한한테 개방을 요구하고, 그렇게 되면 MD 시스템이라는 건 또 다시 중국을 대상으로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 그러한 상황에서는 북한도 세계체제 속의 중하위권에 종속되면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미 편입돼 있는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현실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한반도가 확보해야할 동북아 또는 세계정치 지형상의 입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고민해야될 문제가 바로 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경제와 한국사회를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에 비유하지요. 한국은 큰 톱니바퀴에 물려있는 작은 톱니바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세계체제의 중하위권에 종속돼있는 체제- 초국적금융자본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물려 있는 작은 톱니바퀴가 우리의 경제현실이며 우리의 사회적 위상이라는 것이지요. 큰 톱니바퀴는 천천히 돌아도 되지만 거기에 물려있는 작은 톱니바퀴는 정신없이 돌아야 하지요. 우리의 자립적이고 주체적 위상을 지킬 수 없는 것이지요. 핵위기가 고조되면 유입된 외국자본이 빠져나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신규외국투자가 발길을 돌리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는 것이지요. 환율도 그렇고 수출도 그렇습니다. 이처럼 거대한 톱니바퀴에 매달려 있는 구조거든요. 이런 문제들은 어차피 단기적 과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중장기적인 정책을 선별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봐요. 다시 말하자면 물려있는 기어를 빼낼 수 있는 중장기적인 정책 즉 민족공동체의 전략적 사고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문제는 남북의 통일과정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진행된다고 봐요. 저는 북한이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적 질서의 중하위권에 종속되는 이른바 한국과 같은 과정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민족문제이며 아까 이야기한 민족공동체에 대한 전략적 사고이지요. 평화체제 이후의 통일과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으로서는 최후의 기회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국면에서 남북간의 상호 보완적 측면을 최대화해야 합니다. 남과 북이 가지고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의 최적배분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북한이 세계자본주의의 하위에 종속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북한의 경제자립 문제 뿐만이 아니라 남한이 기어를 뺄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인 셈이지요. 저는 한국이 자립적일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바로 남북의 교류협력과 통일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세계체제의 전반적인 변화가 어떠한 형태로 진행될 지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로서는 참으로 무력한 상황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시기가 갖고 있는 역사적 중요성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중차대한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명인 : 북한이 어쨌거나 지금은 일종의 미국에 저항하는 몇몇 나라 중의 하나이고, 특히 지금은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고 보이는데요. 그러나 이 저항 자체가 포지티브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저항은 네가티브한 것이고 생존을 위한 것이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미국이 지금 세계체제 속에서 제 마음대로 안 되는 몇몇 부분 중의 하나고 저는 이것이 아주 소중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아직은 경제적으로는 세계체제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정치적으로만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저항을 하고 있는 다른 나라와는 좀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자립갱생 체제를 유지하면서 빈곤해지고 굶어죽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만 미국 없이 살 수 있는 어떤 하나의 모범을 보인 나라거든요. 이 경험이 비록 열악한 경험이지만, 세계체제의 변동과정 속에서 평화정착과 분단극복 과정과 맞물리면서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의 포섭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또는 최소한 견제를 할 수 있는 크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밑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신영복 : 바로 그 점에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 아까 얘기한 세계화에 대한 반세계화 투쟁의 네트워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한반도가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하죠.


김명인 : 그 점이 사실은 한반도 문제가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지금 이론적으로 금방 손닿을 만한 건 아닌데...


신영복 :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확한 전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당위성을 확인하는 정도 이상의 논의는 아무래도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대안으로서의 한반도는 가능한가



