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브러더스사의 이사진이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이 어딘가 맛이 갔다는 걸 알아채는데 어째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워너브러더스는 아예 배트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거의 사운을 걸다시피 하면서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전권을 위임해서 만들어진 [배트맨]의 새로운 시리즈는 투자자들을 충분히 흡족하게 만들 정도의 내외적 성공을 거뒀다. [오션스] 시리즈를 우습게 만들 정도의 연기파 배우들의 대거 포진과 잘 나가는 각본가 데이빗 S. 고이어(그자신 개인적으로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블레이드3]의 감독이기도 하다)의 균형감 있는 시나리오(물론 닌자놀이가 보여주는 쌍팔년도풍 B급스러운 냄새를 지우긴 힘들었다), 그리고 [인썸니아]로 관록의 배우들을 다루는 일과 정극 스릴러의 양쪽에서 신뢰할만한 실력을 보였던 놀란의 연출은 두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을 밀도감이 넘치게 메우고 있다(영화가 시작한 이후 한시간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정신이 없을 정도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액션씬에서의 놀라울 정도의 산만함과 빈궁함이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그것도 클로즈업 상태에서 배트맨의 동선을 따라 휙휙 휘둘러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액션씬은 꽤 심각한 문제제기가 필요할 듯 싶다. 또한 그와 연계된 문제로 촬영을 장악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놀란은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블레이드 런너]를 추억하며 돈을 쏟아부은 세트와 미술은 의외로 제 위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정극 스릴러의 건조한 공간에 익숙했던 감독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리들리 스콧의 거대 서사물 2탄이라고 할 수 있는 [킹덤 오브 헤븐]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감독이 화면을 어떻게 장악하는지를 모범답안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중량감 떨어지는 올랜도 블룸과 뭐하러 나왔는지 궁금한 에바 그린의 두 축이 잠깐잠깐씩 화면에 틈입하는 살라딘역의 가산 마수드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는 이 영화는 되려 우리가 통속적으로 중심축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주변화시킴으로써 풍경에 대한 감독의 연출력을 반대급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게 전혀 의도된 바라고 보이진 않지만.... 영화 본편보다는 되려 역사공부 확인 차원에서 즐거웠던 영화. 하긴, 십자군 전쟁의 하이라이트라고 칭송되던 살라딘과 리처드의 싸움도 실제론 그리도 지지부진했었는데 어련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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