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친구놈들의 문자를 처절하게 씹기 시작하더니 어제 하루동안 나에게 온 모든 문자를 씹어버리는 성과를 이뤄낸 엘쥐텔레콤 전용 실버폰 PS3000. 구입한지 어언 2년여를 훌쩍 넘은데다 보이는 것처럼 전혀 소중하게 쓴 물건이 아닌지라 이제는 망가질 때쯤 되지 않았나 싶어서 큰맘 먹고 보상기변을 해볼려고 곽, 설명서, 충전기를 들고 대리점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할인은 10만원까지 가능합니다.'

음. 그렇다. 나는 소위 말하는 우수고객. 통신업계의 후발주자이자 낮은 단가로 버텨온 엘쥐텔레콤이 이영애와 박신양을 동원하는 대국민 뻥지랄까지 벌여야 했던 엘지카드 꼴이 나지 않게 만든 일등공신 중 하나인 것이다.

'카메라, 화음 어쩌고는 다 필요 없으니까 문자하고 통화만 되는 걸로 가장 싼 모델로 보여줘요.'

12만원.

'엥? 뭐라구요? 깎아서 12만원? 더 싼 건 없어요?'

...하자 내가 2년 전에도 봤던, 액정과 숫자판이 민짜로 드러난 모델을 보여주는데.... 내가 쓰는 모델은 단종됐는데도 꿋꿋이 살아있다는 이 물건은 단가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난 과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다른 대리점으로 갔다.

18만원.

어째 여기는 값이 더 비싸냐. 모델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해서 이번엔 아주 모델들을 쌓아놓은 데로 가봤다.

7만 6천원.

음. 여긴 좀 얘기가 통할 것 같군. 하지만 일찌기 2년 전에 저 찬란한 은빛 영감탱이를 7만원에 주고 구입한 나로선 그 가격에다 6천원이 더 붙은 가격은 웬지 수긍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 모델도 2년 전에 봤던 모델이란 말이다.

하여, 테크노마트를 가게 되었다. 전자대륙 테크노마트. 그러나 전자대륙의 아케이드센터에 철권5가 없다는 아이러니를 다른 곳에서도 증명해보이려는 듯, 오히려 더 비싸게 받아먹고 있었다. 분명히 같은 모델인데 말이지.... 그러다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거리를 고독하게 걷다보면 신규 6만 7만 하는 유혹적인 포스터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이지, 가변은 뭘 쳐먹길래 이리도 한결같이 비싼 거야?

'그건 말이죠, 아무래도 통신사 입장에선 신규고객을 확보해야 하니까요. 신규회원쪽에 더 메리트를 두는 거죠. 그리고 번호에 관한 건데, 한 번 잡은 번호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을테니까요.'

'번호는 니미.... 통신사 자유이동 시대에 기존고객을 우대해줘야지 염병할, 뜯어먹을 수 있는 한 뜯어먹을려고 환장을 했네. 차라리 지금 거 해지하고 새로 가입을 하는 편이 싸겠구만. 그럼 신규로 가장 싼 건 얼마짜리가 있어요?'

'음.... 6만원짜립니다.'

'뭔데요? 모델을 보여주실래요?'

매장직원이 보여준 모델은 처음에 갔던 매장에서 12만원을 불렀던 그 모델이었다....

 

결국 짜증나서 신규든 가변이든 핸드폰 바꾸는 일은 포기. 그냥 망가질 때까지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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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onin 2005-03-1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생긴 거 답지 않게 의외로 내구성도 탁월하죠. 싸면서도 제 역할은 다하니까, 그때문에 일부러 단종시킨 게 아닌가.... 라고 생각.
 

오래 전에 아는 이에게 빌려줬던 이 책을 어제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한 병 분량의 참이슬과 오뎅탕 만 이천 오백원이 소요된, 확실하게 손해본 건이었다-_-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요시나가 후미도 이제 다 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시니컬하고 쿨하며 동시에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려깊음을 가진 인물들이 나와서 특유의 포커페이스와 삐죽 튀어나온 입을 하고 인생에 대한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 모든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요시나가 후미의 스타일이란 것이 확고하게 정립이 됐다는 것을 보여준 동시에 매너리즘의 독소마저 내비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이 작가가 가진 인생관이 가진 이해와 관용, 생활사적 성찰의 폭넓음은 그녀가 주력으로 뛰던 야오이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몇 편의 비야오이물 단편집이나 모음집을 통해 증명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사랑해야 하는 딸들]은 너무 밋밋한 것이 아닌가, 혹은 자신의 세계에 아주 안주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그녀의 단편집중 최고로 치고 싶은 아이의 체온.