김명인 : 북한 핵문제라든가 미국과의 관계 처럼 최근의 한반도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남한 내에서의 다양한 입장들이 있지 않습니까? 좀 추상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도대체 우리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될 것인가,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될 것인가 하는 것. 남한의 이른바 시민사회나 진보운동권에서도 조금씩 경향차이가 보이는데요. 선생님께서 이런 정도는 기본적으로 합의를 하고 이 원칙은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점을 말씀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신영복 :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적인 지형 자체가 아주 복잡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완고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조선조 말기에서부터 일본의 식민지지배구조를 그대로 승계한 소위 미군정 시기를 거쳐 30여년의 군사정권 기간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친일, 친미적인 지배구조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굉장히 완고하고 보수적인 지배구조를 갖고 있지요. 이러한 지배구조는 하나의 체제로서 완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것은 엘리트 충원구조에서 역력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보수구조의 완성은 그 사회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엘리트계층의 재생산구조의 완성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이지요. 엘리트 충원구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사회의 본질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해방이후 상당기간 동안 계속된 풀브라이트 장학제도가 있습니다.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만 이 장학제도를 통해서 지금까지 약 30만 정도의 친미 엘리트가 양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위 식민모국의 의식으로 피식민지의 엘리트를 교육한 셈이지요. 지금은 수많은 유학생들이 자기부담으로 그 엘리트 재생산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양산된 엘리트가 우리나라의 각급 결정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지요. 친미 보수구조가 얼마나 완고하고 완벽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가 대북문제, 또 민족문제를 자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담론지형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동시에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정도이지요. 최근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이러한 지배구조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견해도 많이 제기되고, 특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여중생 압사사건 이후에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권력구조의 변화라고 할 수 없는 사회의 정서적 변화에 대해서도 기존의 보수구조는 이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10만 명의 시청광장 집회가 즉각적으로 조직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보수구조는 합리적인 보수구조가 아니지요. 일종의 수구적 성격을 갖는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배후에 미국이라는 외세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최강의 미국이 뒷받침하고 있는 보수구조이지요. 권력은 보수구조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제도 언론권은 한국사회의 권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읽고 있습니다. 제도 언론권은 가장 강한 권력의 소재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그 권력을 거스르는 일이 한번도 없었지요. 이러한 언론이 한국사회의 담론지형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일어나는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하는 변화의 물결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비판적이고 민족주체적인 담론공간이 점점 더 확장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신세대 문화의 탈권위주의에도 기대하지요. 그리고 사회전반의 세대교체의 속도도 매우 빨라졌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구요. 이러한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인의 역할이지요. 비판담론, 저항담론의 장을 부단히 조직해내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보수구조를 이야기하면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197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물론 미국의 시나리오였습니다만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주는 교훈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완고한 보수구조와 그 보수구조를 뒷받침하는 외세와 결탁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우에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진보적인 정권은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행정권만을 장악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에 얼마든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당면의 통일운동과 민족운동이 그만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직시하자는 뜻이지요.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를 광범하게 지배하고 있는 보수구조와 그 배후의 외세를 못 보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그만큼 어려운 지형에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합의부터 일단 공유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인 : 통일문제, 분단극복문제와 연계시켜서 한반도가 세계체제 극복의 어떤 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얘기를 조금 더 확대시켜서 얘기해보면, 한반도에 가해지고 있는 세계체제의 중압이 있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미국이라는 막강한 초강대국의 중압인데, 그 중압을 견디면서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전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주체의 힘이랄지 어떤 나름대로의 프로그램이랄지, 뭐 이건 구체적으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걸 좀 짚어봄으로써, 처음에는 제가 열패감이라든지 무력감으로 얘기를 시작했습니다만 공룡이 커지면 그것은 거꾸로 위기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너무나 압도적이고 너무나 조밀하게 세계와 인간의 삶을 지배해 들어오는 그런 세계체제의 극복의 단초가 한반도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가, 또는 한반도발 대안이라는 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조금 더 나눠보고 싶습니다. 우선 평화체제 구축이 통일이나 분단극복의 90%라고 말씀하셨는데 세계체제 극복의 대안으로서, 통일과정을 포함한 한반도발 대안이라는 게 가능한 것으로 보시는지요?


신영복 : 제가 중국 북경대학 교수를 비롯하여 중국의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중국에 관한 분석과 전망이 많습니다만 대부분의 견해는 주로 서구적인 시각에서 현대 중국이 자본주의화해 간다고 보고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해안지방과 특구를 중심으로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비판적인 엘리트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현대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5천 년이라는 아주 장구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몽고가 지배하더라도 그걸 중국적인 것으로 소화해내고,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지배를 하더라도 소화해내고, 불교가 들어오면 불학(佛學)이 되고, 맑시즘이 들어와도 마오이즘으로 소화해내는 그런 거대한 대륙적 소화력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지금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이 창조된다면 그건 중국 발(發)일 것이라는 얘기지요. 물론 일리가 있다고 봐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참으로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명의 패러다임이 변화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의 최대 비극이란 바로 유일한 문명, 유일한 체제를 강요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근대화와 자본주의체제의 신념체계였다고 보는 것이지요. 유일한 모델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구조가 바로 청산해야될 구조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제국주의의 논리인 것이지요. 중국은 그들의 중화주의는 어디까지나 문화주의라고 강변하지만 결국은 그게 바로 동(同)의 논리라는 것이지요. 흡수 합병의 논리이지요.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 가치를 갖는 것이라 하더라도 획일주의적 지배방식을 취하고 있는 한 그것은 새로운 것일 수 없는 것이지요. 패권주의적인 동(同)의 논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것들과의 공존을 승인하는 화(和)의 논리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한반도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발원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발의 대안이 가능하다고 봐요. 만약 그것은 한반도의 평화구조가 남과 북이 평화적 공존의 틀을 만들어 낸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북이 남을 적화하거나 또는 남이 북을 흡수하려는 통일방식이 바로 우리가 청산해야 할 낡은 패러다임입니다. 그것이 바로 배타적인 가치로 흡수 합병하려는 동(同)의 논리이기 때문이지요. 현재 많은 논의에서 그 틀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만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의 구조는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인 화(和)의 원리를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각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20세기의 가장 전형적 모델을 각각 고수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과 북은 종속적 자본주의와 전시공산주의라는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를 다양성으로 승인하는 평화와 공존의 구조를 만들어 간다면 이것이 곧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근대성의 존재론적 성격이 반성되면서 동서 민족 언어 등 다양한 문화가 각각 존중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구조가 진정한 근대성의 극복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로 얼룩진 근대사를 청산하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모색될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5천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5천 년 동안 한(韓)민족이 비록 대륙을 지배하는 강성국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의 민족동질성을 지니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개의 축(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한민족의 세계와의 관계방식에 있어서의 2개의 축입니다. 그 하나는 주체성(主體性)입니다. 민족의 내부결속과 단결을 통하여 주체성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축은 개방성(開放性)입니다.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확대하여 변화를 수용하는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은 5천년 동안 세계와의 관계를 이 두 가지 축으로 대응했다고 봐요. 그래서 고구려와 고려같이 외부세계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체성을 강화하는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신라와 조선조와 같이 외압이 강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하는 방향으로 나가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이 주체와 개방이라는 두 개의 축은 각각의 모순이 있었다고 봐요. 주체성을 축으로 하였을 경우에는 민족의 정체성은 지킬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정체될 수밖에 없었던 반면에, 개방화의 경우는 당나라의 지배 하에 있었던 통일신라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조 말의 개화의 예에서 나타났듯이 개방성이 문화의 발전과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개방화는 식민지화, 종속화로 이어지는 위험성이 있었거든요. 문제는 이 두 축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나가는 지혜가 우리민족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남북 분단이라는 구조도 이데올로기적인 냉전구조라기 보다는 한민족이 살아왔던 두 개의 축이 남북으로 외화(外化)돼서 나타난 측면을 인정해야된다고 봐요.


