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멘트 Filament - 유키 우루시바라 작품집
우루시바라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우루시바라 유키의 출세작인 [충사]는 아직 안 봤다. 왜냐하면 그 작화라는 것이, 마치 구마가이 가즈히로의 [사무라이건]과 토우메 케이의 스타일을 적당히 섞은 것 같은 인상이었기에 거부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초기단편들을 모은 이 작품집이 늦게나마 나오게 된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거니와 이를 먼저 보게된 이유는 그녀가 가진 세계관의 시작서부터 이해하고픈 맘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는 작화로만 본다면, [필라멘트]에서 보여주는 그림들은 썩 훌륭하다고 보기 힘들다. 흔들리는 거친 선, [충사]와는 다르지만 역시나 어딘가 익숙한 순정만화적 캐릭터 디자인들. [필라멘트]에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아직 능숙하지 못했던 시절의 작가가 가진 아마추어리즘이다.

그러나 필라멘트, 전구 속에 들어있으면서 그 가는 선으로 인간이 그제껏 가질 수 있었던 가장 밝은 빛을 만들어냈던 얇은 텅스텐 덩어리를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집은 그 제목만큼이나 끊어질 듯 아련하지만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남을 소박하게 빛나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기억들과 이미 지나간, 혹은 지나가게 될 옛시간에 대한 정겨운 괴담들이다. 오래 묵어 반폐허가 된 장소들, 땅끝 구석에 있을 법한 한적한 시골, 여름.

물론 연출상의 감상적 실험성, 그리고 꾸준하게 회고와 소멸의 키워드를 가지는 이야기들은 앞서 지적한 작화의 빈약함과 더불어 작가의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그림의 불안정한 선은 몽환적인 아우라를 만들어내고 특징없는 캐릭터 디자인은 작품의 소박한 맛을 더해준다. 나름의 파격을 선보이고 있긴 하지만 이해 못할 영역이 아닌, 모험은 하지 않는 담백한 연출은 작가의 태도가 결코 치기어린 것이 아니란 걸 느끼게 해준다. 분산된 컷들이지만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연상들 속에서 우리가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내재화된 겸손함이다. 그래서 짤막하지만 짧지 않은 여운을 가져다주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아직 세상에 익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이 보여주는 반가운 미덕을 오랜만에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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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8-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충사>를 인상깊게 봤는데... 이 책도 꼭 봐야겠군요..

hallonin 2005-08-12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사의 모티브가 되는 단편 두개도 실려있습니다. 소재만 같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봐야 하지만.... 그리고 작품들 전반적으로 충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고풍스러운 느낌보다는 현대적인 느낌이 더 강하죠.