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은 일종의 신화이자 의무에 가까웠던 영화였다. 타르코프스키와 그의 영화들에 대한 수많은 전설들은 문화불모지인 한국에서 계속 퇴적되어 종내 이 영화에게 거의 통과의례와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그의 절절한 에세이들, 그의 심오한 의도, 그의 기구한 운명. 그리고 그 담론들이 이뤄졌던 EBS 시네마천국, 시네마떼끄들, 수많은 말과 소문들. 아직 신화적 기운이 가시지 않은 때에 [희생]은 영화의 이해 수준에 대한 척도이자 강박과도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연 안개가 걷히고 극장개봉이란 형태로 이 영화가 지상에 강림하였을 때 우리나라 관객들은 10만명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관객수로 화답했다.
그러나 난 잤다. 아주 푸욱.
이후 다른 세대의 시네필들, 보다 확장된 정보 네트워크에서의 논의들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덧씌워진 신화적 외피들은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오래 전 시절에 금지된 영화를 본다는 건 일종의 특권이었던 때가 있었고(김종학PD가 비디오 복제대마왕이라는 별명을 당당히 잡지에 드러낼 정도였던 시절) 그와 관련하여 논의 또한 특정된 소수-동시에 커뮤니티의 여론주도자들인 이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영화를 (나처럼) 자면서 봤다는 사람, 수면제 대용으로 최고라는 사람, 이 영화의 가치가 개인적으론 [우뢰매]와 별 다를 것도 없다고 적극적으로 밝히는 사람들(이런 감상에 대해선 취향의 상대성이 가지는 절대적 관용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리라)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은 특정적인 심미안이 가졌던 권력의 분산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거니와 그에 동조하는 의견들이 너무도 쏟아져 나온 탓에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풍경을 졸지 않고 볼 수 있는 이들은 다른 의미에서 예전과 같은 소수의 위치를 점하게 됐다. 어떻게보면 필터링이 된 것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은 나의 얘기다. 시간이 흘러서 20대 중반. 이제 후반으로 넘어갈 즈음, [희생]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다시 보게된 [희생]은 무엇 하나 말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감동적이라는 수사만으로, 그리고 그와 연결되는 모든 찬탄으로만 가능한 영화였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내 눈, 그리고 눈물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