김명인 : 주체와 개방으로요.


신영복 : 북한의 경우에는 주체성을 강화하면서 오히려 고립과 정체를 면치 못했다면, 남한의 경우는 개방을 통해서 문화적, 물질적으로 성장한 반면에 민족의 주체성을 잃고 종속화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남북이 화(和)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공존과 평화구조를 만들어낸다면 이러한 두 개의 축을 적절히 구사하는 민족전략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요.이러한 과정은 민족사적 과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한반도 발 대안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김명인 : 분단 극복과정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한 편으로는 미국 중심의 일극적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은 아까 말씀하셨듯이 남북간의 교류를 통해서 이뤄져야겠죠. 그것이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과정이긴 합니다만, 이를테면 독일은 서독 헤게모니로 통일이 돼버리고, 베트남은 전쟁 방식에 의해서 통일이 됐으니까 우리가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 국가로서 그 둘의 단점을 반복하지 않는 그러한 통일 과정이 있어야 되겠죠. 그 과정이 그냥 고립된 게 아니라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남한은 좀 빠져 나오고, 북한은 또 그 영향력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방이라는 세계적 추세와 접맥되는 그런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분단극복 얘기를 하면 마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들린 것처럼 생각하는 일부 경향이 있는데, 저는 일단 민족 단위로 사유를 해야된다는 원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분단체제라는 것은 남과 북에 각기 다른 민족국가가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을 통일적으로 사유하려면 하나의 민족단위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단지 민족의 정통적인 테제처럼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한다는 그런 좁은 의미는 아니고요. 지금으로서는 적대적으로 분단 돼있는 상태를 극복하고 비적대적이고 평화적이면서 동시에 동(同)으로 흡수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일정한 주체성은 지키는, 이걸 만드는 과정 자체가 바로 세계체제에 틈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북아에서 예상되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들의 새로운 충돌의 지형 속에서도 그 충돌이 그냥 적나라하고 야만적으로 흐르지 않는 하나의 완충지대를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그것이 양극화되지 않는, 다극적인, 또는 다극이라는 말이 이상하다면 선생님의 말씀대로 화(和)의 형태를 세계사적 지형 속에서 자리잡게 하는 그런 가능성이 우리의 분단 극복 과정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 그런 가능성을 전망하는 것도 필요하고 또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우리가 승인해야 되겠죠. 그래서 지금부터의 남북 통일과정 또는 동북아의 정세, 이것은 우리로서는 민족적 과제이면서 크게 보면 세계사적인 의미마저도 읽어낼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고 중요한 시기라고 저는 생각을 하죠.


김명인 : 거기에 이제 조심스럽게 한반도발 대안에 갈음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라크 전쟁이 있었고 한반도가 또 다시 세계사의 초점이 되고 하는 것이 위기이고 굉장히 괴로운 일인데, 동시에 그것을 또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순전히 남북한 민중들의 역량이기도 하고, 참 지혜로워야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신영복 :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개인적으로는 좀 회의적이에요. 왜냐하면 한 사회나 국가의 모순이 적정한 선에서 해결되고 바뀌는 게 아니라 그 모순이 끝까지 가고, 또 같은 모순을 반복하는 모습을 우리 역사를 통해서 보아왔거든요.


김명인 : 그렇게 모순이 끝까지 가는 게 문제입니다. 대개 모순이 해결되는 경우는 없고 실현되는 경우가 많죠.


신영복 : 그래서 논어에서도 곤이부지(困而不知), 곤경을 겪고서도 알지 못하는 걸 하지하(下之下)로 보잖아요. 한 개인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만 인류사의 도처에서 그러한 현상이 빈번하게 목격되지요. 그런 점에서 한반도 사태도 바로 그런 곤경의 극점까지 가기 전에 해결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봐요.


