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7.04 22:41


이런 영화에 대해서 무책임한 이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보고서 있는 그대로 느껴라, 이다. 글쎄, 적어도 이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심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올해로 28살이라는 감독은 이 작품에 자신의 십대 시절을 투영시켰으며 노스탤지어와 서브 컬쳐로 뒤섞인 정치적인 코드들을 이곳저곳에 배치함으로써 알지 못하면 거의 즐길 수 없게 만들어놓고 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그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할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인, 1988년에 대한 정보나 경험이 꽤나 빈곤한 상태라, 상당히 좌절스런 기분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아줬으면 좋겠다. 따라서 다음 이야기는 상당히 원론적일 모양새로 나올 것이다.

1988년의 미국은 보수주의자들의 시대이자, 그 틈이 드러내어진 시기였다. 이란-콘트라 사건은 1980년부터 시작된 레이건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진정한 악의 축이 어떤 나라인지를 만천하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정상적-도덕적-평화적이라고 불리는 키워드들에 가식적인 속임수라는 팻말을 달게 만들었으며 모든 분명한 것들은 그 지위를 의심 받게 만들어버렸다. 평온함 뒤에 숨은 불온함은 언제 그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게 되었고 무의식 적으로 불안이라는 유령이 사람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비록 이란-콘트라 사건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도덕적 패배감을 지워버리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소수들만의 근심이었던 에이즈가 숨겨왔던 그 두툼한 몸집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슬럼가에서는 크랙이 창궐하고 있었다. 전투로써의 랩이 일 년 전 퍼블릭 에너미에 의해 시도되었고 일 년 후엔 지상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지하의 악마와 손잡는 이야기인 [양들의 침묵]이 토마스 해리스에 의해 쓰여졌다. 신경증으로 경계가 불분명해진 몽롱한 세상에서 진보는 한참 우회하고 있었고 보수는 얻어맞고 구원 받으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영화는 도니 다코가 어느 길가에서 잠들어있다 깨어나는 걸로 시작된다.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관련된 약을 중독적으로 먹고 있으며 밤이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어디론가 나가버리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방으로 난데 없이 비행기 엔진이 떨어져 내려 집안을 부숴버린 밤, 꿈결처럼 바깥으로 나간 도니는 기괴한 토끼 가면을 쓴 프랭크(마땅하고 당연한데다 진부한 느낌까지 들지만 이 순간, 앨리스라고 외쳐도 좋다)에게서 종말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

이후 꿈과 일상의 경계는 없어진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프랭크는 도니에게 지시하고 그 지시에 따르는 도니의 행동은 일탈적이고 불온한 모양으로 드러나지만 그 결과는 안정된 일상의 어둠을 까발리는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사실을 모르는 타인들(그 상황이 전개된 모양에 대해서나 그 실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나)의 입장에선 공포와 불안의 현상이다.

공포.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 한 축은 바로 저 공포다. 짐 커닝햄(13일의 금요일 감독인 숀 커닝햄을 패러디)에 의해 이뤄지는 난데 없는 공포 극복 프로그램에 의하면 일탈은 공포에서 나온다. 삶에 대한 두려움, 자신감이 없는 것에서 나오는 두려움. 그는 비디오를 통해 무턱대고 밝고 즐겁게,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조차 모르는 미지의 존재인 자신을 무슨 수로 신용하라는 건지. 내내 웃으면서 밝고 건강한 빛의 세계만을 보여주는, 대개 별 효과를 올리지 못하는 정신 병자 치료 프로그램 같은 비디오나 만드는 그를 도니는 무의식적으로 증오한다. 그도 그럴 것은 그와 가장 대치된 지점에 서있는 것이 도니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프랭크는 미지의 존재이며 무의식의 공포를 상징한다. 도니는 두려워하면서도 프랭크-공포에게 자신을 맡긴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들려주는 종말에 대한 말을 신용함으로써 그는 덮어두고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파시즘적인 억지를 처음부터 거부하고 일상에 내재된 불안을 직시하게 된다.
도니의 불안은 '모른다'는 것이다. 과정은 물론 결과조차. 대체 종말 하루 전까지 할로윈 파티가 벌어지는 이 흔한 일상에서 종말은 어떤 형태로 드러난다는 말인지. 모든 키는 그에게 쥐어져있는 채로 모든 일이 벌어질 시간만을 기다리는 입장인 그는 답답하다. 하지만 그가 의지를 갖게되는 순간이 그 계시가 성취되는 순간이라는 건 아이러니이자 이야기의 완성이다. 그는 더이상 두려울 게 없어졌으니까. 불안해 할 필요도 없어졌으니까.

영화가 희대의 로맨스물로 탈바꿈하는 건 이 순간이다. 산재한 모든 사건들을 해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인 것이다. 영화 중간에서 사랑과 공포가 대척점에 놓인 걸로 표현된 것을 보고 도니는 반발한다. 삶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고. 말처럼 도니는 공포에 자신을 완전히 담금으로써 사랑을 얻게된다.(그 증거가 종말 하루 전, 그것도 할로윈 파티날 집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꽤 티나는 상징이었다) 그래서 도니 자신에게 있어 무의식적인 공포의 실질적 현상-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파괴로 드러나며 그런 현상을 거부하기 위해 그는 자신을 버리는 쪽을 택하게 된다. 영화 내에서 그는 과거-기억을 상징하는-를 바꿀려면 어떤 것하고 바꾸겠느냐는 질문에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정작 그렇게 되면 도니를 기억조차 못하게 되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평온하게 된다. 구원이라면 더럽게 씁쓸한 구원이지만 한편으론 절절한 러브 환타지라고 해도 들어맞을 수 있겠다. 다만 이 결과가 상징하는 바가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해라' 라는 보수 안착적 덮어버리기의 인상 또한 드는 것은 내 사소한 민감함 때문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무려 자신마저 내던지고 모든 것을 용서할 '사랑'이라는데 말이다.

할 말을 만들어내자면 끝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를 만들어낸 건 감독의 비범한 재능이다. [도니 다코]는 작품이 드러내는 모든 상황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과거의 멋진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모든 아이콘들이 집중된 인상을 보이며 온갖가지 서브 텍스트들을 양산할 수 있는 상호 소통하는 영화의 미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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