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 본능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것중 하나가 바로 인간 자신에 대한 흥미다. 물론 그것은 사자가 탐슨가젤을 노릴 때의 흥미라고도 볼 수 있겠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고파 하는 측면에서의 흥미라고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의 정보집약체로서 연구할 가치가 있으며 얘기할 가치가 있고 또 굳이 그런 가치들을 분석적으로 따지기도 전에 우리는 매일마다 나가는 일터에서 누구랑 누구가 어젯밤 사무실에 남아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하루의 즐거운 이벤트로서 자연스럽게 탐구하고 또 추적하기 마련이다. 패리스 힐튼의 너절한 일거수일투족이 '팔리는' 이유는 별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 본능 어딘가를 은근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자는 탐슨가젤을 잡아먹기 전에 그 가련한 생물의 감정과 생리상태, 사상과 철학등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사자는 그 탐스러운 동물을 먹어치우기에 용이한 정보만을 선별하여 습득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언어라는 도구를 빌어 타자, 혹은 타생물체에 대한 담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물론 그것이 우리모두가 저녁밥상에 올려질 등심살의 주인이 자신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에 대해서 신경 쓸 정도로 정보로 인해 인류가 섬세해졌다는 걸 뜻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들의 사정을 듣고서 적극적인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있으니 완전히 소용이 없는 경우라곤 말할 수 없는 터일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보다 효과적으로 똘스또이를 씹어먹으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들춰보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여기 이 국적상 오스트리아인이자 저명한 보헤미안이었던 우울증환자가 쓴 글을 보라. 그가 글쓰기의 세 대가들을 논하는 것을 보라. 인물을 향한 저열해질 수도 있는 말장난의 함정을 피해 담화에 예술의 왕관을 씌울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츠바이크가 이뤄냈다는 데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그 가련한 대상들을 핥고 빨아들여서는 입 안에서 굴리다가 결국 잘근잘근 씹어먹는다. 그는 사냥꾼이다. 우울했지만 더없이 당당했던 텍스트의 사냥꾼이었던 그는 온갖 정보들-재료들의 상찬으로 만들어진 두터운 글판 위에서 너무도 유혹적이고도 현란한 춤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판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리고 같이 춰보자고 부추긴다. 그 거침없는 태도로 인해 카사노바와 스탕달, 똘스또이는 가차없이 재단되고 속절없이 제 몸뚱이를 드러내보인다. 츠바이크는 그들의 육체와 의식을 아우른다. 그는 그 인물들의 저열함과 위대함, 고상함과 천박함을 마음껏 드러내보임으로써 그들을 위한 커다란 웅덩이를 만든다. 장대한 글쓰기의 여정에서 하나의 세계, 더 나아가 모든 이의 세계로 공유될 방대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은 츠바이크가 만들어낸 웅덩이 속에서의 벌거벗은 농탕질로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 츠바이크는 여기서 글 속에 숨겨진 사람을 끌어낸다. 그렇다고 글이 의미가 없어지느냐,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글을 통해서 사람을 보고 사람을 통해서 다시 글을 보게 된다. 츠바이크는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있게 그 두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가교를 마련해보인다. 그것은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작가가 만들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황홀경이자 작품과 작가가 분리되야 한다는, 이제는 고전적인 문구가 된 법도를 무시하는 독자 입장에서의 은밀한 소원성취의 순간이다. 츠바이크의 혀와 손가락을 찬양할지어다. 그는 남의 이야기로 자신의 영역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 공간의 매혹적인 손길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달콤하니, 설혹 만에 하나 진실에서 벗어난 울림이라 하더라도 츠바이크는 온전히 압도적인 사기극을 마련한 것이리라. 그는 독자로 하여금 카사노바에게 질투하고 스탕달에게 위안을 받으며 똘스또이에게 경이를 느끼게 만들었으니 그 또한 그들의 전설을 마련하고 다시금 확정시킨 것이며 그것을 가능케 한 츠바이크 자신의 힘을 영원히 기록되게 만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