곤이지지(困而之知)만 해도 괜찮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곤이부지가 역사의 현실이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어렵지요.


김명인 : 그런 인식자체, 이게 중요한 거다라는 인식을 우리가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영복 : 그래서 이 얘길 하는 이유도, 탁상의 가운데에 현재상황만을 올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역사적인 전개과정 속에서 보자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한반도 발이든 아니든 그 미래의 담론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에 관한 열린 생각을 가지고 현재를 논의해야 된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 중심의 사고, 또 현재 우리나라에 형성된 완고한 토대에 있어서의 보수구조, 이런 것들을 불변적인 조건으로 사고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역사적인 관점, 또는 열린 미래지향적인 관점, 또는 여러 가지의 변화 가능성,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죠.


김명인 :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로부터 한반도로 이르는 위기의 흐름에 대한 얘기는 많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반도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도 해주셨고요.


신영복 : 그것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렇게 만들어가야 할 책무가 있다고 얘기해야 되겠죠.






21세기 인류는 무엇으로 사는가



김명인 : 선생님의 개인사의 역정도 그렇습니다만, 이를테면 맑시즘이라든지 근대주의적 발상에 한동안 묶여 있다가, 근래에는 일종의 탈근대적 상상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요. 우리가 갖혀 있는 근대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할까요, 그 바깥에서 사유해야된다는 필요도 제기되고 있는데, 선생님은 젊은 시절에 - 경제학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만 - 근대적 사유의 세례를 받으셨다가 그것 때문에 고생도 하셨고, 최근에는 동양 고전을 많이 읽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양고전이 얼마나 탈근대적인가는 또 따로 얘기해야 되겠습니다만, 일단 두루두루 동서양의 전반적인 큰 사유들을 접하시면서 도대체 21세기에 산다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선생님이 가진 지혜를 나누어 받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요. 우리가 얼마 전까지 근대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의를 해왔습니다. 즉, 근대라는 게 뭔가, 지금은 근대를 벗어났는가, 포스트 근대인가 아니면 포스트 근대로 가는 과정인가, 만약 근대 이후라고 한다면 지금의 세계사는 무엇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듣고 싶고요, 그리고 거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이런 얘기를 좀 편하게 듣고 싶습니다.


