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중학생 때 다녔던 학원에서 국어강사였던 양반이 기억이 난다. 정확한 포지션은 알 수 없었지만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은유적으로 장치되었던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설을 열렬하게 했던 것으로 보아 아직 그 시절의 그런 낭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양반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어느 날 한가하게 둘이서 시간을 보낼 때가 되어서, 그에게 장정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사람요, 이것저것 너무 많이 하지 않아요? 시인, 평론가, 소설가...."

라는 대사는 물론 언짢아하는 표정과 함께 나왔던 것이다. 그 뒤에 문단에선 장정일을 별로 작가로 쳐주지도 않는다는 대사도 있었던가 하는 것은 내 상상인 건지 실제로 그런 말이 있었던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암튼 그 소리 들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아, 진짜 울나라 글바닥에 있는 양반들 존나게 딱딱한 건 알아줘야 해 썅.'

뭐 나로서도 장정일은 심심찮게 오버액션하는 평론이나 되다말다 하는 것 같은 소설보다는 시가 훨씬 좋지만 어찌되었든 그런 거와는 상관 없이 그 견고한 무의식적 태도가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정말 잘난 인간은 대개 멀티플레이어였다.

암튼 그러니까 내가 메가패스CF에 나오는 낸시랭을 보면서 씁쓸해하는 것은 그녀가 계약금 2억에 연봉 8000을 받는 팝아트계의 스타이자 이슈메이커이고 윤은혜가방까지 만져주는 멀티플레이어라서 그런 것은 아닌 거다. 일부 사람들이 낸시랭 그게 조또 예술이야? 라고 짜증을 내면서 반문하는 것도 그리 생각해 볼 일은 아니다. 낸시랭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미학원론의 근본적인 난제를 또 던져야 하고 또 싸워야 하고 또 반복해야 하고... 암튼 시간낭비다. '그냥 지좆대로 예술이면 예술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라는 속 편한 기준을 갖고 있는 나로선 별 의미가 없는 문제다.

내가 그녀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녀가 보여주는 결과물들이란 것이 일종의 재탕을 삼탕한 지루한 것들이란 것은 그렇다치고.... 그녀가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는 '돈도 벌고 예술도 한' 달리나 워홀은 당대의 편견과 관념들을 박살내면서 튀어나온 이들이라는 점에 반해 그녀는 태도의 측면에 있어서 완전히 정반대의 포지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니까 나올 게 거의 다 튀어나온 이 21세기는 그녀가 뭔 짓을 벌이든 사람들은 '아, 그거 예술인 거 같네. 예술 맞네.' 이렇게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녀는 저항이 아니라 적극적인 투항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재미가 없는 거다. 저항하지 않는 예술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재미인가. 그녀에 대한 반감들 중 하나엔 그것도 예술이야? 이건 뻔한 반감이랄 수 있지만 그래, 그거 예술인 거 같어. 그런데 어쩌라고? 가 정당하게 작용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예술이 가진 매춘부적 속성을 극단으로 끌고 간 양상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육체적 스펙-괜찮은 외모와 몸매로 인한 아우라-이 바탕이 된 전략적 결과물로서의 그녀의 '예술'이 만들어내는 아우라는 페티시적이고 공허하게 자극적이다.

전문적 직업인으로서의 창녀는 존경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가진 직업과 일상적 작업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다. 따라서 거기에 위엄과 품위가 더해지기 위해선-이건 절대 고루한 측면에서의 의미가 아니다-카드결제기록지에 붙여지는 숫자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숫자엔 감탄할 수가 있지만 그녀의 작업엔 전혀 감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불감증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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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1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Fox in the snow 2006-04-1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까진 모르겠으나 홈쇼핑 게스트로 나오는 하재봉보면 반사적으로 쟤, 뭐야~하는 절 발견하게 됩니다. 저역시 예술에 대한 엄숙주의가 은연중에 있는가 봐요. 근데 희안하게도 낸시 랭에게는 관대합니다. 볼때마다 감탄해요. 노골적으로 매력을 과시하는게 귀엽기도 하고.텅~비어보이는데 약삭빠른 비지니스 감각이 있는것도 신기하고. 이미지는 있으나 메시지는 없다는것도 신선해요. 머..예술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면 낸시랭이 싫어할 지도 모르겠네요. "난 그런거 잘 몰라요. 저항이라고요?" 이런사람이 한명 있어줘서 재밌어요. 가십거리도 되고.^^ 무엇보다 이쁘잖아요.

hallonin 2006-04-1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낸시랭의 화법이라는 거, 마땅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만-_- 제가 말하는 저항이란 것은 정신이라든지 의식이라든지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예술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생명력에 관한 것입니다. 낸시랭은 그게 싹 말라붙어있다는 점에서 흡사 어설프게 만들어진 섹스마네킹을 보는 기분밖에 안 들더군요. 아무도 안 올 것 같은 천호동 구석에 박힌 짝집이라도 짝집인 이상 장사는 됩니다. 그런 점에서 낸시랭이 벌어들이는 돈과 이슈도 저에겐 수량적인 면외의 스펙터클외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가본드 2006-04-1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둔한 저로서는 같이 cf에 나오는 클레지콰이가 좋기때문에
용서가 된다는... ㅡㅡㅋ

hallonin 2006-04-13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클래지콰이는 좋았다가 싫었다가 참 미묘한 느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