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뢰진]이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코믹테크에서였을 것이다. 기자 특유의 자극적이고 호들갑스러운 문구들에 담겨서 소개된 [지뢰진]은 당연히 코믹테크를 돈주고 구입하는 매니아들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즈음에 이미 해적판이 한 7권 분량까지 나온 상태였고 뒤이어서 세주문화에서 정식으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지뢰진]은 다카하시 츠토무의 본격적인 만화경력의 첫시작이자 대표작이며 가장 많은 분량의 스토리를 진행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품 자체가 가진 퀄리티를 고려한다 치더라도 [지뢰진]이 과연 '신선한' 만화였을까? 아마 동의하긴 힘들 것이다. [지뢰진]은 정확하게 보자면 벤치마킹형 만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다카하시 츠토무 만화들의 일관된 성격이기도 하다. [지뢰진]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하리] 시리즈에서부터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로 이어지는 성질 더러운 형사의 폭력극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만화적으로 보다 극단화시킨 결과물이었다.
물론 표절, 표절 아님, 뭐 그런 걸 가리고픈 생각은 없다. 우선 다카하시 츠토무를 발탁한 애프터눈 편집장이 가진 안목의 탁월함을 칭찬해야겠지만 그 발로 그린 듯한 작화가 뒤로 가면서 눈부시게 발전해서 결국 자기 스타일을 확립시킨 것, 다카하시 츠토무가 보여주는 현실비판의식이나 그걸 개카리스마가 펄펄 넘쳐나는 이이다 쿄야로 완성시킨 것은 작가적인 탁월함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소재를 가져오는 건 좋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내느냐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다카하시 츠토무는 자신이 만든 [지뢰진]을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작가의 성향 중 중요한 축이 벤치마킹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만들어줬던 것은 작가의 후속작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벤치마킹을 하는 건 좋은데 그게 좀 어설픈 느낌이라는 점이었다. [철완소녀]는 선명한 주제의식에도 불그하고 [그들만의 리그] 삘에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딘지 엉성하게 느껴졌고... 그런데다 역사의식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다카하시 츠토무의 중요한 실수 중 하나로 기록될 문제의 그 대사는 여자들에게 '전쟁에 져서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제대로 생각을 해본다면 전쟁을 '일으켜서' 미안하다 고 해야 하지 않을려나? 이것은 남자들과의 경쟁적 입장에서 야구를 해야했던 소녀들의 대립각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남-녀, 이기다-지다 라는 대립각 구도에 익숙해진 작가의 굳은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일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카이 하이]는 주말 괴담극의 벤치마킹에 [지뢰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사회비판극의 요소를 넣었다. 물론 앞서 말했지만 단순히 소재를 빌어왔다고 그걸 비난하고픈 맘은 없다. 그런데 흡수한 소재들이 제대로 소화가 안되는 느낌이랄까? [지뢰진]은 절망 직전에 이른 피해자들, 가해자들의 넘치는 감수성과 대비되는 이이다 쿄야의 지독한 무감정 상태와 하드보일드함의 대비가 작품의 축을 이루면서 어찌되었든 간에 이야기를 꽤 단단하게 이끌고 간 편이었지만 [스카이 하이]에선 그런 축이 부재하는 것이 작품을 맥아리가 없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고 있다.

가장 최악은 [블루헤븐]이었다. [한니발]의 캐릭터들 벤치마킹에 별 하는 일이 없는 주연들. 어설프게 끼워 넣은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와 루즈한 전개 등등. [블루헤븐]은 작가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서 많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되려 3권 뒤에 짤막하게 실린 단편 [69]가 더 쓸만한 지경이었으니.

그나마 [얼라이브]는 그럭저럭 재밌게 봤긴 했다만, 역시나 뭔가 하나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어쩌면 [얼라이브] 정도까지 오면 거의 양산에 가까운 작가의 정력적인 출간량에 대한 아우라가 눈에 씌여서 그런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즉, 뻔한 느낌이었다. [얼라이브]는 SF 호러 장르에 바치는 오리지날리티가 느껴지는 작품이긴 했지만 그 전의 다카하시 츠토무 만화들이 보여줬던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인과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다소 부족한 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카이 하이]는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고 [얼라이브]도 영화화됐다. 그러나 그 모든 다매체 확장으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흥행결과는 제쳐두고) 내 보기에 다카하시 츠토무는 좀 방황했던 거 같다. [스카이 하이]는 카르마와 신장편으로 아예 재탕에 삼탕을 하고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제서야 자기 얘기를 쓰기 시작한 [폭음열도]는 비로소 제 길을 찾았단 느낌을 준다. 비록 전형적인 성장드라마의 양상을 띄고 있는데다 질리도록 많은 그렇고 그런 폭주족 만화들의 홍수를 겪어낸 다음 다시금 도착한 쌍팔년도 폭주족 만화다. 1980년이라는 시간, 비슷한 시기에 1980년대를 그린 작품들이 다수 나왔다는 점에서 복고회귀 트렌드라는 방향에서의 상업적 지향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긴 하지만. 그런데 [폭음열도]는 기존의 쇼바를 올리고 화양리를 달려다니는 폭주족물들이 청춘의 화려함이나 우스꽝스런 작태에 대한 사나이들 술자리식 농담과 같은 모양을 드러낸 데 반해서 기본적으론 쓴맛 나는 반성의 만화로 보인다. 수십 권의 만화를 출간한 다음에야 드디어 자기 얘기를 그리기 시작한 거라고 볼 수 있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그리고, [지뢰진]이 재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세 번씩이나 재발간되는 만화도 드물 것이다. 이것은 다카하시 츠토무가 새로운 [지뢰진]의 연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인해서 그에 대한 판권 확보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데, 새로 만들어질 [지뢰진]에선 이이다 쿄야는 등장하지 않고 새로운 캐릭터가 중심이 된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