신영복 : 소위 말하는 21세기 담론, 새천년 담론이 무성했던 게 벌써 엊그제잖습니까? 그러한 담론들을 접하면서 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념이 잘못돼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대부분의 새천년 담론에는 시간을 강물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그런 의식구조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과거로부터 시간이라는 강물이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 아니면 최근에는 시간의 강물이 미래로부터 흘러온다는 의식구조를 보여주고 있지요. 새로운 미래란 하이테크의 급속한 발전과 관련된 그런 전망이거나 세계화와 관련된 것인데, 시간의 강물이 미래로부터 다가와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흘러간다. 이런 구조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근대란 도대체 뭐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점의 역사적인 의미가 뭐냐고 얘기할 때 아주 혼란스럽거든요. 최근에 미래로부터 온다, 새로운 지구촌, 새로운 제3의 물결이 지금 밀려오고 있다, 우리는 그걸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된다 등등의 담론들은 결국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걸 모두 무장해제 해야된다는 결론으로 떨어지는 것이지요 지극히 위험한 의식구조가 아닐 수 없어요. 이러한 의식구조는 권력은 식민모국에 있고 모든 변화는 식민모국으로부터 온다는 피식민지의 보편적인 의식형태이긴 합니다만 현단계에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의식구조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세계화와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요. 새삼스런 논의를 다시 거론하는 까닭은 새천년의 담론이 숨기고 있는 이러한 도착된 의식구조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주류담론의 본질은 완고한 보수적 구조를 은폐하고 급속한 변화의 이미지를 의식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더불어 숲』이라는 책이 세계기행에 관한 책이거든요. 제가 세계기행을 시작하면서 제일 첫 기행지로 선정한 곳이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 제일 끝에 있는 우엘바라는 항구였어요. 왜 이름도 없는 항구를 찾아갔는가 하면 거기가 콜럼버스가 1492년에 출항했던 항구였기 때문이었고 코럼버스의 출항이 바로 근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물론 자본주의는 그 이후에 산업혁명을 거쳐서 아주 지배적인 사회체제, 경제체제가 되지만, 저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 - 발견이 아니라 도착이죠 - 한 것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봐요. 제가 나중에 잉카 마야의 현지를 찾아가서 참혹한 역사를 다시 목격하게 됩니다. 피사로와 코르테스를 필두로 하는 식민주의자들이 천육백 만 명의 원주민들을 학살했어요.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그만한 숫자, 천육백 만의 흑인들을 그야말로 사냥해서 노예로 끌고 갔던 그런 비극의 역사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를 찾아갔거든요. 그래서 저는 15세기의 우엘바에서 21세기의 바그다드에 이르기까지의 세계 역사를 아울러 근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보고, 비록 근대성이라는 것의 여러 가지 현상․형태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별로 변화가 없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그 근대성을 청산하는 일이 - 그것이 방금 말했던 한반도발이든 중국발이든 -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보고, 그 마지막이 바로 미국 패권주의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을까 하는 전망, 전망이라기 보다 오히려 소망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근대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라는 것은 저는 철학적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존재론(存在論)적인 패러다임이라고 봐요. 세계는 무수한 존재로서 구성되어 있고, 각 개별적 존재는 자기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화하는 운동을 한다. 그 존재가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배타적 존재이다. 배타적으로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성들 간의 충돌을 사회계약이라는 제3의 국가권력에 위임해서 최소화 해내는 것이 근대 국가의 형식이고, 서구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강철의 논리가 외부로 표현되는 경우 그게 식민주의로 나타나고 제국주의로 나타나고, 또는 초국적 금융자본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이러한 존재론을 자기의 운동원리로 하는 근대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과연 인류가 공적(公敵)으로 삼았던 소위 BIG 5, 빈곤, 질병, 무지, 부패, 오염, 이 다섯 가지의 공적을 과연 해결했는가? 저는 해결하지 못했다고 보거든요. 하나 하나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만 근대사는 수많은 강국(强國)들을 만들어내었지만 사회의 본질인 인간관계 그 자체는 여지없이 황폐화하였습니다. 인류의 공적을 해결하기는커녕 수많은 전쟁과 살육과 인간성의 파괴를 동반한 근대사는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역사적 필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해방 후 세대이기 때문에 주로 서양적인 사고로 교육된 그런 맨탈리티를 가지고 있거든요. 우리신화는 모른 체 그리스 신화부터 읽은 세대이니까요. 또 한글 세대이기도 하고요. 교도소에 들어가서 비로소 내가 갖고 있는 그런 맨탈리티의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양고전을 읽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또 좋은 선생님도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행운도 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을 읽는 과정에서 서구적인 그런 존재론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동양학 속에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게 제 개념 표현으로는 관계론적 패러다임(Relation-centered Paradigm)입니다. 근대사외의 존재론적 패러다임(Substance-centered Paradigm)과는 전혀 다른 원리입니다. 세계는 배타적인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자리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물질이든 생명이든 궁극적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의 표준모델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쿼크는 혼자서 존재를 못 해요. 존재는 존재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확률로서 존재하는 형식이거든요. 예를 들면 불이 자기 혼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생명의 단위인 세포는 철저하게 외부로 열린 시스템이거든요. 외부의 에너지나 물질과의 대사가 없으면 그게 생명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환경은 물론이고, 다른 개체를 향하여 열려있는 관계의 총체가 생명이고 물질이라는 것이 동양학의 핵심입니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 이를테면 그러한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그래서 국가간이든, 개인간이든 이런 관계론 적인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라는 것이지요. 사실 존재론적 논리가 우리들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어요. 자녀교육도 그런 존재론적 논리로 행해집니다. 다른 애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강철의 논리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지요. 개인이든 회사든 국가든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사회운동단체들도 외부로부터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요. 우리 학교의 사회교육원 노동대학과정에 있는 노조 간부들에게 연대(連帶)만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 바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연대와 관련하여 꼭 한 가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연대는 반드시 하방(下方)연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대의 가장 상징적인 가시물(可視物)이 물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가장 큰 바다가 될 수 있는 원리가 바로 하방연대에 있는 것이지요 .


김명인 : 아래로 흐르면 큰 바다가 될 수 있다는.

신영복 :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경우 연대는 여성, 비정규직, 해고자, 빈민, 농민들과의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연대가 연대의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연대는 약한 자의 전략전술이기 때문입니다. 상방(上方)연대는 흡수와 추종이기 십상이지요. 연대는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면서 현실적으로는 근대구조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연대는 우리시대의 실천론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존과 평화의 원리라는 점에서 통일의 원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연대문제는 이러한 실천의 중심을 이룰 주체 역량을 조직해 내는 기본적인 철학이라고 생각을 하죠. 근대성과 관련하여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근대청산의 과제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라는 반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명인 : 근대가 이제 단자론적 사고 방식, 어떤 고립된 개별자들의 세계라는 기본적인 세계상에 근거해 있는데, 저는 근대의 이성의 발전이라는 게 한 편으로는 공포로부터 사람이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아마 충분히 벗어난 것 같지 않고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서로 잘 모른다는 무지에서 공포가 오니까요. 저 사람이 어떻게 할지 모른다 라는 그런 공포의 적대가 발생하는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연대의 패러다임은 그 공포를 넘어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고 저 사람은 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 하여튼 저는 근대인을 지배하는 사유의 근저에 공포감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신영복 : 사회적 공포는 인간관계가 파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질서가 바로 사회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이 인간관계 자체가 없다는 것,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삶의 구조인 도시는 사실 인간관계의 황무지입니다. 공간공동체, 마을이 갖고 있는 공간공동체는 완벽하게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바로 이웃에 있는, 같은 공간 내에 있는 이웃끼리도 관계가 없습니다. 낯선 사람을 경계심을 가지고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열악하고 조악한 근대의 모습을 우리는 매일 직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명인 : 적대성과 공포를 재생산하는 구조.


