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돌아왔다. 커뮤니케이션 북스에서 나왔던 만화들 중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엘프를 사냥하는 색휘덜], 한국어판 [엘프사냥꾼]이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출간했던 14권 이후, 15권부터가 삼양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다. 정가도 신선한 가격 3000원. 아마도 삼양에선 미디어웍스 소속의 야가미 유 만화에 대한 국내판권을 거의 다 확보한 듯, 그의 다른 작품들이 나온 곳도 모두 삼양출판사.... 주로 미디어웍스 계열의 만화들에 손을 많이 뻗고 있는 이 회사의 모회사가 뭐하는 회산지 가끔씩 궁금해진단 말이지-_-

일본 만화 역사에 독보적인 업적으로 버티고 있으며 아마 아직도 연재중일 것인 [파타리로]는 당시 횡행하던 순정만화들의 도식화된 구조에서 삐져 나오는 뻔한 이미지, 뻔한 이야기라는 독을 작품의 자양분으로 삼고 나타난 작품이었다. 그래서 [파타리로]는 기본적으로 패러디를 바탕에 두고 당대의 소녀만화들에 대한 적극적인 이죽거림을 동반하는 지극히 장르해체적인 작품이었다. 이렇게 [파타리로]의 경우에서 보듯, 어떤 장르라는 것이 고착화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부터 장르의 해체가 이뤄지기 시작하는 것은 일종의 순리와도 같다. 그런 면에서 TRPG룰에서 파생된 먼치킨 환타지 문학의 도식화가 갈데까지 갔던 시기에 [엘프사냥꾼]이 나오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엘프사냥꾼]에서 [파타리로]에서 볼 수 있었던 능청맞은 개그와 조소를 발견하기란 힘들다. [엘프사냥꾼]은 그보단 훨씬 뻔뻔하다. 말만 환타지지 아주 노골적으로 적당하게 현실세계에 기댄 세계에 떨어진 세 주인공은 이종격투기광, 밀리터리광, 탁월한 연기력을 갖춘 히로인 전문의 여배우다. 이 구성원부터가 상당히 깨는 설정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환타지 소설에서 아예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차원이동형 먼치킨 환타지 소설에의 적극적 선례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아무튼 그들은 자꾸만 그들이 살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 왁자지껄한 활극을 보다보면 그들이 뭐하러 골때리는 현대 일본으로 돌아가려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아무튼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짓은 무어냐. 바로 엘프를 벗기는 거다. 이유인즉슨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주문조각들이란 것이 생성될 때의 실수로 전세계로 퍼져버려서, 그게 엘프들의 몸에 새겨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그 주문조각을 얻기 위해 가는 곳마다 엘프를 벗기고 다녀야 한다.... 우리는 지와 덕을 갖춘 조정자이자 수백 년을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들인 엘프들이 옷이 안 벗겨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봐야한다. 물론 이 만화의 주소비대상층을 고려하여 여기서 엘프는 죄다 여자들뿐이다.
여기서 확인 가능한 것은 야가미 유는 이러한 기존 질서를 조롱하는 유희들에도 불구하고 먼치킨 환타지 세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죽거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되려 환타지 세계의 개방성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물론 그 방법론은 충분히 먼치킨 환타지의 정서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고 적어도 그 틀 안에서 이 작가는 독자를 웃길 줄 안다. 기존의 시트콤의 법칙들을 빌어와서 만들어내는 즐거움. 웃기는 상황을 짜내는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야가미 유는 [엘프사냥꾼]에서 먼치킨 환타지 소설이 어째서 활자가 아니라 만화책 대본으로 쓰여야 하는지를 자신있게 증명해 보인다.

아치 타로우의 원작을 야가미 유의 감수성으로 풀어낸 [정들면 고향 코스모스장]도 마찬가지의 케이스다. 우주 경찰의 새 패트롤복 실험을 위해 지구로 온 우주 완구 회사의 세일즈맨 겸 테스터와 엉뚱하게 일에 휘말리게 되는 뭣 모르는 주인공, 그리고 그들 주위를 둘러싸게 되는 무늬만 악당인 다양한 캐릭터군이 다같이 코스모스장에서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소동들을 그린 이 작품 또한 재치있는 상황설정에 강한 야가미 유의 스타일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3권 분량의 단기연재였지만 1쿨 짜리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고 투니버스에서 방영도 했었다. 그러고보면 야가미 유의 만화는 연재와 동시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두 작품에 걸쳐 있는 셈인데([엘프사냥꾼] 또한 1쿨 짜리 애니로 제작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소속이 말그대로 미디어웍스사여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 웨스트]는 [정들면 고향 코스모스장]과 비슷한 시기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우리는 작가 특유의 웃기라고 작정하고 만든 상황설정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 웨스트]는 절반 이상의 실패, 혹은 작가 자신의 매너리즘에의 침식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찾아 무턱대고 서부시대의 황야로 나선 여주인공(일본인), 그리고 그녀 앞에 선 오빠라고 주장하는 아프로 파마의 폭탄광 흑인과 아빠라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총잡이 백인. 그리고 일직선으로밖에 갈 줄을 모르는 무식한데다 힘만 쎈 로데오용 말 한 마리. 이런 상황만 보면, 이 작품 또한 오지게 웃길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1권에서, 그런 설정 상의 재치있는 장치들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일단 저 자칭 오빠와 아빠가 등장하면 상대적으로 극이 유연해지고 웃기긴 웃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여기서 야가미 유가 묘사하는 서부라는 공간은 [엘프사냥꾼]의 주인공들이 떨어진 환타지 세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 공간에 떨어진 일본인 여자애가 약간 맛이 간 광폭한 말을 타고 다니는 여행기라고 하는 것은, 서부극이 아직 먼치킨 환타지 만큼의 법칙과 지위를 얻지 못한, 혹은 그 자리 자체에 어울리지 못한, 혹은 그런 먼치킨 웨스턴물의 풍류가 이미 지나버린 작금의 시대에서 개그극을 펼쳐보인다는 것이 어떠한 리스크를 가지는 일인지 확인시켜 준다. 주인공에게 있어 서부라는 공간은 [엘프사냥꾼]의 주인공들처럼 어딘가로 돌아갈 곳이 마련된 임시거처도 아니고 [정들면 고향 코스모스장]에서처럼 가족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공간도 아닌, 그저 어중간한 위치의 세계일 뿐이며 그런 공간에 선 주인공의 입장이 가질 어색함 또한 작품 내에서 독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다 서사 구조가 워낙 [엘프사냥꾼]을 생각나게 하는 통에 간간이 나오는 억지 감동적인 에피소드들 또한 썩 매력이 없게 다가온다. 굳이 리얼리즘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 또한 거슬리는 것은 이국인 주인공과 조연들 간의 의사소통이 전혀 문제 없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한마디 더하자면 웨스턴물의 팬들은 전통적으로 최소한의 고증이 바탕이 된 픽션을 좋아해왔다는 점이다. 여기가 [엘프사냥꾼]의 먼치킨적인 자유로 가득한 세계로 가꾸길 바랬다면, 작가는 좀 더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신중하게 고려해봐야 했다. 이것은 장르의 독에 대한 유희를 바탕으로 작품을 나놓던 야가미 유가 되려 자신의 작품이 뿜어내는 독을 맞이하게 된 결과와도 같다. 그래서 작중에서 '서부란 이런 거야!' 라고 특유의 휴머니즘삘 나는 목소리로 간간이 외치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 나이 먹어서는 슬쩍 어이없는 웃음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