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분명히 밝히자면, [브이 포 벤데타]는 뻔한 영화입니다. 실로 관객의 예상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전개와 결말. 그런데다 거의 직설법에 가까운 화법은 이 영화가 [매트릭스] 같은 수수께끼 놀음-사실 [매트릭스]가 수수께끼 놀음으로 비춰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소모적인 철학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매트릭스]의 배경에 깔린 매니악한 자양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처음 접한 이들이 저지른 대표적인 실수라고 생각합니다만-이 아니라 던지면 터져버리는 그 자체인 다이너마이트란 걸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썩 교조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화 속 상황을 바라보는 일종의 거울밖 화자인 이비 해먼드의 역할인데, 그녀의 눈높이는 관객의 눈높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미치광이 같은 브이의 행동을 낯설어하고 그에게 교화되긴 하지만 그의 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괴물' 브이의 아름답고도 처절한 로맨스를 매혹적으로 보여줄 정도로 영화가 정신이 나가진 않았다는 뜻이죠. 되려 [십이야]와 [멕베스]를 읊고 줄리 런던을 듣는 브이의 낭만주의적 태도들과는 정반대로 영화가 바라보는 시선은 제임스 멕티그의 숫기 없는 건조한 연출과 브이라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나리오의 냉정한 시선이 맞물린 무척 담담하고 자비심 없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가 개인사적으로 행복할 겨를을 주지 않는 시나리오는 브이가 가진 고전적 딜레마, 분노와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가차없는 판단을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이를 연기하고 있는 휴고 위빙의 연기는 정말 탁월하다고 칭찬할 수 있는데, 가면에 가리워진 인간의 정서를 억양과 몸짓을 통해 구현해내는 그의 능력은 이비와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브이 사이에 벌어지는 로맨스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줄 정도입니다.

 

지금 텔레비전이나 찌라시들에서 퍼뜨리고 있는 [매트릭스]의 이미지적 적자라는 홍보문구들은 조금이라도 이 영화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헛소리란 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액션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 [브이 포 벤데타]는 그나마도 관객의 시각을 만족시킬 법한 액션은 딱 한 번밖에 안 나옵니다. 막판에 펼쳐지는 브이의 칼부림씬이 바로 그것인데, 이미지적 임팩트는 상당하더군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씬이 신인감독 제임스 멕티그의 빈약한 연출력으로 구축된 영화의 답답함을 날려버리는 꼭지점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브이 포 벤데타]가 보여주는 소재와 주제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치적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정치적 구원을 바란다면 132분을 엉뚱한 곳에 바치느니 차라리 역사 이래로 수만종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세상을 하나도 바꾸지 못한 정치학서적들이 깔린 서점에 가보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극단적인 안티 히어로물이자 [몽테크리스토백작]을 그대로 잇는 복수극으로서 [브이 포 벤데타]는 내밀하게 미묘한 감정의 꿈틀거림과 복수극이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재미, 그리고 인간이 가진 순수한 영역의 열정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유치하다고만 몰아버릴 수는 없는 복잡미묘함을 담보합니다. 지금 뉴스그룹에서 나오는 얘기들로 봐선 개인적으로 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 소위 먹물들에 의해 가장 오해될 영화의 전당에 [뮌헨]에 이어 [브이 포 벤데타]를 올려놔도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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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3-18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물이라..아직 미천한 저도 그곳에 포함될지는 봐야알겠네유 ㅋ

hallonin 2006-03-1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물이라 함은 뭐 몇몇 비평가들이 너무 뻔한 부분에서 비판을 가하는 게 한심해서 그리 불러봤습니다. 영화 자체에 평점을 매기자면 B~B+정도?

배가본드 2006-04-22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결국에 이거 못봤3 ㅠㅠ
DVD 기다리는중.. 기대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