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시작은 지적재산권 수업에서 시작됐다. 이미 내가 저지르고 있는 범죄들과 저지를 범죄들, 그리고 겪게될지도 모를 범죄들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예방교양수업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학점이 잘 나오지 않을까 하는 환상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별 생각 없었다는 뜻이다.
첫수업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출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금 앉은 자리를 붙박이로 하겠다는 전 아이비엠 복무 경험자인 교수의 말씀이 있었다. 난 어느 상황에 처하나 그 상황이 크게 리스크가 되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그저그런 정신세계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스무스하게 납득해버렸다.
그러고 수업이 시작됐는데 역시나 별로 재미는 없었다. 나는 으례 그렇듯 가방 속에 박혀있는 뿌쉬낀의 소설집은 내버려두고선 본능처럼 뭐 재밌는 게 없나 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만, 그 안에서 사진뭉텅이를 꺼내보이는 것이었다. 대강 봐도 두께가 한 12센티미터는 되어보이는 장대한 굵기였다. 순간적으로 흥미가 생긴 나는 고개를 15도 가량 기울여 사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 사진들이, 모조리 코스프레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오직 [테니스의 왕자].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나는 그여자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동인계에 몸을 투신한 아낙은 처음 학교에 몸을 담았던 99년에도 한 명 사귀고 있었다. 제 1회 코믹월드 가서는 부스에서도 만날 수 있었지 아마-_-
암튼 그녀는 사진에 더해 그 음지의 소설들, 창작 야오이 소설도 당당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 앉은 여인과 함께. 그 옆에 앉은 여인은 또 어떻던가. 수업시간 내내 연습장에 그려진 콘티를 수정하고 끊임없이 다른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이쪽 또한 뻔한 세계였다.
어찌되었든, 이젠 그쪽 세계의 소설에 관심이 생긴 나는 그녀가 읽던 소설 중 하나를 보여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녀는 수업시간에 교수 앞 5미터 거리에서 야오이소설을 읽겠다는 뻔뻔스러운 나를 보곤 놀라서는 되물었다.
...혹시 동인남이세요?
나중에 알고보니 소설 보던 양반은 그쪽 세계에 깊숙하게 침잠하여, 희귀본이라면 상당한 웃돈까지 주고서 사는(그쪽 세계의 인기 희귀본이란 게 있다는 것도 신선하게 확인하게 됐다) 어지간한 공수 시뮬레이션 매니아였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태행 만화에 펜터치 어시로까지 일했던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이태행은 현재 [프론트미션]의 만화판을 그리고 있는 중인데, 그 작업중에 스크린톤과 펜터치를 맡았었다고. 음....
코스프레도 하느냐고 물어왔던 것이.... 나름대론 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