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혼자 대학로를 찾았다. 극단 골목길의 <백무동에서> 마지막 공연을 보았다. 골목길의 작품을 볼때마다 우울함과 씁쓸함을 동반한 뭔가가 무거운 돌덩이마냥 가슴 한 구석을 무겁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극장을 찾는 것을 보면 마약같은 그 무엇이 있다.
박근형의 전작들을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대여섯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광기스러웠고 괴기스러웠다. 남녀노소 누구든 임신을 하고 하루만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상한 마을에는 불법 낙태 시술로 돈을 버는 무면허 산부인과가 있고, 하루만에 태어난 아이들이 마을 뒷산에 버려지는데 그곳에서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20대의 젊은이들의 입은 욕으로 도배를 하고, 마약을 하고, 사람 한 명쯤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는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뭐 이딴 연극이 있나. 풍자 치고는 너무 과장되지 않았나. 마음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상한 건 계속 보면 볼수록 그 이상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깜박 속을 뻔 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들 한 명 한 명은 나일수도 내 주변의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섬뜩함을 느꼈다. 20대들이 내뱉는 거침없는 욕들이 조금 과장되긴 했어도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기에 그들을 그저 또라이로 한심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무면허 간호사가 낙태 시술을 하고, 환자의 죽음 앞에서 수술 기구를 이용해 오징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워먹는 간호사의 모습에서 공포영화에서의 잔혹함보다 몇 배의 잔혹함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 연극에서 정상인은 병원에 새로 들어온 무면허 보조 간호사 뿐이다. 하지만 겁을 잔뜩 먹고 환자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도 곧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함만이 남았다. 이 연극이 주는 가장 큰 공포는 바로 일상에서 오는 잔혹감이 아닐까.
좋아하는 배우 엄효섭씨는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볼때마다 더 물이 오르는 김영필씨와 언제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고수희씨, 귀여운 소녀에서 진정한 싸가지로 변신한 주인영씨를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PS. 연극을 보고 오는 길에 이음아트에 들렀다. 전부터 사고 싶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편혜영의 <사육장쪽으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연극과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연극과 책의 인연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