신영복 :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도 공포의 생산이지요. 소위 상품으로서의 과학은 상품사회 고유의 자본축적과정을 충실히 따릅니다. 인간의 복지를 만들어내기 보다 공포를 양산하는 구조로 발전하는 것이지요.


김명인 : 그런데 이제 이를테면 막시즘을 보면, 막시즘도 최종단계에서의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선의, 이해, 관계, 이런 것들이 살아있는 사회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에서는 적대성에 기대고 있거든요. 그게 근대적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하신 관계의 패러다임, 이것은 현존하는 유토피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대 속에 모든 게 다 파동치고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어떤 과정이나 프로세스는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프로세스 속에서 그런 관계론적 패러다임 자체가 어떤 식의 동력을 가지고 적대성이라든가 단자화 된 근대적 사유라든지 근대적인 존재론을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인지.


신영복 : 그래서 제가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에 있는 몬드라곤이라고 하는 소위 생산자협동조합(Workkers Cooperation)을 방문을 했었어요. 사실 가서 보고는 상당히 실망했지만, 또 몬드라곤이 직면했던 여러 가지의 난관을 이해할 수도 있었어요. 자본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바다 속에 고립된 협동체, 아주 작은 조각배와도 같은 그런 협동체가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방금 얘기했던 근대성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맞물려 있는 문제이지요.


김명인 : ‘오래 된 미래’라 불렸던 라다크도 지금 그렇지요?


신영복 : 네 그렇습니다. 라다크도 그렇습니다. 라다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그것의 소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일국 사회주의의 문제와도 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귀농, 생태마을, 유기농 등 여러형태의 대안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것이 던지는 선언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삶의 구조를 드러내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근대성을 성찰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실천적 과제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회의 실천적 전형을 담아내기에는 보편성이 미흡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중성과 보편성은 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상주의적 목표로부터 우리의 관점을 현실의 구체적 실천과정으로 끌어 내리게 하는 것이지요. 선구자적 결단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들이 현실적으로 몸담고 있는 구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 - 예를 들면 기업이든 또는 학교든 - 에서부터 시작해야된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적 구조를 청산한다는 것은 결국 크게 두 가지라고 봐요. 하나는 결정권입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몇 시간 노동으로 생산할 것이냐에 관한 결정권을 누가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사회구조가 달라진다고 봐요. 그 다음에 그렇게 생산된 물건을 상품 형식으로 할 거냐 말 거냐, 이 두 가지거든요. 이것만 바뀌면 저는 사회가 바뀐다고 봐요. 물론 이해관계가 적대적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식 속에 들어와 있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변혁운동에 흔히 ‘혁명’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교묘한 정치적 조어(造語)라고 보지요. 물론 프랑스 혁명과 같이 기요틴이라는 공포의 역사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을 현재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분명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고 해야 합니다. 혁명은 굉장히 위험한 것, 무자비한 파괴와 살육을 동반하는 거대한 무질서라는 이미지를 이 조어는 담고 있는 것이지요. 통일이라는 단어에 담아 놓은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은 굉장한 위험과 부담이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어의 목적은 그 자체를 터부시하고 접근자체를 아예 차단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포위 속에 우리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실천적 지반이 그만큼 열악하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서부터 문제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문제이기 때문에 몬드라곤이나 라다크의 경우와 같은 수세국면의 장기적 고립상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곳곳에 진지(陣地)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진지는 헤게머니를 장악할 수 없는 수세국면에서는 역량을 지키는 보루(堡壘)가 되고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을 때는 공격 거점(據點)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경우든 생활상의 민주주의를 충실히 견지하여야 함은 물론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재론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만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치목적의 공유'입니다. 민주주의를 절차와 형식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만 이것은 민주주의가 우민화(愚民化)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진지와 생활상의 민주주의를 토대로 해서 주체적 역량을 키워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역량이 바축되어 있을 때 객관적 조건을 주동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근대를 넘어서는 노력이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현실적으로 몸담고 있는 구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을 실천의 장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근의 몇가지 상황만 하더라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기회를 잃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自立)과 정치적 주체(主體) 그리고 정신적 자존(自尊)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곤이지지(困而知之)해야 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구조를 보정(補整)하는 일에 급급하였습니다.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도 그렇고 IMF사태 때도 그랬습니다. 결국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를 허약하게 한 것이지요. 길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기어를 오프(off)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갔어야 했지요. 결과적으로 외국자본이 우리나라의 중요한 경제부문을 장악하게 방조한 셈이지요. 세계화의 충실한 시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많은 활동가들이 힘들다는 하소연을 해요.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우리 때보다는 어렵지 않다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사회의 역량이란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역량으로 나누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만 객관적 조건은 많이 언급한 것으로 하구요. 주체적 역량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주체적인 역량을 보는 관점은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이 있어요. 대체로 역량을 양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잘못된 사고입니다. 1987년의 상황을 기억하고 그리워해요. 그러나 주체적 역량이란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기억에 연연하면 안됩니다. 문제는 질적인 것이거든요. 역량의 질적 측면은 첫째로 각 부문의 역량들이 조직적 형태를 띠고 있는가 비조직적인 우연적 형태로 있는가가 중요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의 부문 역량들은 조직적 형태를 띠고 있어요. 노동, 농민, 교사, 환경, 빈민, 등 조직적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두 번 째는 각 부문운동 역량들의 관계형식입니다. 부문 운동역량이 느슨한 연합형식으로 관계하는가, 아니면 조금 발전된 연맹인가, 더 나아가서 전선(前線)인가, 파티(party)로서의 중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조직 수준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매우 낮은 단계에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각 운동부문들이 아까 얘기한 그런 존재론적인 의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확실한 중앙의 구심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하방연대에 의해서 존재론적인 집단이기주의를 탈피하고, 부문 역량들을 조금 더 높은 형태로 조직화 해낸다면, 앞에 말했던 역사적인 계기를 창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 역량이 생긴다고 보고 있죠. 물론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러시아나 중국의 경험에서도 그러한 분립(分立)과 정파중심의 시기가 상당 기간 지속하였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반드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긴 호흡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전민항쟁 형식의 실천모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바로 그 점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목표의 달성보다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걸로 만들어내야 돼요. 목표달성이라는 효율성에 의해서 평가하려는 ‘도로’의 속성보다는,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자체가 의미 있어야 한다는 ‘길’의 문화나 정서를 운동가들이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는 한 소위 불가역적(不可逆的)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제도가 함께 가는 구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구조자체가 다시는 뒤집어지지 않는 불가역적 구조로 굳혀나가는 실천방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생활의 운동화보다는 운동의 생활화를 주문해야 되지요. 긴 호흡을 가져야 되지요. 우리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여러 가지 오류라와 타성들을 반성하는 게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


