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 - 200ml
보령메디앙스
평점 :
단종


땡땡땡, 하고 쳐놓고도 도대체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변명을 위해 말하건데 나로선 최초로 해야하는 화장품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 부단한 고심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둬야겠다. 따라서 내가 이 물건을 받은 이후 이토록 오랜 시간이 다음에야 리뷰를 작성하는 것은 순전히 그 지난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했음이란 것을 이 글을 읽는 이에게 이해시키고 싶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곤란한 것이다. 해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일에 낯설고 어색해하며 그에 따르는 심적 부담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선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저 제목, 하얀 추억이라니!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난 [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을 쓰면서 이렇다 할 신비하거나 음란한 추억 같은 건 전혀 가져보질 못했다. 이것을 나쁜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그것은 순전히 제품의 기능성과는 완전히 무관한 영역의 얘기니까. 시장 골목에서 산 싸구려 녹색 스킨로션을 가지고도 사람에 따라선 얼마든지 추억이 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부작용으로 인한 여드름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다음 번 로션 이벤트에서 한 번 더 당첨되길 바라는 선량하고도 소소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라 싼값에 모르모트가 되어 기꺼이 구할 수 있었다는 것도 그랬거니와 실제로도 유난히 엉망인 피부에 비추어 고마운 성능을 보여줬던 이 제품에 대해서 별 다른 해로운 감정이 없다.

자, 글을 쓰기 위해서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옛 선현의 작법을 베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가.

'15자의 글자를 발음하면서 나는 내 혀끝이 몇 번이나 입천정에 닿거나 이빨끝을 쳐대는지 세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혼미한 행위의 과정 속에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너, 안타까운 이름이여. 세-바-메-드-모-이-스-춰-라-이-징-바-디-로-션....'

아무리 생각해도 업적으로나 취향적으로나 존경받을 만한 이 양반의 글은 이 제품의 너무 긴 명칭과 독일어적 단단함에 맞부딪쳐서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현자의 목소리를 빌려봐야 할 필요가 있다.

'5월 22일 수요일 오후 3시 45분 23초가 되었을 때, 마룻바닥에 누워 편안히 자고 있는 내 머리 속으로 곰사나이가 정중하게 노크를 한 다음 들어왔다. 나는 그를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는 서커스단에서 속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새로이 창간되는 제주도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낼 SF소설을 3일에 한 번 정도의 주기로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이보게 친구. 오랜만이라고 말하진 않겠네만 자네가 오랜만이라고 좀 해주면 안되겠나.> 나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게 오랜만이라고 말해줬다. 그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폈기 때문에 그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새로 만든 듯 깨끗하게 제도된 아이보리색 명함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이름은 [세바메드 모이스쿼라이징 바디로션]이었다....'

역시 무리다. 그런데다 이렇게 쓰면 90년대 초반에 많이들 그랬던 것처럼 분명 표절논란에 휩싸일 것이었다. 이미 한 문단을 뻔뻔스럽게 만들어버린 나로선 그 일본작가께서 관심을 가졌던 수많은 현대의 공산품들 목록에 세바메드 시리즈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자자, 이제 글이 벌써 몇문단을 채워놓고 있다. 그리고 자, 도 두 번씩이나 썼다.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나는 이 제품의 리뷰를 대체 어떻게 써야 될 것인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 해답을 다오 미네르바여, 아니 1981년생 아드리아나 리마여.

<[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은 언뜻 점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촉감을 주지만, 그건 착각이다. 단 몇 초 사이로 피부 속으로 흡수되는 놀라울 정도의 흡수력은 로션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으로 약하면서도 부담없는, 그래서 흡수 이후엔 거의 남지 않는 향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이 제품이 베이비로션에 가까운 저자극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흰색으로, 썩 특징이 없이 만들어진 제품 디자인도 그렇거니와 그에 호응하는 간단하면서도 깔끔한 캡의 여닫음 장치가 더해져 [세바메드 모이스춰라이징 바디로션]은 튀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온순함, 그러면서도 제 역할은 충실하게 다 해내는 잘 만들어진 현대 화장품 화학의 즐거운 수확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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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5-05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미있는 리뷰에요.
롤리타를 발음해보는 험버트 험버트? 두 번째의 현자는 하루키인건가요? (좀 자신 없어요.)

hallonin 2006-05-0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어렵지도 않았던 터라, 바로 맞춰버리셨군요.... 나름대론 광고효과를 노렸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