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수]를 봤습니다. 근래 들어 참 보기 드물게 엉성하더군요. 특히나 도입부에서 보여주는 충격적인 카체이스씬은 영화에 대한 긴장감을 완벽하게 풀어놓는데 환상적인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뭐 여기저기 문제가 많은 영화입니다만,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조영철이가 여러가지로 시끄러울 여지가 있다는 걸 알게되자 유강진이는 조영철을 납치해다가는 거의 죽이기 직전의 상황을 만들어놓고는, 결국 죽이지 않고 어딘가로 숨겨놓습니다. 그걸 본 주현태는 왜 죽이지 않느냐고, 언젠가는 문제가 될 거라고 항변하죠. 그때 유강진은 그윽하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는 안 죽인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주현태, 불만 많은 표정 짓죠.
그러던 주현태, 나중에 가면 지가 유강진의 뒤통수를 칩니다. 결국 유강진 앞에 끌려온 주현태는 술 한잔 마시면서 자신의 주장을 읊습니다. '니 옆엔 죽은 사람과 앞으로 죽을 사람밖에 없다. 난 니 못 믿것다. 이제는 싫슴다 회장님.' 여기서 모순인 것은 회장님의 그 살벌한 정신세계를 유지하도록 복돋아줬던 주현태가 저런 소릴 지껄이면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한다는 점에서죠. 그의 캐릭터는 유강진의 불알친구로서 친구조차도 떠나는, 그리고 친구조차도 제 손으로 죽이는 비정한 야수로서의 유강진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 갭은 참 어설프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야수]의 컨셉은 훌륭했습니다. 결국 세상과의 충돌에 이성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분노로 인해 파멸해가는 인물들이란 큰 그림은 매력적이죠. 이것은 인터뷰에서 기존 느와르의 정형성을 깼다고 생각한다는 유지태의 말에서도 느껴지는 의도이기도 하고, 몇몇 지지자들이 이 영화의 허무하고도 급박한 결말부를 무정부주의적 세계관과 연계한 미학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바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지지가 권상우와 유지태가 만들어내는 버디극, 혹은 느와르 장르의 파멸적 소성에 대한 단순한 코어적 지지에 의한 결과가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너무도 엉성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