김명인 : 1960년대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보면 대중적 기반이 없는 지나치게 빠르게 구심화, 전위화가 돼 가지고 첨예하게 기존 지배권력하고 충돌하는 방식의 운동방식이었다면, 지금 90년대 이후에는 원심화 경향이 굉장히 강한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 이론과 연결돼 가지고 분산․원심 상태가 가장 좋은 상태처럼 돼 있는데요.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원심성과 구심성이 적절하게 연결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령화되고 교조화된, 어떤 목적 아래 빠른 시간 내에 조직돼서 결론을 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고 장구한 시간을 갖되, 원심성을 충분히 확보하면서 동시에 원심성이 개별 분산성으로 흩어지지 않고 다시 구심화되는 수렴구조가 이루어지는 불가학적인 어떤 형태의 운동조직이랄까요. 특정한 정치노선이 아니라 어떤 넓은 의미의 큰 틀에서의 네트워크랄까요.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신영복 : 그렇습니다. 사회를 바꾸어내는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게 필요하죠. 우리의 삶이 바로 네트워크지요. 그런 점에서 네트워크의 과제는 삶 그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김명인 : 그와 관련해서 해야될 이야기들이 참 많고, 또 선생님께 가르침 받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를 기대해야겠습니다. 오늘 말씀만으로도 너무 배운 게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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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세상 최고의 고수가 되는 법

"손자병법"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여유.
- 그에게는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무게가 있다. 아직 덜 익고 서투른 사람은 어수선하고 바쁘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이든 완전히 이해하고 장악한 사람은 그 경륜과 기술만큼이나 무게와 힘이 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신중함으로 대안을 찾아내고 위기를 겪어 낸다.

2. 무게.
- 그는 자신의 칼날을 함부로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강태공은 “남과 다툴 때 번쩍거리는 칼을 쓴다면 훌륭한 장군은 아니다”라고 했다. 진정한 최고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뽐내지 않는다.

3. 겸손.
- 그는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갈 길은 자신이 직접 선택하는 소신과 자신감이 있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한다면 최고 중의 최고는 아니다’라고 손자는 말한다.
자신이 정한 원칙과 소신은 타인의 칭찬이나 환호,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길을 걸을 줄 알아야 한다.

4. 비범.
- 손자는 진정 고수의 병법에는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예측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안목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가 실제로는 매우 담백하고 소박한 곳에 있는 것처럼 고수가 되는 길도 역시 그러하다.

중국의 지식체계 혹은 사상을 살피다보면 몇 가지 상념들이 떠오른다. 하나는 실용주의, 중국의 지식인은 전통적으로 지식 그 자체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을 뿐더러 , 직접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지식의 경우 중국철학자들은 역시 그것을 행하여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우리는 종종 동양의 철학을 공자왈 맹자왈하는 공리공론이나 일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동양의 철학에서의 핵심은 시작도, 그 완성도 "실천"에 있다.
 
그러니 고수가 되는 길의 핵심도 결국엔 실천에 있겠지...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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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자기 완결형 구조의 글....

자기 완결형 구조를 갖춘 글을 읽노라면....

