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키노의 특징들 중 하나를 들어보자면, 특유의 장광설과 화려한 수사로 말미암아,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그 영화를 보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재주였습니다(정성일 스타일의 적절하고도 과장적인 느낌표 삽입 등등). 더군다나 90년대는 검열의 괴이한 기준이 80년대 초기 비디오 시장 때보다도 엄격하게 적용되던 때여서(피비 케이츠의 [파라다이스] 비디오는 1984년 버전과 1991년 버전 중 91년 버전이 더 잘리고 칠해지고 편집되어 있었습니다.) 문화적-경제적 여력이 자리잡힘에 따라 새로운 것, 더 나은 것, 신비로운 것, 화끈쿨한 것을 원하게 되는 소비자들의 앞서가는 기호와 VHS의 광범위한 대중화가 시장의 편협함과 맞물려 충돌을 일으키던 시기였죠. 그 결과 복제비디오를 중심으로 한 지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이 폭주에 가깝게 발전하고 있었고 '다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영화제에 대한 갈망이 피어나고 있었으며,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의 흥행 성공이 있었습니다. 키노의 매니악함과 그 안에서 소개되는 영화들은 이러한 지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죠. 결국 상당 부분 거품이긴 했지만요.

그 월간 키노 안에서 유독 인상적인 영화 소개들 중 하나가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였습니다. 어둠침침한 숲 속에 두건을 쓴 이들이 서있는 스틸컷 한 장으로 소개되었던 그 영화는 아직 우리나라가 영화적으로 불모지였던 시절에 영화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나 문제가 많았던 로만 폴란스키의 전설을 극대화시키는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수원이었습니다. 키노의 설명에 따르면 로만 폴란스키가 만들어낸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잔혹한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피와 섹스로 점철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당대에 NC-17 등급을 받아서 제대로 공개되지 못했을 뿐더러 제작에는 플레이보이사가 참여했다는 소문 때문에 로만 폴란스키의 개인사적인 비극들과 결부되어 우리나라에선 이 영화를 접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이들에게(월간 키노 기자 포함) 다양한 상상을 불러 일으킨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떠돌던 얘기 중엔 이제는 그 신용도를 확연하게 낮춰야 마땅한 타란티노의 선택(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양반의 초이스에 안 들어가는 영화를 찾는 게 더 빠를 듯 합니다)에 이 영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과연 플레이보이사의 제작참여는 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소문이라고 할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아예 처음에 크레딧이 나올 때 기획에 휴 헤프너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으니.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71년의 검열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플레이보이사의 제작 참여가 영화의 수위에 영향을 준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소문만큼 쎈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두시간이 넘어가는 런닝타임 중에 휴 헤프너의 정력적인 취향과 로만 폴란스키의 잔혹미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나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둘의 이름과 아우라가 만들어내는 기대감을 그리 충족시키지 못하는 수준에서의 원작이 필요로 하는 정도의 피와 누드들을 보여줄 뿐이더군요. 그나마 (상대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하는 장면이라면, 15세 관람가인 [반지의 제왕]에서도 뎅강 잘려나간 사람목이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이 시대에 비추어 무척이나 소박하게 보이는, 맥베스의 효수장면 정도라고나 할까요.

오히려 신선했던 것은 소문만으로 접한 덕에 영화가 원작에 대한 과격한 재해석일 것이라 지레 짐작했었지만 정작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가진 희곡성에 충실하게 연출되었으며 대사까지 그대로 가져온다는 점이었습니다. 장식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 건조하고 탈색된 이야기는 내내 회색빛으로 가득 채워진 영상과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제한된 음악의 운용으로 인해 가장 스펙타클한 순간조차도 소극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처연한 느낌이랄까요. 일종의 영화적 압박이었던 오슨 웰즈의 [멕베스]와는 달리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이미 부서져있는 무언가가 더 처절하게 부서져가는 그런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뭐, 몰랐던 시절의 순진했던 망상이라고나 할까요. 월간 키노의 무지막지했던 로만 폴란스키 [맥베스] 소개에 의한 제 상상의 나래는 이렇게 끝을 맞이했습니다. 나름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군요. 이제 [거미의 성]까지 보게 된다면 [맥베스]의 성공적인 영화적 버전들은 다 보는 셈이 될 것 같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udan 2006-02-2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배우 혹시 쥬드 로? 제작년도를 봐서는 절대 아닌데.

hallonin 2006-02-2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핀치입니다. 주드 로는 저 영화 만들어졌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