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 일반판 (2disc) - 일반 킵케이스
제임스 맥티그 감독, 나탈리 포트만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먼저 분명히 밝히자면, <브이 포 벤데타>는 뻔한 영화다. 실로 관객의 예상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전개와 결말. 그런데다 거의 직설법에 가까운 화법은 이 영화가 <매트릭스> 같은 수수께끼 놀음-사실 텍스트로서의 철학자들, 사회학자들의 쓸만한 몇몇 논의들을 제외하고 <매트릭스>가 퍼즐식 철학 놀음으로 비춰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소모적인 철학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매트릭스>의 배경에 깔린 매니악한 자양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처음 접한 이들이 저지른 대표적인 실수다-이 아니라 던지면 터져버리는 그 자체인 다이너마이트란 걸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브이 포 벤데타>는 그 외피의 확고한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 익숙한 요소들에 대한 미묘하고 섬세한 조율과 재해석을 통해 흔한 히어로물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교조적이지 않다. 영화의 메시지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이 영화를 선동용 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브이는 단순히 절대악과 싸우는 히어로가 아니라 원죄를 가진 하나의 흐름이자 운동movement 그 자체로 보여진다. 가이 폭스 가면으로 그런 자신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브이는 대중을 일으켜서 앞으로 돌진하여 걸리적거리는 것은 거침없이 박살내버리는 마초적-선동적 먼치킨 액션 히어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다시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영화 속에서 브이의 손에 죽어나가는 경찰들은 과연 무슨 죄가 있어서 죽는 걸까. 브이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연쇄살인, 폭력과 막판의 군중들의 무혈 행진의 대비를 눈여겨보라. 브이가 지하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동안 똑같은 브이가 된 군중은 아무 폭력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을 일종의 씻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브이는 지하로 내려가서 자신을 만든 악마들과 자폭을 행함으로서 과거시대와의 완전한 단절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저 <양들의 침묵>에서도 지적됐던 바, 빛으로 채워진 지상세계를 지탱해주는 것은 지하의 악마라는 진리가 여기서 하나의 페이소스로 작용한다.

 

영화의 절제된 키를 맡고 있는 또 하나의 축은 영화 속 상황을 바라보는 일종의 거울 밖 화자인 이비 해먼드의 역할이다. 그녀의 눈높이는 관객의 눈높이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와 관련된 논의들에서 이비의 감금고문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고난을 겪어낸 이비는 물로서 일종의 세례-깨달을 얻어내는데 이것은 불에서 태어났던 브이와 명백하게 대비되는 씬이다. 아울러 이비에 대한 고문은 브이로 하여금 심각한 정체성 고민-자신의 탄생과 파시즘으로 가득한 사회의 유사성에 대해서-을 겪게 만든다. 그래서 후에 브이가 죽을 때 자긴 틀렸고 이비가 옳았노라며 말하는 것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씬이라고도 할 수 있다(그러나 이 부분 역시 이비의 감금고문 시퀀스만큼이나 논자들에게 천대받은 씬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치광이 같은 브이의 행동을 낯설어하고, 그에게 교화되긴 하지만 그의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 '괴물' 브이의 아름답고도 처절한 로맨스를 매혹적으로 보여줄 정도로 이 영화는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 되려 <십이야>와 <멕베스>를 읊고 줄리 런던을 듣는 브이의 낭만주의적 태도들과는 정반대로 영화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제임스 멕티그의 숫기 없는 건조한 연출과 시나리오의 냉정한 톤 유지가 맞물린 무척이나 담담하고 자비심 없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그가 개인사적으로 행복할 겨를을 주지 않는 전개는 브이가 가진 고전적 딜레마, 분노와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가차 없는 판단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브이를 연기하고 있는 휴고 위빙의 연기는 정말 탁월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가면에 가리워진 인간의 정서를 억양과 몸짓을 통해 구현해내는 그의 능력은 한 인간인 동시에 하나의 준동이었던, 그래서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브이와 군중 속의 개인이자 교화-교감의 대상으로서의 이비 사이에 벌어지는 얕은 로맨스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줄 정도다(덧붙이자면 브이라는 낭만주의적 캐릭터의 메타희곡적 특성을 구축해내는 데엔 그의 끝내주게 중후한 영국식 영어 발음 또한 한몫한다). 그에 반해 신인 감독 제임스 멕티그의 단조로운 연출은 워낙 많은 대사량이나 설명해야 할 내용들이 두시간 남짓한 상영시간 안에 들어가 있는지라 각본을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달리 말하자면 욕심을 내지 않은 것이지만 그 여유의 부족은 몇몇 씬에선 비주얼적 빈한함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고 <매트릭스>의 자장은 워낙 컸던 것이라, 개봉 당시에 무리라는 게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와 연계되는 홍보전략을 구사해야했던 홍보팀의 고초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홍보로 인해 잃은 것도 많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정치액션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 <브이 포 벤데타>는 이 시대에 이르러선 남용될대로 남용된 불릿타임에 절어버린 관객의 시각을 만족시킬 법한 액션은 딱 한 번밖에 안 나온다. 막판에 펼쳐지는 브이의 칼부림씬이 바로 그것인데, 내내 틀어막혀있던 긴장감을 한 번에 풀어주는 씬이기에 이미지적 임팩트는 상당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인 감독 제임스 멕티그의 빈약한 연출력으로 구축된 영화의 답답함을 날려버리는 꼭지점 역할을 해주고 있다.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브이 포 벤데타>가 보여주는 소재와 주제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치적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현학적 구원을 바란다면 132분을 엉뚱한 곳에 바치느니 차라리 역사 이래로 수만종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세상을 하나도 바꾸지 못한 정치학서적들이 깔린 서점에 가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극단적인 안티 히어로물이자 <몽테크리스토백작>을 변주하는 복수극으로서 <브이 포 벤데타>는 내밀하고 미묘한 감정의 꿈틀거림과 복수극이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재미, 그리고 인간이 가진 순수한 영역의 열정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의미의 재발견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유치하다고만 몰아버릴 수는 없는 복잡미묘함을 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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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6-30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그토록 보고싶었지만 이젠 집에서 봐야하다뉘
그나마 홈시어터 없었으면 비디오방 갈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