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찍고서, 내가 컷 사인을 내자, 한 팔레스타인 연기자가 들고 있던 소총을 던져버리고 바닥에 누워 있는 이스라엘 연기자에게 달려가 그의 팔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스라엘과 아랍 연기자 모두는 서로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솔직히 고백하자. 피가 피를 부르는 이 끝없는 복수의 순환에 대한 해답, 소위 옳은 정치적 선택이란 도대체 어떤 방법을 택하고 결론을 내려야 마땅한 것인지. 과연 이것이다, 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을 것인가. 수천년에 걸쳐 쌓아올려진 그들의 문제는 지엽적이고, 단순하며 이성이 아닌 감정 차원의 문제다.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은 함무라비 법전 시대의 율법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모양새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 고도로 복잡한 정치적 수학공식은 필요하지가 않다. 죽이면, 죽인다의 무한반복. 어느 쪽이든 자신들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옳다고 주장할 건덕지는 널려있다. 하지만 그 모든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남는 건 피와 살점들뿐이다. 이건 분명히 뭔가 잘못된 현실이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둔 픽션이란 것을 염두에 두자. 그것은 이 폭력적인 이야기가 스필버그가 가진 비극에 대한 비전을 보여줄 작정을 하고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된다. 영토에 대한 지리적 차원의 문제가 인간의 목숨과 복수의 끊임없는 반작용으로 옮겨가 구렁텅이가 되버린 현실처럼, [뮌헨]은 복수의 정치학에서 시작하여 그 안에서 부서져가는 인간 아브너의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야누스 카민스키가 빚어낸 완벽에 가까운 영상은 황폐해져가는 아브너의 내면처럼 70년대풍 스릴러로 시작한 영화를 점점 기계적이고 무감각한 체험의 영역으로 만들어놓는다. 최대한 자제된 채 사용되는 존 윌리암스가 만들어낸 레퀘엠을 연상케 만드는 스코어는 가히 최고다. 그러나 이 거장들이 만든 정교한 세공품의 미적인 면을 탐하는 동안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스필버그의 '태도'다.


스필버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주제들은 이미 그의 이전 영화들에서도 익숙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를 이상적 보수주의자의 최전선에 서게 만든 가족 이데올로기와 평화에 대한 보편적 호소와 같은 요소들은 이 영화에서도 빠지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영화들에서보다 극대화된다. 그게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감독은 그러나 최선의 선택으로 그 선택지들을 집어넣는다. 마치 마지막씬에서 아브너가 제안하는 '가족적' 저녁식사처럼.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한 게 아니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고, 과정이 도착했을 뿐이다. 이런 결론에 대해 스필버그에게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중동문제에 대해서 손을 놓고 있지 않은가? 가장 처음에 했던 질문처럼, 우리는 도대체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뮌헨]은 거친 문제제기이자 우리의 무력함을 역으로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 때문에, 모든 것이 정론으로 선택될 수 있는 현실 때문에, 그 모든 정치적 무력감 때문에 [뮌헨]은 역설적으로 스필버그가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그 짙은 이상적 이데올로기가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선명하고도 적절하게 빛나 보일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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