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포 선라이즈]에 대해서 간단하게 얘기해보자면 그 영화는 관계에 대한 일종의 환타지였다. 생판 모르는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서로의 기억과 경험을 더듬으면서 차이와 공감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단 하룻밤 동안, 해가 뜨기 전까지. 개인적으로 고백하건데 나는 이 낯선 이와의 관계에 관하여 긍정적인 일탈을 자극하는 영화가, 비록 영화 자체는 보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 보냈지만 그 컨셉만큼은 더없이 맘에 들었다.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했지만. 아무튼 낯선 이에 대한 두근거림과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로맨스가 더해진 이 이야기는 당대의 젊은이들의 의식세계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인 동시에 환타지적 낭만성을 담보하는 수다스러운 순애보였다. 더군다나 의도적으로 고안된 결말의 흐릿함은 그 모든 낭만적 가능성의 장치들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9년이 지났다. 에단 호크는 우마 서먼과 이혼한 이후 비쩍 말라버린 몸과 얼굴이 됐고 줄리 델피 또한 그에 못지 않게 해골바가지가 되서 만나게 됐다. 속편과 후일담을 위하여. [비포선셋]에서 그들은 다시금 수다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좀 다르다. 여기서 낭만은 이미 증발해버린 옛이야기가 되버렸고 그들은 그 남겨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머뭇거린다. 9년 전에는 그들의 만남과 같은 모양의 헤어짐을 동원함으로써 자신들을 맺게 만든 운명에 대한 무모한 실험을 보여줬던 이들은 이번엔 현실의 벽 앞에서 허우적거린다. 환타지는 이미 깨져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제시는 그날의 기억을 재생한 결과물로 먹고 살고, 현실과 다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셀린느는 아예 그 시간 자체를 경멸하게 됐다.
갑자기 여기서 [로스트 하이웨이]가 떠올랐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춤을 추는 셀린느를 바라보는 제시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 마지막에서, 배경음악이 조빔의 'INSENSATEZ'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영원히 멈춰진 사건, 순환하는 시간, 날아가버린 환상을 먹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이들. 다시금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미래에 대한 유혹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9년 후에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다시 비포... 어쩌구를 만든다 해도 이것은 일종의 함정이다. 셀린느와 제시는 언제나 그 직전에 멈춰선 이들이었다.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비포 선라이즈] 때보다도 알 수가 없다. 이미 우리는 부숴진 낭만의 파편을 끌어안고 사는 두 주인공이 얼마나 피폐해져버렸는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이 오랜만에 나온 속편이 보여준 결과처럼 그것은 이미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직전에 멈춰서 있기에 이 영화는 스스로가 박제가 되는 길을 피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것은 상당히 잔인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