그런데 오늘, 전철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다가 문득, 그녀가 지금까지 남성들의 세계에만 천착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야오이가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서조차도 그녀의 작품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녀 특유의 남성 캐릭터들의 군집이었다. 그러니까 여자인 이 작가는 동성애와 탐미적 취향, 예절과 격식과 성욕이 들끓는 남자들의 세계를 거쳐서 [사랑해야 하는 딸들]에 와서야 비로소 여성들의 세계, 자신과 생물학적으로 가장 밀접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사랑해야 하는 딸들]은 그 제목에서처럼 세상의 여성들에 대한 찬가다. 피학 경향이 있는 여자, 각자 컴플렉스를 가진 어머니와 딸, 너무도 스무스하게 부숴져버린 꿈을 안고 가게된 여자들과 사랑을 알기 때문에 사랑을 못하게 된 여자. 작가가 그 모든 여자들, 불완전한 존재로 설정된 그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의 전작들처럼 이해와 용서의 전례지만 그 속에는 남성들의 세계를 바라보던 것과는 다른 진지함이 배어있다. 전작들에 등장하던 이들이 보여주던 동성간의 끈적한 시선이 배제된 모녀, 혹은 우정의 관계로만 설명이 가능한 이야기들은 그녀의 전작들이 보여주던 은근한 음탕함이 사라져버린 세계인 동시에 그런 의미에서 보다 자유롭게 애정과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적극적으로 환기시킨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화두는 단순하게 남녀든 동성이든 간의 에로스적 애정의 연장이 아니라 여자들에 의해 부드럽게 전복되고 확대되는 아이콘이 된다. 물론 그녀의 작품군이 대개는 애정을 빙자한 인생찬가, 혹은 삶에의 이해에 얽혀있는 이야기였지만 [사랑해야 하는 딸들]에서 그 모든 체념과 회한, 자기만족과 깨달음들은 유난히 담담하면서도 살갑게 다가온다. 사랑은 차별적 개념이 되어 한 여자로 하여금 사랑을 포기한 사랑을 가지게 만들고 모녀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 설득의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지만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 보여주는 성과는 생각보다 훨씬 넓게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가 가진 세계를 확장시켰다.

이젠 그녀의 백합물을 기대해도 좋은 것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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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죽음을 다룬 수많은 형이상학적 문제제기들과 대답들과는 완전히 반대지점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살이 썩고 뼈가 부서지는 죽음, 오로지 현상적 측면에서의 죽음에 대한 해부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작가는 인류가 땅위를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있었을 죽음에 대한 두리뭉실한 의견개진과는 애초부터 담을 쌓고 죽음이 일으키는 온갖가지 다양한 양상들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소설의 중심을 잡고 있는 노부부 생물학자의 죽음이 세계와 동화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운 광경들로 드러난다. 그들이 부서지는 그 모든 광경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 죽음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처럼 냄새나고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경이-삶과 죽음이 일치하는 접점을 드러내는 흥미롭고 놀라운 풍경이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딸은 썩어문드러진 자신의 부모를 직시하면서 최초로 경이감과 존경심을 느끼게 되며 슬픔과 공포가 아닌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소설에서 죽음만큼이나 비중있게 다뤄지는 것은 두 노부부, 특히 아내인 샐리스의 사고의 영역이다. 거의 대부분의 서술에서 화자가 되어 살아있을 때, 그녀의 의식의 흐름과 성격과 그로 인한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는 샐리스는 단 한 번의 열정으로 결혼을 해버린 주인공 부부의 삶의 지리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생물학적인 열정(물론 직업적인 의미가 아니다)이 사라져버린 노년의 부부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일상의 지리함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둘은 너무 닮았기에 처음부터 서로에게 맞지 않는 커플이었고 그것은 결혼 후에도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삐걱거리는 성격상, 스타일 상의 차이로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처음 섹스를 했을 때의 기억을 재생하려다 난데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삶-죽음의 라인이 얼마나 밀접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은유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축제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다. 이 소설의 원제가 [Being Dead]라는 것을 기억하자.

기실, 이 소설은 한방에 달려간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며 끝까지 이끌어가는 두 노부부의 죽음과 그에 얽힌 관계, 인물들의 사고의 흐름과 과거의 이야기들은 수십년을 넘나드는 시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전혀 부담이 안될 정도로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솜씨가 발휘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두 영역이 떨어진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하게 붙은, 그러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자각하게 해주는 현상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지는 죽음은 삶과 이어지는 일상의 한부분이라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꿰매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삶의 대척점이자 언제나 함께 존재하는 죽음은 일상이 가진 지리함의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손에 의해서 묘사되는 죽음이 보여주는 그 많은 다채로운 변화와 삶에의 보완수단으로서의 기능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의미를 잃고 살아왔던 두 부부가 삶의 이유를 되살리기 위해 벌인 이벤트 와중에,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절정에 머물 시점에 그와 같은 무게로 찾아온 죽음을 맞이한 후 남게된 두 시체가 일궈내는 그 다양한 경이들이 그토록 풍요로운 필치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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