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바이러스, 미국의 나르시시즘
지아우딘 사르다르·메릴 윈 데이비스 지음, 장석봉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역자가 후기에서 고백했듯이, 9. 11 테러가 터졌을 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미국인과 '나머지 세계인'의 시선은 분명하게 갈렸을 것이다. 나 또한 역자와 같은 심정을 공유했던 사람으로 2001년 9월 11일, 가평에 있는 군부대 내무반에서 잠에서 깨어나 여느 때처럼 아침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튼 내 눈에는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이 보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순식간에 납득이 갔다.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되묻는다. '왜 그들은 우리를 증오하죠?' 저자는 왜 미국인들이 그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는가와 왜 미국외 세계인은 미국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가를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책은 2001년 9월 11일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쌓여오던 제국 밖 사람들의 제국에 대한 사고가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를,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책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 책이 보여주는 관점이나 제시되는 근거들은 미군이 주둔하거나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강제로 끌려갔거나 정치적인 개입을 받았던 나머지 세계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그 동어반복이 아주 기초에서부터 찬찬히 이뤄지기 때문에 이런 계단쌓기와 같은 과정은 반대로 우리에게 저자들이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들과는 또 얼마나 다른 관점에서 살아오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좌파, 소수인종 논객들과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미국을 다룬 다큐멘터리들, 심지어 멜 깁슨이 주연한 [패트리어트]에서조차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미국이라는 나라의 폭력적 태생과 총체적 모순과 몰이해와 거만함을 다시금 접하게된다. 민주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지만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나라, 평화를 외치지만 가장 폭력적인 나라, 끝없이 열린 사회를 주장하지만 그것이 되려 정치적 약점이 되는 나라. 이 거대하고 무거운 모순의 구조는 미국을 총체적으로 정의하게 만든다. 미국엔 노엄 촘스키도 있고 마이클 무어도 있고, 아마도 세상에서 좌파와 진보지식인들,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나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미국을 완전하게 변화시키진 못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한정된 두 정치집단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야 하는 현실과 민주주의라는 제목이 부끄러울 정도로 엉성하기 그지없는 선거인단 투표제도, 그리고 그 모든 주변부적인 정치적 주장을 개방성이라는 미국적 특성을 통해 결국 미국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녹여 흡수해버리는 식성.

다시 9.11의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앞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그 현상을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다라는 감정. 그것은 단순히 미국이라서 쌤통이다 라는 느낌이라든지, 죄의 인과율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광경을 무척이나 자주 봐왔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 속에서, 테러를 당하고 끊임없이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영화속 미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비슷비슷한 폭발의 풍경들을 아주 징하게 봐왔다. 그 익숙함은 미국영화에 물든 거의 모든 세계사람들에게도 공통된 것이리라. 그 영화들은 단순화되고 표피화된 미국의 적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의 세계가 가진 복잡다단한 모순의 구조에 면죄부를 씌워준다. [트루라이즈], [에어포스 원], [비상계엄] 등등의 영화들 속에서 미국인은 피해자이며 돌발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고 홀연히 등장한 육체적 백인 영웅은 그 모든 난관을 타개하는 신화적 과업을 차례차례 수행한다. 9.11 시대의 현실은 이런 일련의 대량생산형 플롯의 영화들을 그대로 복제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폭력의 비극은 더욱 구체화되어 그라운드제로라는 현실로 드러났고 그 모든 전개에서 보여주는 음험한 음모론적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단순하고 표피화된 헐리웃 영화 같았다. 그래서 부시는 스스로 선의 축이 되어 악의 축을 지정했고 B급 헐리웃 액션영화처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보복의 미사일 세례를 퍼붓는다. 증오. 적. 그렇기 때문에 덜렁 편집되어 줄기차게 보여지는 9.11의 붕괴장면은 압도적이지만 싸구려 같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의 실베스터 스탤론과 브루스 윌리스는 악을 물리치고 전투에서 승리하였는가? 당연하지만 영화 속과는 달리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부터 미국이, 정확히는 부시정권이 줄기차게 얘기하는 악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그 모든 것이 제국이 드러낸 잔인한 모순성의 현현,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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