자기완결형 구조의 글이란 자기 혼자 말하고, 자기 혼자 의문을 제기하고, 자기 혼자 답하고 노는 일종의 넋두리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쓰는 일기란 형식의 글이 이런 류의 글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 읽어주면 좋지만 구태여 누군가에게 보여줄 필요 없고,
꼭 누군가의 댓글, 반응을 요하지 않는 혼자놀기의 진수....
혼자 두는 바둑, 혼자 치는 고스톱일지도...

저는 중1때부터 일기를 썼어요.
혹시라도 그나마 그것이 머리 쓰는 운동이 될까 싶어서인지 ... 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더한 현실적인 동인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 일기를 잘 쓴 학생에게도 상을 주더군요. 저는 일기를 쓰지 않아서 그 상을 못 받앗지 뭡니까....
그런 경험이 있은 뒤부터 중1때부터 고3때까지는 꼬박꼬박 일기를 쓴 편입니다.
학생이란 건 매일매일이 특별한 이벤트여서 그런지 아니면 다람쥐처럼
쳇바퀴 돌리듯 글 쓰는 일이라 그런지 일기를 쓰면서 내내 내 주변의 일상이란 것이
이토록 지루할 수 있을까.

어째서 일기란 건 이렇게 지루하게 쓸 수밖에 없는 걸까 싶더군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일기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나도 모르게 거울처럼 자신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체험하지 못했던 탓이죠.

그러던 어느날 벼락맞듯 주변의 소리들이 들려오던 날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영화식으로 표현하자면 늘 sound off 상태로 있던 주인공에게
어느날 갑자기 모든 음향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거죠.
그러고 보니 세상엔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더군요.

그럼에도 저는 늘 독백을 늘어놓고 있더군요.
참 많이 외롭더라구요.
아, 이렇게 많은 이야기, 많은 영혼들 속에 있는데....
나는 부유하는 유령처럼 둥둥 떠 있다고 해야 할까요.
밤늦게 심야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무수한 사연들처럼 들으면 듣는 족족 모두
곧장 휘발해버릴 사연인 거죠.
나의 이야기도, 타인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자기완결형 구조를 갖춘 글에는...

참, 결론없이 꾸리꾸리한 글이죠? 흐흐.
그냥 누군가의 대책없는(그래서 자기완결형 구조의 글쓰기는 다른 말로 넋두리라고 하지요. 참 예쁜 말이지 않습니까? 넋두리라니...)글을 읽노라니 심야의 어둔 방 구석에서 FM라디오를 배경음악 삼아 일기를 쓰던 밤들이 떠올라서요. 검은 비닐로 포장된 제 일기장엔 그 무더운 여름날 밤 무어라 적었을까. 

한 여름밤의 꿈...
혹은 지치고 나른한 일상...
어느날 밤의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는 듣기에 참 꾸리꾸리하지요.
심란한 밤이었겠구나, 하는 이심전심의 마음이 들어서 괜스리 이런 글 한 번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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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타인에게 말 거는 서너가지 기술

타인에게 말 거는 서너가지 기술
 
가끔 누군가와 이야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야단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다른 구체적인 누구보다도 제가 더 언어에 대하여 혹은 사물, 사람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대상을 발견할 때
저는 저도 모르게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령, 일전에 자기완결형 글쓰기 구조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는데, 구태여 타인의 대꾸를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그런 식의 글쓰기에는 본의아니게 참여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는 데 반해서(그 이유는 거기에 이미 어느 정도 밝혀두고는 있지만 - 좀더 설명을 하자면, 그건 저역시 그런 류의 글이 가지고 있는 자체의 무게에 해당하는 대꾸를 하면 되니까 라고 해야 할 겁니다.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대로 본인이 스스로 결론을 짓고, 매듭을 쥐었다 풀었다 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건, 어찌되었든 그 나름대로는 성숙한 인격의 글쓰기일 테니까, 댓글을 달 때 혹여나 하는 의심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롭거든요.) 저는 타인에게 말을 걸 때...

말을 거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서로에게 필요한 예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1.  말 들어줄 사람을 제대로 골라라!
-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은 들으마 마나한 상대에게 말을 걸어선 적절한 대응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존중할 수 없는 상대에게 일부러 속내를 드러낼 필요도 없으며, 들어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의껏 대응해줄리 없지요.

2.  말을 꺼냈으면 최대한 정직하라!
- 일단 말을 꺼냈으면,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거죠. 에둘러서 괜히 이것저것으로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포장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즉, 내가 존중할 수 있는 상대라면 그가 보이는 반응은 중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3.  상대의 반응이 무엇이든 소중히 여기라!
- 그렇게 나를 드러냈으면 상대의 반응이 어떤 것이든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정직하게 드러냈는데 상대방이 보이는 반응이 설령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반응이라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끔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아니라고 해서 매도해버리거나 덮어버리려고 하는 이들을 보는데, 그건 상대가 당신의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액면 그대로 전달 못하는 당신 자신의 문제이거나 상대의 반응을 떠보려는 혹은 아이처럼 인정받고 싶어하는 내가 어린 탓이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타인에게 말 거는 기술에 대한 "일반론"입니다.
물론, 이와 반대로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기술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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