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피터 잭슨이 우리나라에 소개됐을 때, 그에 대한 인상은 '괴물'이었다. <고무인간의 최후>로 데뷔해서 <데드 얼라이브>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그는 타칭 하드고어 장르의 신성이었으며 피범벅과 좀비에 미쳐있는 괴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감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전작들이 하나도 정식수입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헐리웃에 가 찍은 <프라이트너>가 개봉되었을 때, 그의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서 일종의 각오를 느껴야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프라이트너>가 보여주는 영화세계는 분명 호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간 그에 대해서 들어왔던 무시무시한 소문과는 완전 딴판으로 너무나도 유쾌하고 즐거운 소란이 가미된, 무척이나 즐거운 영화였던 것이다. 물론 호러영화를 만들었다는 인증이라도 하듯 중간중간 사람을 번쩍거리며 놀래키게 하는 솜씨 또한 날카로웠지만 영화는 유머와 센티멘탈한 드라마를 동시에 함유하는 멋지게 뽑혀나온 헐리웃산 걸작이었다. 물론 비판들이 없지 않았고 그 비판은 대부분 <데드 얼라이브>에 열광하던 이들에게서부터 나왔다. 뉴질랜드산 도살용 칼이 헐리웃에 가서 과일 깎는 칼로 변했다고 이죽거리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그 놀라운 감각은, 도저히 이 사람이 예전에 도살용 칼이었으리라곤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매끈했다.

한마디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고어영화 장르 팬층의 전통적으로 높은 장르에 대한 충성도를 생각해 볼 때, 그들은 <데드 얼라이브>에서 넘쳐나던 유머를 애써 외면했거나 <천국의 피조물들>을 안 본 것일지도 모른다. 뒤에 가서야 보게 된 <데드 얼라이브>는 한마디로 코미디영화였고 <천국의 피조물들>은 레즈비언이라는 성적소수자에 대한 세심한 시선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프라이트너>가 보여줬던 감각은 타락의 상징이 아니라 피터 잭슨이란 감독이 가진 재능의 일부가 드러난 결과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 억지로 보라고 권해주던 나 같은 사람의 열성적인 개별 홍보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프라이트너>는 일방적으로 B급 호러물로 홍보가 되었으며 영화의 멋진 짜임새와 호평들에도 불구하고 말그대로 묻혀졌다. 그러나 <프라이트너>때 기반을 만들어놓은 피터 잭슨과 웨타프러덕션은 이후 모두들 알다시피, <반지의 제왕>으로 헐리웃의 정점에 서게 된다. 그리고 <킹콩>까지. 피터 잭슨은 자신의 매니악한 취향을 대중의 호흡과 일치시키는 작업을 누릴 수 있는 소수의 감독들 중 한 명이 됐다.

지난 12월 초에 나온 <프라이트너SE>는 총 3장의 디스크로 되어 있다. 감독판으로 재편집된 영화 본편은 20여분이 더 붙어서 두시간을 넘기는 길이가 됐고 LD의 황혼기 시절의 레어아이템이었던 4시간에 달하는 메이킹 다큐멘터리가 들어갔다. 그외에 감독의 음성해설과 스토리보드, 예고편 등이 수록.

그리고 어쩌면, <킹콩> 이후 피터 잭슨의 차기작은 이 <프라이트너>의 속편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rblue 2006-01-02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네요. 프라이트너, 비디오로 봤지만, 엄청 유쾌한 영화였는데.

blowup 2006-01-02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프라이트너> 보고 싶었는데... 게다가 피터 잭슨의 메이킹은 너무 재밌더라구요. 밉지 않은 쇼맨십 다분.

hallonin 2006-01-02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저는 디비디플레이어부터 장만을 해야....-_- 그리고 피터 잭슨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던 양반이라. 훼이크 다큐멘터리 <잊혀진 은>도 그렇고, 이번에 킹콩 메이킹도 무지 뭇기더군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